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푸른 땡초가 뜬 검은 초간장은, 후배의 어머니가 만든 땡초전의 꽃 핀 초원에 어둠이 내린 풍경과도 같다. 그렇게 나도 어두워지고, 꽃 같던 후배와 친구의 기억도 점점 어둠 속에 묻혀간다. - P64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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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 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P26

왕짱구 분식의 만두는 갈쭉하니 한 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로, 얇고 쫄깃한 피 속에 고기와 야채가 들어 있고 씹으면 뜨거운 육즙이 살짝 배어 나오는, 맛이 아주 기가 막힌 만두였다. 그날 선배들은 만두를 인원수에 맞게 3의 배수로 주문했고, 우리는 도합 12인분의 만두를 먹 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배들의 대붕 같은 뜻을 참새같이 방정맞은 내 생각으로 섣불리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만두는 더할 나 위 없이 술과 잘 어울린다는 것. - P34

왕짱구 분식은 없어진 지 오래이다. 지금은 칠십 대가 되었을 그들 부부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그리고 오래전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그 선배들은 또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고작 나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았는데도 그 당시 내 눈에는 모르는 게 없어 보였던, 잘 빚은 만두처럼 적당히 미끈하고 적당히 쫀득했던 그들은......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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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모르지? 뭘?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그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자의 눈빛이었다. 햇살이 꺾일 때까지, 뼛속으로 스미는 봄바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숲속에 누워 있었다. - P60

그때의 블러디는 서로의 손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긋고 너의 동맥 속에 내 피를 흘려 넣고 싶었던,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너의 피를 삼키고 싶던 블러디였어. 델 만큼 뜨거웠던 39도의 블러디였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심장 자체를 원했던 블러디였지. - P61

유선은 누군가에게 이 속을 꼭 한 번은 열어 보이고 싶다. 사람 없는 갈대숲을 맨발로 달려가 갈라진 벌판의 갈대 뿌리 틈으로, 나는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나 지워 버린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란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 P64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내는구나. 들리지 않는 탄성이 숨어 있었구나.
난 몰랐어. - P65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고 싶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혀에 감기는 그런 커피.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 P66

딸에겐 완벽했던 아빠. 7년 동안 연인이 되어 주었던 아빠. 한 점의 실체도 없는 환영이란 결점이 없어서 위험한 것이다. 누추하고 비굴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남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밥을 먹고 타인에게 야비해질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제 속에 있 는 것들과 같은 문제와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알아가게 될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답이 되지 못할 것들이 유선의 가슴속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든 자루처럼 담겨 있다. 딸에게 영원히 완벽한 아빠로 존재하려면 그의 파일들은 유선의 가슴속에만 묻혀 진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 P69

너무도 익숙한 그의 얼굴 대신, 그 모든 것들이 검은 인화지 위에 판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엉기어 있었다.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보그처럼 유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어둠을 오래 응시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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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 보세요.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한 적이 있습니까? 정신적인 충격이 신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엔 몸이 약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임상 사례 보고가 있긴 하지요."
"아니요. 그런 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유선은 그렇게 잘라 말한다.
지나치게 빨리.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해도 유선은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 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 P43

그래도 유선은 순간적으로 응석처럼 그와 몇 마디 더 나누어 보려는 자신을 본다. 냉온욕을 해 보면 도움이 될까요? 채식은 어떨까요? 절전 모드로 돌려놓은 가전제품처럼 근근이 움직이는 듯한 몸의 느낌은 약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정신과적 질환일까요? 제게만 들리는 복화술처럼 그 말들은 유선의 목구멍 아래서 멈칫거린다. - P44

가려움은 계절이 바뀌어도 쉬 낫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처럼 그것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저 이 약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점액질의 잠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끔찍한 가려움조차 힘을 못 쓰듯 머릿속에서 회오리처럼 맴도는 상처의 조각들도 같이 잠들어 줄 것이다. 분만통처럼, 언젠가 내 속에 있는 아픈 덩어리가 날 찢고 나가는 순간 이 모든 가려움도 같이 데리고 가 주겠지. - P45

제 할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뱉어 내는 하영의 얼굴을 유선은 홀린 듯 쳐다본다. 못난 영혼일수록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다. 누구에게도 귀하지 않은, 도움이 안 되는, 우습게 보이는, 지겹게 발목을 붙드는 인간 이유선. - P46

"일기를 쓸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볼 것을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일기란 어떤 면에선 자기 검열을 이미 거친 글이야. 난 그런 거 같아."
검열을 거친 글이라고? 유선의 머릿속으로 파일 속의 문장들이 날카롭게 박혀 왔다. - P51

그렇게 많이?
바닷가의 새들은 이렇게 잠이 든대.
뜨거운 어니언 수프.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

그가 선택한 열정의 윤리. 버림받은 혼인의 윤리. 그걸 내가 읽어도 된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적어도 그토록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 P51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는 감정의 알레르기 상태 같은 것이니까. - P52

유선의 목소리는 폐허의 건물 속, 낡은 배관에서 배어 나오는 녹물처럼 띄엄띄엄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는 컴퓨터 파일을 열어 보기 이전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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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방에 사람만 들어오면 내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건넨다.
- 책방지기 : 여기 앞에 새로 뭐 들어오는 줄 알아요?
- 손님: 뭐 들어오는데요?
- 책방지기 : 연남동 최고 충격적인 가게! 인형 뽑기 가게!
- 손님 : 어후… 너무 안 어울린다.
- 책방지기 : 그쵸? 그것도 골목 바로 입구에.
- 손님 : 근데 가서 막 인형 뽑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책방지기 : 그러니까. 달인 되고 막. - P203

독립출판물은 애초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규격, 비정형 책들로 장르 구분도 어렵고, 볼륨도 판형도 개성도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가격까지도. 최근에 입고된 책은 가격이 10,001원이다. 만원 아니고 만일 원. 구 매 손님들에게 1원짜리 동전에 무슨 그림이 새겨져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단다. 이런 괴짜 같은 발상으로 가격을 매기는 게 가능한 세상. 어느 책은 손님이 가격을 고를 수 있다. 손님이 계산을 하려 고 그 책을 가져오면 "이 책의 가격은 네 가지인데 백원, 천 원, 만 원, 십만 원 중 원하시는 가격으로 선택해서 계산하시면 돼요." 내 말에 손님은 당황하면서도 가격을 고르기 위해 고민에 빠진다. 나는 손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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