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게 되리란 걸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차가운 신선함 속에서 보글거리고 있으니까. 매 순간이 있기에 내 삶은 아주 길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직전인데 태어날 수는 없는 상태인 듯한 느낌 속에 있다.

나는 세상에서 고동치는 심장이다. - P56

나는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시간의 폭음을 듣는다. 그것은 소리 없이 형성되고 있는 세상의 소리다. 내가 그걸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시간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시간 없는 세상. 이제 내 의식은 가벼워졌다. 그것은 공기다. 공기는 장소도 시간도 갖지 않는다. 공기는 모든 것이 존재할 비非장소이다. 내가 쓰고 있는 건 공기의 음악이다. 세상의 형성. 그것은 앞으로 천천히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이미 그랬던 대로 될 것이다. 미래는 앞에, 뒤에, 그리고 양옆에 있다. 미래는 늘 존재했던 것이고 늘 존재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건 독해가 아니라 존재하기를 위한 것이다. - P58

문득, 살기 위해 질서가 필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야 할 패턴은 없으며, 패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난다. - P59

나는 여전히 ‘그‘나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선보이는 건 ‘저것‘이다. 저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탄생과 죽음. 탄생. 죽음. 탄생, 그리고—세상의 호흡 같은 것. - P59

나는 내 알려지지 않은 부분 속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태어나면 ‘그‘ 혹은 ‘그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일단은, 지금 나를 지탱하는 건 ‘저것‘이며 그건 곧 ‘그것‘이다.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 내는 건 매우 중대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한다. 우리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완전한 어둠 속을 걷기. 그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산고와도 같으니: 어떤 것이 태어난다. 그것 자체가. 그건 마른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 중심부는 부드럽고 살아 있는, 필멸하는, 위태로운 그것이다. 기초 물질의 생명. - P72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당신은 그걸 느끼는가? 나는 느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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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로운가? 무언가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아니면 내가 그걸 붙잡고 있나? 또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모든 것과 결합해 있기에 완전히 풀려날 수 없다. 게다가 한 인간은 곧 모든 것이다. 지니고 다닐 수가 없으므로 지니고 다니기에 무겁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것이다. - P51

나는 처음으로 사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다. 내가 사물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건 자신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 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나의 거짓 힘을 불신한다. - P52

나는 태어날 때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내 비극의 원천이다. - P54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순수하다. 당신이 이 고독을 느끼기를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은 창조의 안개 속에 있다. 명료한 어둠, 빛나는 어리석음. - P55

거울이 등장하기 전, 인간은 호수에 비친 그림자 말고는 자기 얼굴을 알지 못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모두가 자신이 가진 얼굴에 책임을 지게 된다. 지금 나는 내 얼굴을 볼 것이다. 맨얼굴. 세상에 내 얼굴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충격을 받는다.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결코는 불가능을 나타낸다. 나는 결코를 좋아한다. 그 반대인 언제나도 좋다. 결코와 언제나 사이에서 이들을 매우 간접적이면서도 내밀하게 이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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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말은 피상적으로만 들으라. 그러면 의미의 결여에서 하나의 의미가 탄생할 것이다. 내게서 높고 밝은 삶이 불가사의하게 탄생하는 것처럼. 말들의 무성한 밀림은 내 느낌과 삶을 빽빽하게 뒤덮고,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내 바깥에 남아 있는 내 것으로 변형 시켜 버린다. 자연은 뒤덮는다: 자연은 나를 완전히 옭아맨다. 그것은 섹스처럼 살아 있다. 바로 그것: 살아 있다. 나 역시 격렬하게 살아 있다—그리고 방금 사슴을 먹어 치운 호랑이처럼 주둥이를 핥는다. - P37

나는 거칠게 살아 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 나를 데려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하기에 헐떡거리며 몸서리친다.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죽음은 관능적이다. 나는 죽은 사람처럼 키 큰 풀들을 헤치며 푸르스름한 풀 빛 속을 걷는다: 나는 금으로 빚어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이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뼈들뿐이다. 나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지층 맨 밑바닥에 살고 있다: 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 P38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나는 그 핵심에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아직. - P41

