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 내가 먼저! 내가 하고 나서 네가 해. 나부터 하자니까! 네가 안 하니까 내가 한 거잖아. 내가 말하려니까 네가 또 하겠다고!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아직 안하고 있잖아?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내가 하니까 따라서 하다니! 내가 말하니까 따라 하고서. 나 하고나서 해! - P109
어떻게 감히 남편을 무고하겠습니까? 단지 억울함을 품은 귀신이 되기는 싫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희롱해서는 안 되지요. 아내 된 사람도 남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지요. 여잔 절대 사랑에 빠져선 안 되지요.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해도 절대 자기 생명을 가벼이 버려선 안 되지요— - P113
(노래한다) 사람이여 사람, 사람이여 사람. 이 사건은 완전히 그 스스로 벌인 거라네. 귀신이 되어서야 세상 욕정을 벗어날 수 있지. 사람으로는 그저 번뇌만 만들어 낼 뿐. - P116
그녀는 그가 할 말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대.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말해 버렸거든, 그 번드르르한 말들, 마음을 혹하게 하는 그럴 듯한 말들, 그 많은 정겨운 말들, 그 많은 달콤한 말들을 그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여인에게든지 또다시 다 할 수가 있거든. 단지 그녀에게만 멍청한 척하며, 침묵으로 감싸 버리지----. - P135
아냐. 가만있는 게 낫지. 그녀는 그가 또 똑같은 얘길 되풀이할 거란 걸 알고 있대. 이제 아주 질려 버려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더 이상은 그가 목구멍에서부터 끌어내서 그럴듯하게 뱉어내는 그 위선의 소리와 억지웃음을 듣고 싶지 않고. 그는 웃음소리에서도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게 드러나거든. 얼음처럼 차가움에 덧입혀진 위선적인 은근함이란! 그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모습도 몽땅 거짓이지, 거짓. 전부 다 상황에 맞춰 연극을 하는 거라고. 지금은 연극도 끝이 났고, 그의 모든 것은 다 계획된 것이었어. 시작만 되면,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해. - P135
그녀는 자기는 소유하려면 완전히 소유해야만 한대, 사랑하려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조금의 허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느니만 못 하다는 거지. 그녀가 그를 갖는다고 할 때는 그녀가 그와 함께 느낀 모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고, 어둠이나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까지도 말야.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 남자를 완전히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이런 어둠 속에, 음 음 하는 소리, 질식할 듯한 고통과 환희를 감추면서 그는 그녀와 그리고 또 다른 여인과 똑같이 이런 느낌들을 나누었으니까.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와 인연을 끊는 것이 낫다는 거지. - P137
(귀가울여 듣는다) 다시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겠지? 그 인적도 끊긴 고요한 밤, 그녀 심장이 쿵쾅거리게 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받고 싶어도 감히 받지 못하지만, 안 받으려니 차마 견딜 수 없는 그 벨소리. (탄식한다) 그 많은 조잘거림과 정적마저도 다시는 없을 거야. 차라리 졸려서 더 이상 못 견딜지언정 누구도 전활 끊으려 하지 않았지. 지금 그녀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애인과 친구 그리고 원수들과의 연락을 이미 다 끊어 버렸지. 그녀도 더는 이 방에서 걸어 나가서 되는 대로 술집 하나 찾아 들어가 적당히 남자를 사귈 용기가 나지 않아. 아침에 술이 깨면, 온통 털북숭이인 벌거벗은 남자, 이름조차 잊어버린 낯선 남자 옆에 누워서, 공허함과 혐오감만이 남아 있겠지. 그럴 땐 바닥에서 자기 옷 줍기도 바쁘게 도망해 버릴 걸. 그녀도 그런 용기는 더 이상 낼 수 없어. 그녀는 마음이 다 사그라 들어서 이젠 욕망도 느끼지 않아. - P142
한쪽 팔이 숄 사이로 드러나는데, 손바닥은 회백색이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마다 조개 껍질 같이 투명한 칠이 되어 있다.
