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감을 느끼는 게 두렵나요? 죽는 게 무서워요?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이응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우유수염은 이응의 현자처럼 말했다. 아니, 말한다기보다 나를 향해 짖는 것 같았다. 나의 방어적인 태도를 비난하듯이, 반짝이는 두 눈에 원망을 가득 담고서. 나는 왜 갑자기 이응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율신경이 반응하듯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말하자 우유수염이 까만 눈동자를 크게 떴다. 내 안의 비밀을 탐지하는 듯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콧방울을 조금 벌름거렸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따라 하지 않는 게 이응의 철학이에요." - P33
왜 목소리에는 주름이 있을까. 내 얼굴에 닿던 할머니의 손과 그 감촉. 하도 떠올리다보니 맛도 느껴졌다. 칼칼한 고춧가루 향, 물엿처럼 달고 끈적거리는 온기, 고사리나물처럼 쓴맛이 맴도는 할머니의 당부. 보리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 - P41
"좋을 거야. 저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을 거야." 할머니는 무서워할 거 없다고 했다. 마른 대추처럼 주름진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난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러니까 너도 할머니가 언제 어떻게 가든 겁낼 거 없어." 할머니는 죽는 것도 이응 같은 거라고 했다. 이응처럼 코스를 선택할 순 없지만, 이응의 컬러볼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바뀌는 것뿐이라고. 이응을 하는 것처럼 억눌려 있던 게 풀리면서 기분좋게 흩어지는 거라고 했다. 아마 자신은 묵은똥을 싼 것처럼 가뿐할 것 같은데, 몸뚱이를 갖고 사는 게 늘 조금은 힘겨웠으니 거기에서 풀려나면 얼마나 시원하겠느냐고 했다. - P41
할머니는 뭉쳐 있고 고여 있던 게 흘러 더 넓은 데로 갈 거라고 했다. "꽉 쥐고 있던 걸 펼치는 거야." 할머니는 검버섯이 피고 핏줄이 불거져 나온 손을 천천히 오므렸다가 펼쳤다. 풀리고 풀리고, 그렇게 다 풀리고 나면 어쩌다 팬티에 못 볼 꼴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남은 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이지, 자기는 홀가분할 거라고 했다. "좋을 거야. 너랑 보리랑 사는 것도 좋았으니 가는 것도 좋을 거야. 재밌고 아찔해서 웃음이 실실 날걸?" - P42
왜 이제야 알았을까. 누군가에게 안길 때마다 할머니의 늙은 손이 떠오를 거란 걸. 내 안에 새겨진 그 손이 나타나 내 얼굴을 문지를 거란 걸. 할머니는 어린 나를 욕실 의자에 앉히고서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손을 넣었다. 툭툭 물기를 턴 다음 뺨을 쉭, 귓바퀴를 쓱, 콧방울을 움켜잡고 흥. 할머니의 손을 따라 뺨이 뭉개지고 나면 할머니는 턱받이처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굴이 맑게 다시 생겨나는 기분. 그리고 나의 애처로운 강아지 보리차차는 아무리 내가 잘 말려줘도 털에 스민 물기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냈다. 머리, 몸통, 꼬리를 세 방향으로 비틀어 몸을 말렸다. 그러고선 날듯이 네발로 점프해 자기의 방석으로 몸을 던졌다. - P45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작업장 벽면에는 안전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안전교육이 진행됐지만 형식적이었다. 이런 유의 사고가 나면 뉴스에서는 떠들었다. 안전 불감증 ‘여전‘,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뭘 모르는 소리였다. 안전보다 중요한 건 많았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빨리 잠을 자고 싶었고, 빨리 쉬고 싶었다. 빨리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빨리 밥을 먹고 싶었다. 빨리 집에 가야 했다. 그러려면 일을 해야 했다. 일!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려면 일이 있어야 했다. 안전을 지키면 그만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이 사라지거나 내가 일로 부터 사라져야 했다. 안전보다 중요한 건 많았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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