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거의 뜻밖으로 약간은 우연하게 그렇게 일어나고 말았다. - P109

공포가 점점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특히 이 예기치 못했던 두 번째 살인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만일 이 순간 그가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더라면, 즉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곤란하고 절망적이며, 추악하고 어리석은가를 깨달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이때 그가 여기서 뛰쳐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난관을극복해야 할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이보다더한 악행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즉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수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혐오감은 매 순간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며 자꾸만 자라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궤 옆은 고사하고 방 안에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P120

자세히 살펴보지 못해서 자기는 알아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확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면서 그는 방 한가운데에 섰다. 괴롭고 암담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가 미쳐 가고 있으며, 이 순간 상황을 판단하여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이 없고, 어쩌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들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맙소사! 도망가야 한다. 도망가야 해!〉 그는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몸을 던졌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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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난 그 모든 일을 라주미힌 하나로 해결하고 싶은 걸까, 라주미힌에게서 모든 일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려는 것일까?> - P83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언제나 평상시의 꿈과는 달리 때로 너무 선명하고 강렬해서, 현실과 흡사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때로 기괴한 장면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상황과 모든 사건의 전개가 무척 그럴듯하고 섬세하며, 또 예기치 못할 정도로 상세하고 예술적으로도 완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꿈을꾸는 사람들이 뿌쉬낀이나 뚜르게네프 같은 예술가라고 할지라도, 깨어 있을 때는 그런 꿈을 상상해내기 어려울 정도인 것이다. 그러한 병적인 꿈들은 항상 오랫동안 기억되어서, 이미 자극을 받아 혼란스러운 인간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 P85

나중에 그가 이 당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순간순간 상기해 보았을 때, 한 가지 상황이 거의 미신에 가까울 만큼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상황은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특이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후 그에게는 언제나 끊임없이 어떤 운명의 예고편같이 여겨졌다. - P93

여기서 말이나온 김에 이번 일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내린 최종적인 결정들이지닌 한 가지 특수성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결정들에는 한가지 이상한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이 결정들이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그의 눈에는 더욱 추악하고 어리석게 보였다는 점이다. 계속되는 괴로운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계획들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지막 한 점까지도 숙고되고 최종적으로 결정되어서, 이젠 더 이상 의혹의 여지라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 계획이 어리석고 추악하고 가당찮은 일이라고 해서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 P106

모든 것에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 같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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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항상 모든 일을 망쳐 버린다……. - P14

<오, 맙소사! 이 모든 게 얼마나 혐오스러운 짓인가! 정녕, 정녕 나는.....… 아냐, 이건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짓이야!>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정말로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단 말인가? 내 마음이 그렇게 더러운 일을 생각해낼 수 있다니! 무엇보다도 더럽다. 불쾌하고, 추악하다, 추악하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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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등급제는 장애의 경중에 등급을 매겨 그에 맞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제도였지만, 실상은 예산을 아끼려는 정부가 서비스를 제한하기 위해 악용하는 도구였다. 칼자루를 쥔 정부가 함부로 휘두르는 칼날에 수많은 장애인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있었다.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전단지에는 몸통이 다 잘린 채로 전시된 ‘한우 1등급‘ 그림과 함께 ‘장애인은 소, 돼지가 아닙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P13

도살장 앞에서 만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은 이 당연한 현실이 전
혀 당연한 게 아니라고,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몹시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동물‘의 자리에 ‘장애인‘을 놓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수히 반복해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 P14

인간들이 ‘품종 개량‘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20세기 전반의 야만을 대표하는 우생학의 한 형태라는 것은 내가 살면서 알게 된 가장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장애인을 공동체의 짐으로 간주하여 가스실로 몰아넣고 단종을 시행하던 그 과학이 여전히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이 되었고 그 위에서 ‘풍요로운‘ 문명과 인권이 꽃피었다. 어떤 인간도 ‘짐승처럼‘ 살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된다며 떠나온 그 자리에 ‘짐승‘들을 남겨두었고, 그들에겐 역사상 유례없는 야만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현대의 동물들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죽는다. 더욱 끔찍한 것은 거대한 학살이 아니라 거대한 출생이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그들이 끊임없이 태어난다. 이 불의와 폭력이 그들의 숫자만큼 태어난다. - P17

인간들이 동물의 언어와 행동을 무시했을 뿐 그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저항했음을 도살장과 동물원을 탈출한 동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 P18

우리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사회 역시 비장애중심주의의 뿌리가 깊어서,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을 상상할 때 우리는 언제나 뛰어난 신체와 높은 정신력, 드높은 이상과 신념을 가진 비장애인을 떠올린다. - P19

나는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장애인이나 부랑인 수용소의 피해생존자 같은 이들을 만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어떤 것을 기어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글로 바꾸는 일이다. 삶이 부서진 사람들의 말은 갈가리 찢겨지고 조각나 있기 일쑤였다. 장애 때문이기도 하고 낮은 교육 수준이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거기에 논리와 서사를 부여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내 역할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기록한 글을 보며 자주 공허함을 느꼈다. 현실의 그들은 ‘짐승처럼 울었는데 글속엔 ‘인간‘만 보일 때 그랬다. - P22

장애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짐이나 짐승으로 제시되었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그 모욕과 굴레를 벗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그 자리에 동물들을 남겨두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도 남겨두지 말라‘고 외치면서 또 다른 편에선 동물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이 어떤 논리이든 다시 장애인을 배제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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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슬퍼할 것도 동요할 것도 없어.
작가에게는 끝이 있지만
책은 계속 나오는 거니까.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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