열정과 대담함을 쏟아부은 페레 브로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떤 연주든 슈베르트 앞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그제야 그는 슈베르트를 좀 더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는 곧 7번 객석의 슈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웃음 지으며 박수를 멈추지 않았고, 브로스는 앞니 하나가 없는 그의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공연장에는 여전히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3층 저 멀리에서, 호박색의 힘차고 부드러운 박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한 투명 슈베르트와, 피셔의 대담함과, 아니면 미친 피아니스트와의 연대를 표하고 싶다는 듯 쏟아졌다. 마치 집중호우 전의 굵은 빗방울들이 후두둑 모여들듯, 조금씩 조금씩 퍼져 나가던 박수 소리는 전 관객의 기립 박수로 마무리되었다. 페레 브로스는 피셔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인 책을 관객에게 흔들며, 슈베르트가 계속 박수를 치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났다. - P31

아구스티는 작별 인사라도 몇 마디 하고 싶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에우랄리아는 자신의 인생에 깃든 빛이었고, 그 말들이 그의 절망적인 사랑에 대한 조촐한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문을 여는 순간마다, 그의 영혼에는 눈물이 고여 버렸다. 아마데우는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마도 그의 고통에 함께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33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커진 그는 집을 너무 일찍 나섰다.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진료 시간 한 시간 전이었다. 자신의 유통 기한을 알고 싶은 집착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형 선고를 받기에 앞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는 에우랄리아를 생각하며 빈 카페로 걸어갔다. 아내가 함께 와 주었다면, 그리고 건강과 무관한 다른 대화로 그의 정신을 분산시켜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이기적이군. 차가운 세상에서 살게 된 아내에 대해서는 연민도 없이 그녀가 필요하다고만 생각하다니, 정말 이기적이야. - P35

방 전체는 짙은 황토색 느낌이 물씬 났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오른쪽 창문으로 옮겨 갔다. 창문은 무엇이 빠져나가는 지점이 아닌, 방과 그림 속 인물을 비추기 위해 아주 강렬하고 거침없는 햇살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제목을 따르자면 그림 속 그 인물은 철학자로서, 렘브란트가 그를 그린 사 세기 전부터, 식탁보가 늘어진 원형 탁자 앞에 앉아 창문을 통해 들어 오는 환한 빛을 잘 이용해, 지혜가 가득 담긴 책을 읽는 중이었다. 가슴팍 중간까지 내려온 철학자의 수염과 그의 전체 모습은 고요함, 평안함, 난 아픈 데가 없어요, 난 죽음의 소식을 전해 줄 의사와의 만남도 예정된 바 없어요, 내 주변의 그 누구도 죽지 않았어요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같은 방 창문의 반대편에는 상아탑에서부터 조급함, 질병, 불쌍한 나의 사랑 에우랄리아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채워진 현세로 내려오는 계단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짐작건대, 그림 앞쪽에는 탁자 위에 놓인 책만큼 두꺼운 책들로 가득한 책장이 있을 터였다. 어째서 내가 저 철학자가 아니란 말인가? - P36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갤러리를 홍보하고 노르웨이 관광을 독려하기 위해 기획된 오슬로 국립 미술관 순회 전시회에 선보인 스물여섯 점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짧게나마 행복한 이 순간에는 최종 선고에 대한 두려움, 에우랄리아와의 닿을 수 없는 거리, 카를라의 차가움, 세르지의 반항 섞인 눈물, 그리고 아마데우의 침묵······ 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수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마치 좀 더 집중적으로 그림을 관찰하여 지혜의 진정한 샘을 파 보겠다는 듯, 철학자의 그림 앞으로 대여섯 번 되돌아왔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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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는 관객들의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무대 인사를 하며 무의식중에 앞줄에서 본 것이 헛것이 아닐까 봐,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다. 당연히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당장 짐을 싸서 무대를 떠나야만 해결될 일이다. 어떤 여자의 기침. 어떤 남자의 기침. 아득히 멀고 큰 그 기침 소리가 연주 홀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괜찮아, 오른쪽에는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어. 얼음, 적, 그리고 죽음만이 있을 뿐. - P9

