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흰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 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 P98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 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 P115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 P116

곽은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를 밤마다 거리로 내모는 사회가 새삼 무서웠다. 각자의 삶에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오십 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 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 엎드린 이 학생, 그리고 저 학생도, 억압적인 제도 교육에 대하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속 바틀비처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그러니까 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 P123

수업에서 소개하는 고전에 귀를 기울이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뛰어난 성취와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문제집 아래 깔린 학습지에 곽 스스로 적어둔 것이 있었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행동이 설사 그 자신의 이익과 상충되는 듯 보이더라도, 그러할 자유를 보장하는 게 포괄적 공리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좋은 수업이란 훌륭한 예술품이 그러하듯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했다.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한 미성년자의 자유는 제한할 수 있다는 구절도 기억났으나, 밀이 같은 논리로 당시 식민지인에 대한 지배도 정당화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했다. 3월이 끝나갈 무렵 곽은 주체, 타자, 대상화, 전유, 포섭, 폭력 같은 단어들이 섞인 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 P124

왜 마르크스만 문제가 되나. 마르크스를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게 공자를 읽고 유교 원리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위험한가. 따지자면 추천 도서 중에서 카뮈의 『이방인』이 제일 위험하지 않나. 학생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낮의 태양에 눈이 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쏠지도 모르니까.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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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과 새로움. 익숙함은 인간 존재의 규칙이자 리듬 그 자체다. 위그는 손쓸 도리 없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 익숙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는 언제나 소중한 여인의 곁에서 십 년을 보냈기 때문에 그녀를 더는 끊어낼 수 없었고, 그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몰두하고 다른 얼굴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익숙함에 못지않게 본능적이다. 사람은 똑같은 행복을 소유하는 것에 싫증을 낸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오로지 그 반대의 것을 인식함으로써 행복을 누린다. 사랑 역시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며 존재한다.
유사성은 분명 익숙함과 새로움을 우리 안에서 조화시키고 균등하게 하여 어떤 불확실한 지점에서 두 가지를 결합한다. 그것은 익숙함과 새로움의 지평선인 것이다. - P63

매일같이 만성절의 분위기를 띠는 브뤼주의 회색 빛 길거리가 지닌 우울함이란! 수녀들의 머리쓰개의 흰색과 신부가 입는 수단의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듯한 이 회색이 이 도시에서 끊임없이 전염되고 있었다. 회색의 신비, 영원한 약식 상복의 색깔! - P65

위그가 제인을 만난 몇 달 동안 그 어떤 것도 그가 다시 겪고 있는 거짓말 같은 상황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변했던가!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거대한 공허 속에서의 외로움을 더는 느끼지 않았다. 예전의 그가 했던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제인이 그것을 위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는 제인에게서 그 사랑을 다시 발견했고, 물에 그 모 습이 그대로 비친 달을 보는 것처럼 제인에게서 그 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모습 전체를 일그러뜨리는 고약한 바람이 불어도 이 사랑의 그림자에는 어떤 물결도, 어떤 떨림도 생기지 않았다. - P70

위그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슬픈 무도회에 온 것 같았다. 유사한 신체적 매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매력은 여전했지만, 왜곡된 방식으로 작용했다. 닮은 모습을 빼고는 제인은 그에게 저속해 보일 뿐이었다. 닮았다는 이유로 잠시 제인은 그에게 죽은 아내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타락해버린 아내를 다시 만나는 듯한 끔찍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감정은 예배행렬이 벌어지는 동안, 저녁에 성모 마리아나 성녀들의 복장을 한 행렬을 만났을 때나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행렬은 어둠 속에서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닌 가로등 아래에서 외투와 성스러운 제복을 입고 있지만, 한층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약간은 취한 채 신비스러운 가장행렬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 P79

성인이나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이름을 딴 길들이 구부러지고, 비스듬히 돌아가고, 얽히고, 또 길게 뻗으며 중세풍의 작은 마을을, 다른 도시 안에 작게 분리되어 있고 한층 더 생기가 없는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텅 비어 있어 적막한 그 도시에서는 고요함이 전염성을 지녀 환자가 있는 곳에서처럼 조용히 걷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P87

