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대의 두 배에 가까운 인선의 그림자가 천장의 흰 벽지 위로 일렁이며 다가온다.
내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선 건 그 그림자가 멈추길 원했기 때문이다. 엎지른 먹처럼 번져와 내 그림자를 삼키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45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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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더미 위쪽 회벽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드리워진, 방금 밑동 아래 아마를 묻은 나무의 그림자다. 여러 사람의 팔처럼 소리 없이 흔들리는 그 형상을 바라보다가. 인선이 마지막 영화에서 스스로를 인터뷰했던 배경이 이 벽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햇빛 드는 회벽에 일렁이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거의 흡사했다.
인선이 그 영화를 만든 것은 이곳으로 내려와 살기 전이었으니 당시 건물은 아직 창고였을 거다. 인선의 어깨와 무릎, 희끄무레한 목선의 굴곡은 마치 잘못 끼어든 피사체처럼 화면 가장자리에 있었고,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벽 위로 저 그림자가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긴장을 느끼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인터뷰이가 방금 뱉은 말을 부인하며 내는 팔 같은, 힘껏 내밀었다가 돌연히 거두는 손길 같은 일렁임이 인터뷰의 흐름에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넣었다. - P156

어떵할 수가 이시냐. 억지로 끄성 올 방법이 어디 이시냐. 아이를 살려사주. 이 아이가 무신 죄가 이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0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아이처럼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든 인선을 향해 나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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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쾌한 느낌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을 혼잣말인 듯 해버리고
이쪽에서 반응하면 ‘농담‘이라고 딴청을 부린다.
그 사람은 일부러 그런 거다.
‘확신범‘이다!
알고 있다.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상처 받는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싫은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면 모든 것이 원만해지나?
그런 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걸까. - P86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질 수 있을까~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뭔가, 불필요한 고생을 짊어져야 하는 느낌이야······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만
살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닌가.
무리하면 마음의 빚이 돼.
그보다 애초에 싫고 좋고는
‘자유자재‘로 되는 게 아닐 텐데~~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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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 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 P44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 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 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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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무카이는
늘 그런
식이야.

신경에 거슬리는 말만 골라서.
왜 그런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쓰는 거냐고!
하지만
정말로 나를 괴롭히는 건
그 지점이 아닌 것
같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던
내 자신. - P60

정말 그래.
정말 그렇군.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게’ 라거나
‘시집을 보낸다’ 라거나
그건 마치
어딘가에 선물로 보내지기 위해
키워진 것 같잖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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