나는 숨을 쉰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벌거벗은 굴은 어떻게 숨을 쉴까? 굴이 숨을 쉰다고 해도 나는 그걸 볼 수 없다. 내가 볼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를 가장 감동케 하는 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진한 타액으로 가득한 어느 완전한 세계를 발 앞에 두게 된다. 진실은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나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그런데도 나는 그것으로 산다. - P48

내가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그 질문들이 지금까지도 슬픔 속에서 메아리친다: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졌을까? 그렇다면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어떤 장소에서? 그게 신의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지금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을까? 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 P49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조금 겁이 난다. 자유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 자체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제멋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엮여 있지 않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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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큰 깃발이 무게도 적지 않을 텐데, 저리도 끊임없이 펄럭이지?

바람이 부니까 그렇지. 인연이란 게 바로 그런 거야.

하지만 바람은 본래 무정한 것인데, 왜 괜히 저 깃발을 저렇게 흔들어 댈까? 말해봐, 어디?

바람은 형체가 없는 것. 흔들리는 건 깃발일 뿐.

깃발도 무정한 것 아닌가. 근데 왜 흔들리지?
바람이나 깃발이나 다 무정한 것이나 인연이 닿아 그런 것이지.

인연은 정이 있고, 정이 있어 움직이지만, 바람과 깃발은 모두 무정한 것인데 어째 움직일까? - P204

옷만 지니고 법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 본래 빈 손으로 왔어. 그 가사도 몸 밖의 물건이니, 시비만 일으킬 뿐이지. 의발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 선종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야. 내가 떠난 후 사악한 법들이 시끄러이 굴 것이지만, 자연 누군가가 나와서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 뜻을 세우고 내 법을 밝힐 것이야. - P230

지금 대사님이 계시니 법통이 있으나, 대사님이 돌아가시면 뒷사람들은 어찌 부처님을 뵈오리까?

뒷사람 일은 뒷사람 일이고, 너희들 눈앞의 일이나 잘 보살피라! 내 할 말은 다 하였다. 더 할 말은 없으나 한 마디만 남기겠으니 잘 들어라. 자신에게서 참을 구하지 않고 밖에서 부처를 찾고 있으나, 다니며 찾는 것은 다 큰 바보로다. 다들 이 말을 잘 새겨 조심하라! (단정히 앉아 눈을 감는다) - P230

(노래한다)
붓을 쥔 자는 문필을 희롱하고
도살하는 자는 칼을 휘두르고,
일 없는 사람은 차나 마셔,
병이 있어야 약을 먹지.

(앞으로 나온다. 노래한다)
떡 만드는 자는 밀가루 치대고,
똥 푸는 자는 서둘러 퍼야지. - P246

(노래한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아침,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오늘 밤 그리고 내일 아침,
그렇게 아름답다
여전히 그렇게 아름답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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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내가 먼저!
내가 하고 나서 네가 해. 나부터 하자니까!
네가 안 하니까 내가 한 거잖아. 내가 말하려니까 네가 또 하겠다고!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아직 안하고 있잖아?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내가 하니까 따라서 하다니!
내가 말하니까 따라 하고서. 나 하고나서 해! - P109

어떻게 감히 남편을 무고하겠습니까? 단지 억울함을 품은 귀신이 되기는 싫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희롱해서는 안 되지요. 아내 된 사람도 남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지요. 여잔 절대 사랑에 빠져선 안 되지요.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해도 절대 자기 생명을 가벼이 버려선 안 되지요— - P113

(노래한다) 사람이여 사람, 사람이여 사람.
이 사건은 완전히 그 스스로 벌인 거라네.
귀신이 되어서야 세상 욕정을 벗어날 수 있지.
사람으로는 그저 번뇌만 만들어 낼 뿐. - P116

그녀는 그가 할 말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대.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말해 버렸거든, 그 번드르르한 말들, 마음을 혹하게 하는 그럴 듯한 말들, 그 많은 정겨운 말들, 그 많은 달콤한 말들을 그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여인에게든지 또다시 다 할 수가 있거든. 단지 그녀에게만 멍청한 척하며, 침묵으로 감싸 버리지----. - P135