두 사람 사이의 유사성은 결국 몸매와 전체적인 모습에 서 나타날 뿐이다. 세세한 부분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위그는 자신의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주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이를 제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녀 자체가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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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서의 친구들

낡은 육교를 지날 때 둘은 손가락을 걸쳤다가
층계의 마지막 칸에 와서야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다시 지상이었다 눈이 오네,
눈을 보며 우린
모두 친구였는데 지금은
페이스북 친구다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사진을 찍어 남긴다 눈 오는 날 먹기 좋은 메뉴를 파는 식당의 위치가 핀 고정 되어 있고 너는 고향에 그대로고
나로서는 다행이다 우리는
입시를 치르며 싸락눈처럼 뿔뿔이 흩어졌지 서로를 첫사랑이라 착각하거나
초콜릿을 나눠 먹거나 했지만
무엇 하나 남기질 못했지
사진 한 장
태그 한 개
없지
눈이 왔었는데, 그날의 눈발이 같은 기억인지 다른 기억인지
육교인지 지하상가인지 알 도리가
그중 내가 착각했던 친구는 페북도 하질 않아
도통 소식을 알 수가 없고 조금은 섭섭해서 양손을 모아 깍지를 낀다
사진을 찍거나 핸드폰을 만질 손이 없어지고 그을리는 기억
낡은 육교 아래를 전철은 흘러간다
마지막 역에 와서야 깍지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지상이었다 날이 좋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해
다행스러웠다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눈을 보며 우린
모두 친구였지만 - P40

전화를 끊지 않은 우리 어머니, 엄마 아직도
생각이 난다 보드라운 슬픔이
학습지처럼 배달된다 해답을 보는
순간

엄마는 층계참에 주저앉아
소리 죽여 울고 있었지
아파트의 모든 벽에 소리가 부딪쳐 타올라
재가 되었다 나는 기침을 하였다 익은 면에 재를 뿌리며
오늘은 내가 요리사인데 어머니는
울고 우리 아이는 이제 곧
늦은 조기 교육을 시작하기로
아직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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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는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주호는 잘 떠 있고 싶었다. 더 둥둥 떠 있고 싶었다. 주호는 수영장에 나와 종일 호흡법을 연습했다. 물속에서는 물 밖에서와 반대로 숨을 쉬어야 한다. 물속에서 코로 숨을 뱉고, 물 밖에서 입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 숨이 간절해진다. 숨쉬기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아주 부자연스럽고 절실한 일이 된다는 점. 그 점이 주호는 마음에 들었다. - P87

그렇게 두 사람은 수영이 끝나고 나면 분식집 앞에서 대화를 했다. 대화의 내용은 비슷했다. 늘 주호는 희주의 장바구니를 궁금해했고, 희주는 재료 하나하나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떠올리더라도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그 자리에서 흩어지고 휘발되어버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오가다보면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그런 순간에는 너무 깊은 이야기를 불쑥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우울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우중충한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까봐 조심했다. - P90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주호는 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밀려오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 충동은 죽음에 대한 충동과 짝을 이루는 것 아닌가. 삶이, 살아 있음이 자연스럽다면 살고 싶다는 충동 자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호는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충동이나 갈망 없이도, 살고 싶다는 충동에 절실하게 시달렸다. 살고 싶다. 더욱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때로 장바구니를 든 희주 앞에서 흩뿌렸다. - P90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오십 년 뒤, 빠르면 삼십 년 뒤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 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희주는 생각했다. - P91

희주는 이따금 전 남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뱉고 갔던 말을 떠올렸다. 여러 번 떠올릴수록 화가 나지 않았다. 싸늘하다고 기억했던 그의 마지막 얼굴이 쓸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과 물고기 들이 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 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빠르면 삼 십 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 P93