도이치 번호 960의 안단테 소스테누토 악장은 다뉴브강의 안개로부터 찾아오는 죽음과 같아서 처음에는 아주 멀리 있다가 조금 지나면 소스라치리만치 가까이에 와 있다. 페레 브로스는 삼 분간 지속되는 이 주제 부분의 극적인 긴장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매우 서서히 진행되는 크레센도의 조절은 금으로 만든 손에 다이아몬드 열 개가 각각의 손가락에 박히지 않은 이상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재현부에서 그는 청중을 압도적인 고요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연주 홀의 벽을 감싸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유만으로,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그는 파르도에게 잠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붉으락푸르락하며 그를 따라오는 매니저 를 뒤로한 채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가 문을 쾅 닫았다. 내가 말이야 저자의 목소리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내가 없으면 스케줄도 못 짜고, 일정도 기억을 못 한다고! - P14

두 친구는 튜닝이 안 된 비를 한참 동안 말없이 듣고 있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 위에 버려진 금속성의 물체를 두드리며 도#의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 꽤나 거슬렸다. - P16

트루욜스 선생에게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아홉 살 때부터, 뵈브 암발로 채워진 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마흔일곱 살까지, 총 삼십팔 년간 손떨림증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항상 완벽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훌륭하고, 안정감 있고, 자신만만하고, 강렬하고, 미묘하고, 부드럽고, 무결하기 위해 연습한 시간을 위하여 그는 술잔을 들이켰다. 항상, 항상, 항상, 항상.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나서, 헛된 시간이여, 그는 지금에 와서 당장 그만두겠다고, 수백 개의 전구가 달린 거울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골방에서, 그것도 연주회 중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연습을 해 놓고도 슈베르트가 무섭다니. 그를 내보내라고, 기세등등한 샴페인 잔에 낮게 소리쳤다. 그를 쫓아내 버려. 그는 여기 있을 권리가 없다고! - P20

친구의 차가운 반응에 낙심할까 봐 얼른 전화를 끊고 그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왜 이토록 잔인한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내 호텔로부터, 내 갈망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고, 내가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구나.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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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두 가지 마음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에요. 선택지가 하나뿐인 선택도 있나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러 가는 건 해야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고 싶은 마음일 거예요. 하지만 소년에게는 군인을 따라가는 선택지밖에 없어요. 살아남으려면, 그게 유일한 선택지예요. 소년은 아마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지 몰라요. 그러니 전쟁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어요. 소년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에요. - P150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요. 그러면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 P158

불행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허리를 끈으로 묶고 가듯이요. 그래서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한 발 더 끌어 올리는 거예요. 그 뒤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또 그 뒤에 있는 사람도요. - P159

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버린 사람들을 상상해요. 회오리바람 속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어요. 내 탓도, 다른 누군가의 탓도 아니에요. 그저 회오리 바람이 너무 강한 것뿐이에요. 우리들을 휩쓸어 버리는 그 거센 바람을 나는 운명이라고 불러요. - P165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언제나 남아 있는 것들이지. 그렇지?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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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 P75

침묵, 뚫을 수 없는 침묵, 끝없는 침묵, 끔찍한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밤에도 낮에도 듣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내 귀와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어떤 소음보다 견디기 힘들고, 천둥보다, 사이렌의 울부짖음보다, 폭발음 보다 더 끔찍하다. 그것은 비명이나 흐느낌보다 더 신경을 찢고 더 슬프다. 수백만 사람이 이 침묵 속에서 억압받고 있음을 나는 매 순간 깨닫는다. 그것은 고독의 정적과 전혀 다르다. 산, 호수, 숲에 정적이 흐르면, 마치 풍경이 휴식하고 꿈꾸기 위해 숨을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정적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이 침묵은 인위적이다. 강제, 명령, 강요된 위협적 침묵, 공포의 침묵이다. 거짓으로 직조된 거대한 장막 아래에서 나는 생매장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본다. 나는 이 침묵 뒤에서 재갈이 물리고 입이 틀어막힌 수백만 목소리의 굴욕과 분노를 인식하고 느낀다. 그들의 침묵이 내 귀를 찢고, 밤낮으로 내 영혼을 때린다. - P101

