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로서 내 작업의 대부분은 판타지적 성격이 강하지만, 그 기초는 현실 세계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이다. 실제로 내가 관찰 드로잉보다 더 즐기는 것은 거의 없다. 좀 더 친숙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일부인 사람과 사물, 동물, 장소를 여러 매체를 사용해서 스케치한다. 주로 그리는 주제는 풍경인데, 풍경은 추상적인 형태로도 개념도로도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특히 자연적인 형태와 인공적인 형태 사이의 긴장에 관심이 많으며, 이것은 내 모든 그림과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내가 그린 사람과 동물 그림은 또 다른 관심사인 개인과 그들 각각의 환경과의 관계, 장소에 대한 그들의 ‘소속감‘과 관련이 있다. - P106

모든 사물은 잠재적으로 흥미롭다. 스케치를 하노라면, 쉬면서 바라보는 순간을 가짐으로써 순간의 관심사를 조금 더 깊은 수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순간을 충분히 갖지 않는다. 또한 작은 노트는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주기도 하는데, 만약 아이디어를 급히 적어 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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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말보다는 이미지로 시작하며, 별 목적 없이 펜이나 연필로 그린 소박한 스케치이다. 드로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미를 계속 뒤로 미룰 수 있으며, 스케치북에서 개인적으로 작업할 때는 뭔가 특별한 것을 말‘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거나 심오한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를 수 있다.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이상하게 표현된 질문으로 말이다. 한 장면이나 캐릭터가 페이지에서 뒤돌아보며 "이걸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것 같다. 나는 드로잉이 명료하면서 모호할 때 성공적이라고 느끼는데, 이 균형이 모든 창작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이 드로잉들의 어느 것에도 정해진 의미는 없지만, 분명히 어떤 의미를 찾아보라고 초대한다(어떤 다른 관객 못지않게 나 자신에게도). - P10

빠른 스케치는 수명이 짧은 나비들을 페이지에 핀으로 고정하는 것처럼 원래의 에너지를 기록하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나중에 참조할 수 있는 신선한 인상들의 서고이다. 나는 보통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스튜디오 벽에 초기 스케치들을 붙여 두는데, 이는 애초에 내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끊임없이 상기하기 위해서다. - P54

스케치에는 씨눈 상태의 모호함이라는 놀라운 성격도 있다.
[…]
역설적이게도 그림을 잘 그리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은 바로 단순하고 겸손한 호기심인 것 같다. 그냥 어떤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은 것.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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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없었다면 그 느닷없는 부르짖음은 눈뜨고 꾸는 꿈의 잠꼬대 정도로 잊혀졌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격렬한 그 구호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저 혼자 흘러나온 혼잣말 따위 나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엄연한 증거가 있는 것이었다. 속눈썹에 이슬처럼 달려있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 젖어있는 휴지 조각, 맵싸한 기운이 아직 남은 먹먹한 가슴. 이런 증거들이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어서 밝혀내라고, 어서 명명백백하게 스스로를 설명해보라고. - P9

아버지도 진진이란 이름 앞에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간 지나치게 해석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도 나라는 인간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이었다······. - P12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P15

이십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 P16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 P17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꼭 그래야만 해!"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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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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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용광로였고, 태양은 사형집행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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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는 마그다가 살아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궁금했다. 어떤 때 마그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부시게, 너무도 빨리 찾아왔기 때문에 로사는 갈비뼈 안쪽을 구리 망치로 맞은 것처럼 가슴이 쟁강거리고 지잉 울리곤 했다. - P99

방 전체가 마그다로 가득했다. 마그다는 한 마리 나비 같았고, 이 구석 저 구석에 동시에 있었다. 로사는 마그다가 몇 살이 되려는지 보려고 기다렸다. 열여섯 소녀, 얼마나 좋은가. 활짝 꽃을 피운 소녀들은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부풀도록 민첩하게 움직인다. 열여섯 소녀들은 언제나 나비다. 거기 마그다가 있었다, 꽃으로 만발해서. - P102

마그다의 머리색은 여전히 미나리아재비처럼 노랬고, 아주 매끄럽고 고와서 코넷 모양의 머리핀 두 개가 자꾸만 턱의 양쪽으로 미끄러지곤 했다 그 턱은 마그다의 얼굴에서 경이로운 부분이었다. 만약 턱의 모양이 달랐다면, 그 얼굴은 훨씬 덜 또렷해 보였을 것이다. 아래 턱이 언제나처럼 살짝 길었고 깊은 타원형이어서 그 입, 특히 아랫입술은 답답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널찍한 공간 가운데에 확실한 자기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 입은 궤도에 갇힌 천체만큼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가득 품은 마그다의 눈, 눈머리가 거의 사각형인 그 눈은 순종적인 위성 같았다. 마그다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했다. - P102

그녀는 이글거리며 날아오르는 기류 속에서, 그녀의 두뇌 안쪽에 일종의 설형문자를 흘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빛의 부리로 글을 쓰고 있었다. 회상의 고단함이 피로를 몰고 왔고, 그녀는 멍하고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 P109

숄을 두른 전화기, 작고 음울한 침묵의 신, 오랫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던 그것이 이제 마그다처럼, 제 뜻대로 활기를 띠고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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