인간은 물속에서 살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수영을 배우면서 주호는 그 점이 새삼 신기했다. 인간은 물고기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인간의 귀는 아가미가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화는 실패한 게 아닐까, 주호는 생각했다. 인간은 물속에서도 공중에서도, 그러니까 너무 깊은 곳에서도 너무 높은 곳에서도 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니 너무 깊은 곳으로도, 너무 높은 곳으로도 가서는 안 된다. 주호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주호는 억울했고, 슬펐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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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감을 느끼는 게 두렵나요? 죽는 게 무서워요?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이응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우유수염은 이응의 현자처럼 말했다. 아니, 말한다기보다 나를 향해 짖는 것 같았다. 나의 방어적인 태도를 비난하듯이, 반짝이는 두 눈에 원망을 가득 담고서. 나는 왜 갑자기 이응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율신경이 반응하듯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말하자 우유수염이 까만 눈동자를 크게 떴다. 내 안의 비밀을 탐지하는 듯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콧방울을 조금 벌름거렸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따라 하지 않는 게 이응의 철학이에요." - P33

왜 목소리에는 주름이 있을까. 내 얼굴에 닿던 할머니의 손과 그 감촉. 하도 떠올리다보니 맛도 느껴졌다. 칼칼한 고춧가루 향, 물엿처럼 달고 끈적거리는 온기, 고사리나물처럼 쓴맛이 맴도는 할머니의 당부. 보리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 - P41

"좋을 거야. 저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을 거야." 할머니는 무서워할 거 없다고 했다. 마른 대추처럼 주름진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난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러니까 너도 할머니가 언제 어떻게 가든 겁낼 거 없어."
할머니는 죽는 것도 이응 같은 거라고 했다. 이응처럼 코스를 선택할 순 없지만, 이응의 컬러볼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바뀌는 것뿐이라고. 이응을 하는 것처럼 억눌려 있던 게 풀리면서 기분좋게 흩어지는 거라고 했다. 아마 자신은 묵은똥을 싼 것처럼 가뿐할 것 같은데, 몸뚱이를 갖고 사는 게 늘 조금은 힘겨웠으니 거기에서 풀려나면 얼마나 시원하겠느냐고 했다. - P41

할머니는 뭉쳐 있고 고여 있던 게 흘러 더 넓은 데로 갈 거라고 했다.
"꽉 쥐고 있던 걸 펼치는 거야."
할머니는 검버섯이 피고 핏줄이 불거져 나온 손을 천천히 오므렸다가 펼쳤다. 풀리고 풀리고, 그렇게 다 풀리고 나면 어쩌다 팬티에 못 볼 꼴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남은 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이지, 자기는 홀가분할 거라고 했다.
"좋을 거야. 너랑 보리랑 사는 것도 좋았으니 가는 것도 좋을 거야. 재밌고 아찔해서 웃음이 실실 날걸?" - P42

왜 이제야 알았을까. 누군가에게 안길 때마다 할머니의 늙은 손이 떠오를 거란 걸. 내 안에 새겨진 그 손이 나타나 내 얼굴을 문지를 거란 걸. 할머니는 어린 나를 욕실 의자에 앉히고서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손을 넣었다.
툭툭 물기를 턴 다음 뺨을 쉭, 귓바퀴를 쓱, 콧방울을 움켜잡고 흥. 할머니의 손을 따라 뺨이 뭉개지고 나면 할머니는 턱받이처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굴이 맑게 다시 생겨나는 기분. 그리고 나의 애처로운 강아지 보리차차는 아무리 내가 잘 말려줘도 털에 스민 물기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냈다. 머리, 몸통, 꼬리를 세 방향으로 비틀어 몸을 말렸다. 그러고선 날듯이 네발로 점프해 자기의 방석으로 몸을 던졌다. - P45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작업장 벽면에는 안전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안전교육이 진행됐지만 형식적이었다. 이런 유의 사고가 나면 뉴스에서는 떠들었다. 안전 불감증 ‘여전‘,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뭘 모르는 소리였다. 안전보다 중요한 건 많았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빨리 잠을 자고 싶었고, 빨리 쉬고 싶었다. 빨리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빨리 밥을 먹고 싶었다. 빨리 집에 가야 했다. 그러려면 일을 해야 했다. 일!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려면 일이 있어야 했다. 안전을 지키면 그만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이 사라지거나 내가 일로 부터 사라져야 했다. 안전보다 중요한 건 많았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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