(숨을 몰아쉬며) 아니야···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며) 그녀는 이 공포마저도 진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하지. 아니면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공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분명 죽음을 경험해 보아야해. 먼저 죽음이 뭔지, 죽음의 고통, 멀쩡하게 살아있는 채로 죽어 가는 경험을 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거고, 비로소 그녀가 다시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알게 될 거야.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를 진작시킬 수가 없어.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면서, 또 죽자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애를 쓰지. 도대체 정말 실재하는 여인일까? 아니면 그저 껍데기만 있고 사실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 P145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그녀도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나 보지? 그녀가 경험하지도 않은 어릴 적 이야기를, 또 무언가를 꾸며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뭔가 아름다운 것을 꾸며내는, 뭔가 아름다운 걸······꾸며내는······, 그녀는 그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완전히 오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생활이 바로 연이은 오해 아닐까? - P151
예전엔 비바람이 지나고 복사꽃이 떨어질 때나 창밖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만 바라보아도, 그녀는 주루룩 눈물을 떨어뜨리곤 했는데. 물론 복사꽃을 슬퍼한 건 아니었고, 또 무엇 때문에 우는 건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말야. 지금 얘기가 아니고, 그때 세상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한 계집애 얘기지. 사실은 다 자기 스스로 벌린 일이었지. 자신은 물론 사람들에게 번거로운 일들을 만들어댔지. 그녀는 그녀뿐 아니라 여자아이들은 대개 다 그랬다나. 늘상 자기네들과 남자들 사이의 그런 형편없는 이야기로 그녀를 꽤나 번민하게 만들었으니까. - P156
그녀는 자신이 언 강 위를 미끄러져 가는데 멈출 수가 없었대.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인데, 그저 깨어진 얼음 사이로 떨어져 아득히 검은 죽음의 물 속으로 빠질 순간을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모든 것이 다 눈꽃처럼, 물만 만나면 그냥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그녀는 이 넓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중요한 존재도 아니잖아, 사라지면 그냥 사라지는 거고, 잊혀져 버리고, 무시되어 버리고, 한번 생을 마치면 그걸로 그만인 거지······ 헌데 그녀는 끝내 그런 원한과 질투, 탐욕과 번뇌 그리고 초조를 떨치지 못한 거야. 그녀도 부처님이 모든 게 밀 공(空)이라고 한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허영을 떨치지 못한 거지. 그래서 그녀는 묵묵히 기도했지.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이 세속의 인연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어. - P161
(무릎을 꿇고) 그녀는 자신의 피로 더러워진 오징육부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대. (앞으로 기울여 유심히 본다) 어떻게 그걸 깨끗이 씻을 수가 있겠어? 그건 본래 그렇게 피로 뒤범벅되어 있는 걸! (한 발 다가가, 유심히 듣는다) 그녀는 씻겨지든 안 씻겨지든 간에 씻어야 한대. (다가가) 아무리 씻어도 깨끗이 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무엇 때문에 고집을 피고 그렇게 씻고 있지? - P164
(바닥에 벌렁 누워 천천히 중얼거린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했는지도 모른대. 말했지만 아무 쓸데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한 거만 못한 지도 모르지.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또는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는지도 몰라. - P166
(아연하여) 그녀는 뭐 사상이란 것도 없어. 일찍이 그녀를 하염없이 번민케 하고 고민케 하면서도 답을 얻지 못하던 온갖 생각들, 갖가지 인과 관계들, 끝없는 분석, 무수한 가설 위에 세워 놓은 전제로부터 도출된 온갖 가능성과 결론, 그리고 그 자체 반드시 믿을 만하지도 않은 결론, 그녀는 할 말도 없어. 살아 움직이고 끊이지 않고 정의도 있고 관계도 있고 내용도 있는 함의의 무의미함. 그녀는 감각도 없어.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중요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형태가 있건 없건, 소리가 있건 없건 감정이 있건 없건 다 사라져 버렸으니까. 혼돈 속에서 그저 마음 속에 한 줄기 어스름한 빛만이 밝은 듯 어두운 듯, 이것조차 믿을 수 없이 완전히 소멸한다면······ - P169
아래채서 방아 찧는 이가 뉘인고?
젊은 행자입니다. 속성은 노씨이고 이름이 혜능이지요. 그게 법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계율을 받지 않았어요. 온지도 한 여덟 달 남짓 됩니다. 막 왔을 때 데리고 가서 봐온 적이 있는 데요.
그래 기억나는군. 영남에서 왔다던 말썽꾸러기. 입만 벌리면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부처되기만 소원이라던 녀석이지.
입심 한 번 좋지요. 완전히 산중 촌놈인데, 대사님께 기어 오를 만큼 담이 크지요.
(웃으며) 곧은 말을 하는 건 마음이 맑아서니, 나무랄 필요 없다. - P183
(앞으로 세 걸음 나아와 예를 올린다) 노스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너는 밖에서 왔으니 문 밖에 무엇이 있더냐?
온갖 세상에 일월과 산천, 뜬 구름과 흐르는 물, 그리고 바람과 비가 있습니다. 세상에 수레와 말들, 고관과 병졸들, 오는 이는 오고 가는 이들은 가지요. 또 상인들이 서로 다투어 물건을 팔고 벙어리는 꿀 먹은 모습이지요. 어리석은 남녀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지금은 밤이 깊어 고요하니 오직 막 태어난 간난 아기만이 울고 있습니다.
문 안에는 무엇이 있더냐?
스님과 제가 있습니다.
(웃는다) 나라는 건 무엇이냐?
마음속의 생각입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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