아냐. 가만있는 게 낫지. 그녀는 그가 또 똑같은 얘길 되풀이할 거란 걸 알고 있대. 이제 아주 질려 버려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더 이상은 그가 목구멍에서부터 끌어내서 그럴듯하게 뱉어내는 그 위선의 소리와 억지웃음을 듣고 싶지 않고. 그는 웃음소리에서도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게 드러나거든. 얼음처럼 차가움에 덧입혀진 위선적인 은근함이란! 그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모습도 몽땅 거짓이지, 거짓. 전부 다 상황에 맞춰 연극을 하는 거라고. 지금은 연극도 끝이 났고, 그의 모든 것은 다 계획된 것이었어. 시작만 되면,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해. - P135

그녀는 자기는 소유하려면 완전히 소유해야만 한대, 사랑하려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조금의 허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느니만 못 하다는 거지. 그녀가 그를 갖는다고 할 때는 그녀가 그와 함께 느낀 모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고, 어둠이나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까지도 말야.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 남자를 완전히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이런 어둠 속에, 음 음 하는 소리, 질식할 듯한 고통과 환희를 감추면서 그는 그녀와 그리고 또 다른 여인과 똑같이 이런 느낌들을 나누었으니까.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와 인연을 끊는 것이 낫다는 거지. - P137

(귀가울여 듣는다) 다시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겠지? 그 인적도 끊긴 고요한 밤, 그녀 심장이 쿵쾅거리게 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받고 싶어도 감히 받지 못하지만, 안 받으려니 차마 견딜 수 없는 그 벨소리.
(탄식한다) 그 많은 조잘거림과 정적마저도 다시는 없을 거야. 차라리 졸려서 더 이상 못 견딜지언정 누구도 전활 끊으려 하지 않았지.
지금 그녀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애인과 친구 그리고 원수들과의 연락을 이미 다 끊어 버렸지. 그녀도 더는 이 방에서 걸어 나가서 되는 대로 술집 하나 찾아 들어가 적당히 남자를 사귈 용기가 나지 않아. 아침에 술이 깨면, 온통 털북숭이인 벌거벗은 남자, 이름조차 잊어버린 낯선 남자 옆에 누워서, 공허함과 혐오감만이 남아 있겠지. 그럴 땐 바닥에서 자기 옷 줍기도 바쁘게 도망해 버릴 걸. 그녀도 그런 용기는 더 이상 낼 수 없어. 그녀는 마음이 다 사그라 들어서 이젠 욕망도 느끼지 않아. - P142

한쪽 팔이 숄 사이로 드러나는데, 손바닥은 회백색이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마다 조개 껍질 같이 투명한 칠이 되어 있다.

(숨을 몰아쉬며) 아니야···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며) 그녀는 이 공포마저도 진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하지. 아니면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공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분명 죽음을 경험해 보아야해. 먼저 죽음이 뭔지, 죽음의 고통, 멀쩡하게 살아있는 채로 죽어 가는 경험을 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거고, 비로소 그녀가 다시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알게 될 거야.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를 진작시킬 수가 없어.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면서, 또 죽자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애를 쓰지. 도대체 정말 실재하는 여인일까? 아니면 그저 껍데기만 있고 사실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 P145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그녀도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나 보지? 그녀가 경험하지도 않은 어릴 적 이야기를, 또 무언가를 꾸며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뭔가 아름다운 것을 꾸며내는, 뭔가 아름다운 걸······꾸며내는······, 그녀는 그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완전히 오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생활이 바로 연이은 오해 아닐까? - P151

예전엔 비바람이 지나고 복사꽃이 떨어질 때나 창밖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만 바라보아도, 그녀는 주루룩 눈물을 떨어뜨리곤 했는데. 물론 복사꽃을 슬퍼한 건 아니었고, 또 무엇 때문에 우는 건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말야. 지금 얘기가 아니고, 그때 세상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한 계집애 얘기지. 사실은 다 자기 스스로 벌린 일이었지. 자신은 물론 사람들에게 번거로운 일들을 만들어댔지. 그녀는 그녀뿐 아니라 여자아이들은 대개 다 그랬다나. 늘상 자기네들과 남자들 사이의 그런 형편없는 이야기로 그녀를 꽤나 번민하게 만들었으니까. - P156

