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는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주호는 잘 떠 있고 싶었다. 더 둥둥 떠 있고 싶었다. 주호는 수영장에 나와 종일 호흡법을 연습했다. 물속에서는 물 밖에서와 반대로 숨을 쉬어야 한다. 물속에서 코로 숨을 뱉고, 물 밖에서 입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 숨이 간절해진다. 숨쉬기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아주 부자연스럽고 절실한 일이 된다는 점. 그 점이 주호는 마음에 들었다. - P87
그렇게 두 사람은 수영이 끝나고 나면 분식집 앞에서 대화를 했다. 대화의 내용은 비슷했다. 늘 주호는 희주의 장바구니를 궁금해했고, 희주는 재료 하나하나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떠올리더라도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그 자리에서 흩어지고 휘발되어버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오가다보면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그런 순간에는 너무 깊은 이야기를 불쑥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우울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우중충한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까봐 조심했다. - P90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주호는 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밀려오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 충동은 죽음에 대한 충동과 짝을 이루는 것 아닌가. 삶이, 살아 있음이 자연스럽다면 살고 싶다는 충동 자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호는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충동이나 갈망 없이도, 살고 싶다는 충동에 절실하게 시달렸다. 살고 싶다. 더욱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때로 장바구니를 든 희주 앞에서 흩뿌렸다. - P90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오십 년 뒤, 빠르면 삼십 년 뒤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 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희주는 생각했다. - P91
희주는 이따금 전 남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뱉고 갔던 말을 떠올렸다. 여러 번 떠올릴수록 화가 나지 않았다. 싸늘하다고 기억했던 그의 마지막 얼굴이 쓸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과 물고기 들이 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 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빠르면 삼 십 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 P93
인간은 물속에서 살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수영을 배우면서 주호는 그 점이 새삼 신기했다. 인간은 물고기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인간의 귀는 아가미가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화는 실패한 게 아닐까, 주호는 생각했다. 인간은 물속에서도 공중에서도, 그러니까 너무 깊은 곳에서도 너무 높은 곳에서도 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니 너무 깊은 곳으로도, 너무 높은 곳으로도 가서는 안 된다. 주호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주호는 억울했고, 슬펐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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