잔혹한 추적자들은 티끌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더욱 잔혹하게 고문한다. 라디오를 압수했다. 입을 틀어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귀까지 틀어막아 모든 희망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 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언제 다시 말할 수 있게 될까요? 이 침묵의 고문은 언제 끝날까요?"
이는 이 세상에서 고안된 가장 잔인한 영혼 훼손이다. - P104

침묵, 그 끔찍한 침묵은 사람들의 모든 연락을 끊어놓았다. 계속 졸라봐야 소용없다. 한 사람이 전할 수 있는 소식은 유럽의 4분의 1을 집어삼킨 이 비참한 바다에서 그저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침묵이 삼켜버린 수많은 행복한 사람에 대해 알게 되면, 모두의 자부심이자 신앙이었던 한 세기의 발전과 과학, 예술, 위대한 발명품을 쓸데없는 잔혹함으로 더럽힌 무리는 나중에 자책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 P105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 모든 상황에서도 계속 독일어로 창작하고 글을 쓰는 것에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독일어로 나치의 자기 신격화에 맞서 줄곧 싸워왔고, 바로 이 독일어야 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입니다. - P115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 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류가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필수임을 지금처럼 명확히 인식한 적도 없었습니다. - P115

그러니 우리 함께합시다. 각자의 나라를 위해,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 이 의무를 완수합시다. 이 어두운 시절에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믿고 서로를 신뢰할 때만, 우리는 명예롭게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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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안톤을 생각한다. 그토록 큰 도움을 내게 준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든다.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는 늘 한결같이 쾌활하고 태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 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 P22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P33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은) 가장 기이한 현상은, 나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개인의 삶은 거의 아무렇지 않게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힘든 시기였지만, 베를린이나 빈에서는 겉보기에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돈의 실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기차는 붐볐고, 우편물은 제시간에 도착했고, 제빵사는 빵을 굽고, 농부는 땅을 일구고, 아이들이 잉태되고 태어났으며, 모두가 예전처럼 자신의 소명, 성향, 재능대로 살아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했고, 어쩌면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하게 집중해서 일했던 것 같다. - P41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록 삶의 오랜 가치(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 등)가 더욱 중요해졌다. - P42

돈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자극을 나는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객에게 하듯이, 나는 돈에도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다. 하지만 돈은 방문객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 P44

이 시대의 우리는 쏟아지는 이 모든 사건을 매일, 매시간 주의를 기울여 따라갈 여력과 참여의식을 충분히 가졌을까? 솔직하게 자문해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끊임없이 닥치는 높은 긴장에 대처할 여력이 없고, 우리는 그저 이따금 좌절과 절망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54

자기 시대에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동시대 사람의 공포와 괴로움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대다수 사람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비난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참여 의지와 공감 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강한 흥분이 연속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너무 오래 계속 되는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 P55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이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 P56

전쟁 첫해 말에 우리가 더는 전쟁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 P56

세계의 재앙이 길어질수록 고통과 연민 사이의 비례 관계가 점점 깨졌다. 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수천 명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수백 명의 죽음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약해졌다. 신문 보도는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뇌에만 도달할 뿐, 피로한 상상력과 과로에 지친 피곤한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P58

자연은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길 요구한다. 우리가 때때로 시대에 무관심해 보인다면, 그것은 자기 피조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연의 잘못이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 P60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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