그녀는 자신이 언 강 위를 미끄러져 가는데 멈출 수가 없었대.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인데, 그저 깨어진 얼음 사이로 떨어져 아득히 검은 죽음의 물 속으로 빠질 순간을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모든 것이 다 눈꽃처럼, 물만 만나면 그냥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그녀는 이 넓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중요한 존재도 아니잖아, 사라지면 그냥 사라지는 거고, 잊혀져 버리고, 무시되어 버리고, 한번 생을 마치면 그걸로 그만인 거지······ 헌데 그녀는 끝내 그런 원한과 질투, 탐욕과 번뇌 그리고 초조를 떨치지 못한 거야. 그녀도 부처님이 모든 게 밀 공(空)이라고 한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허영을 떨치지 못한 거지. 그래서 그녀는 묵묵히 기도했지.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이 세속의 인연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어. - P161

(무릎을 꿇고) 그녀는 자신의 피로 더러워진 오징육부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대.
(앞으로 기울여 유심히 본다) 어떻게 그걸 깨끗이 씻을 수가 있겠어? 그건 본래 그렇게 피로 뒤범벅되어 있는 걸!
(한 발 다가가, 유심히 듣는다) 그녀는 씻겨지든 안 씻겨지든 간에 씻어야 한대.
(다가가) 아무리 씻어도 깨끗이 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무엇 때문에 고집을 피고 그렇게 씻고 있지? - P164

(바닥에 벌렁 누워 천천히 중얼거린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했는지도 모른대. 말했지만 아무 쓸데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한 거만 못한 지도 모르지.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또는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는지도 몰라. - P166

(아연하여) 그녀는 뭐 사상이란 것도 없어. 일찍이 그녀를 하염없이 번민케 하고 고민케 하면서도 답을 얻지 못하던 온갖 생각들, 갖가지 인과 관계들, 끝없는 분석, 무수한 가설 위에 세워 놓은 전제로부터 도출된 온갖 가능성과 결론, 그리고 그 자체 반드시 믿을 만하지도 않은 결론, 그녀는 할 말도 없어. 살아 움직이고 끊이지 않고 정의도 있고 관계도 있고 내용도 있는 함의의 무의미함. 그녀는 감각도 없어.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중요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형태가 있건 없건, 소리가 있건 없건 감정이 있건 없건 다 사라져 버렸으니까. 혼돈 속에서 그저 마음 속에 한 줄기 어스름한 빛만이 밝은 듯 어두운 듯, 이것조차 믿을 수 없이 완전히 소멸한다면······ - P169

아래채서 방아 찧는 이가 뉘인고?

젊은 행자입니다. 속성은 노씨이고 이름이 혜능이지요. 그게 법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계율을 받지 않았어요. 온지도 한 여덟 달 남짓 됩니다. 막 왔을 때 데리고 가서 봐온 적이 있는 데요.

그래 기억나는군. 영남에서 왔다던 말썽꾸러기. 입만 벌리면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부처되기만 소원이라던 녀석이지.

입심 한 번 좋지요. 완전히 산중 촌놈인데, 대사님께 기어 오를 만큼 담이 크지요.

(웃으며) 곧은 말을 하는 건 마음이 맑아서니, 나무랄 필요 없다. - P183

(앞으로 세 걸음 나아와 예를 올린다) 노스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너는 밖에서 왔으니 문 밖에 무엇이 있더냐?

온갖 세상에 일월과 산천, 뜬 구름과 흐르는 물, 그리고 바람과 비가 있습니다. 세상에 수레와 말들, 고관과 병졸들, 오는 이는 오고 가는 이들은 가지요. 또 상인들이 서로 다투어 물건을 팔고 벙어리는 꿀 먹은 모습이지요. 어리석은 남녀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지금은 밤이 깊어 고요하니 오직 막 태어난 간난 아기만이 울고 있습니다.

문 안에는 무엇이 있더냐?

스님과 제가 있습니다.

(웃는다) 나라는 건 무엇이냐?

마음속의 생각입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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