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침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항상 목숨을 건 위태로운 줄타기 신세에 처하게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망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이므로. - P309

‘여기서 탈출하지 못할 거야. 방법이 없어. 토머스 하디가 쓴 「비운의 주드」라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 있잖아? "누군가가 와서 그 소년의 두려움을 달래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아무도 남의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 옳은 말씀이야. 너를 구해 줄 배는 오지 않을 거야. 너 하나 살리겠다고 구명정을 타고 올 사람은 없단 말이야.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하느라 할리우드 영화 촬영장에 가 있거든. 서부극에 나오는 정의의 수호자는 아침 식사 시리얼 광고 찍느라 바쁘고, 슈퍼맨은 영화 찍느라 바쁘단 말이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폴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겠지. 이제는 너도 정답을 알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 P340

기분이 안 좋다. 30분 동안 잠을 자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다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마약 같은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다. 내가 써 놓은 글을 오늘 오후에 읽어 보았다······. 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상상력이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모조리 채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난 척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마법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같은 현실 속 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더 있다간 미쳐 버릴 것이다.

—존 파울즈, 「콜렉터」— - P383

‘폴, 작가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특히나 아픈 기억들을. 작가 한 명을 홀딱 벗겨 놓고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그 작가는 작은 상처들 각각에 얽힌 사연을 들려줄 거다. 커다란 상처들을 통해 장편 소설을 얻는 거야, 망각은 소설 쓰는 데 아무 쓸모도 없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은 재능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만, 단 한 가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모든 상처에 얽힌 사연을 철저하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야.‘
‘예술은 연속된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 P395

그때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날이 폴 셸던을 위한 추억의 명곡 신청일로 지정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브루드」에서 미쳤지만 말솜씨 하나는 기가 막힌 과학자를 연기한 영화배우 올리버 리드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리드는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 원형질 연구소(폴은 상큼하게 웃기는 이름이라고 느꼈다)와 인연을 맺은 환자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힘들어도 참아 내야 해! 힘들어도 꿋꿋이 참아 내는 거야!"
가끔은······ 그것도 괜찮은 충고일 것이다.
‘나는 한 번은 꿋꿋이 참아 냈어.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해.‘
한 번 참고 보니 그 충고는 정말이지 개소리였다. - P397

‘미저리 Misery‘ 는 보통 명사로서 고통을, 일반적으로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런 단어가 적당한 소설에 인용되면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성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확실히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 대단원을 맞을 참이었다. 미저리는 폴의 인생에서 마지막 4개월(어쩌면 5개월)을 관통하여 흘러왔다. 그렇다, 수많은 미저리가 있었고, 미저리의 날이 밝았다가 미저리의 날이 저물어 갔다. 확실히 너무나도 단순한 인생이었고, 확실히······.
‘오, 아니야, 폴. 미저리에 관해서라면 단순한 것은 하나도 없어. 네가 미저리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만 빼면. 아마도 넌······ 넌 결국 세헤라자데가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야. 안 그래?‘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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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정말 좋은 사람은 잘 까먹는 사람이다. 다 잊어버려야 한다. - P221

나는 그때 이후 돈을 벌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동시에 손에서 책을 놓은 날이 없었다. 살며 부딪히는 모든 일이 내게 스승이었다. 성공하고 실패하며 복기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이었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사회생활을 위해 졸업장을 따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나는 독학형 인간이다. 누가 자신의 지식을 강요하면 일단 재수가 없다. 배우는 건 나의 선택이고 검증도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 P225

「죽은 시인의 사회」를 생각한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모두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는 엔딩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키팅 선생의 수업 시간이 더 좋았다. 특히 에반스 프리차드의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 의 서문을 찢는 장면이다. 어떻게 시에 공식이 있으며 누가 시를 재단하는가? 나도 그런 이유로 시집을 위시한 책의 서문이나 해설을 읽지 않고 바로 본문에 진입한다.
인생도 그렇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현인들이 아무리 주장해도 깨닫는 건 개인의 몫일 뿐이다. 저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조언은 될 수 있어도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오늘을 돌아보는 것.
그래.
밤이 스승이다. - P226

나는 『파리 대왕』의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다르다는 것. 장애든 가난이든 다르다는 것은 무리에서 밀려나는 일이다. 성숙한 사회는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같이 간다. - P227

둘째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 음악성이 있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한 번 들은 곡을 연주했던 아버지처럼 그도 음을 감각으로 찾아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로드리고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운지법이 그에게 맞지 않아 힘들어할 때였다.
"오빠, 세상에 표준은 없어. 내게 맞는 게 표준이야." - P228

이 영화를 이경원 기자에게 바친다는 엔딩 자막이 떴다. 디아스포라가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주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진입해야 한다. 권리를 인정받는 가운데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소수자인 디아스포라 가정에서 부모에게 냉대받는 소수자 게이, 데이비드 김의 이야기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등이 어떻게 포용으로 나아가는지 말이다. - P245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데이비드 김만 탈락했다. 한국인도 몰랐던 그가 40%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이 경이롭다. 영화는 소수자로 불리는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공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정치와 종교, 출신지, 성 정체성, 세대 차에 대한 이들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영화 엔딩 음악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본 후 봉은사 절 계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고층빌딩과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쓸쓸했다.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어찌 이민자뿐이겠는가? 우리 안의 모든 소수자를 응원하고 싶다. - P246

생과 사가 화려했던 이들에겐 흥미가 없었다. 천수를 다해 안장된 이들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니어도 환호해 줄 이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내가 가는 곳은 꿈 많았을 젊은이들의 묘지였다. 묘비를 읽으면서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곳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가질 수도 있었던, 가질 뻔도 했던 그 모든 것을 생각했다. - P248

사실 나는 박흥식 감독과 작은 인연이 있다. 4년 전인가? 나는 이야기 생산자를 ‘storyteller, storywriter, storyshower‘라고 한 이가 발터 벤야민이라고 기억하고 있 었다. 그의 논문 「이야기꾼」을 출처로 생각했는데 착각이 었다. 문장의 주인공은 박흥식 감독이었다. 그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평론에서 벤야민을 언급하며 ‘말로 이야기를 하는 호머는 storyteller, 글로 이야기를 하는 페터 한트케는 storywriter,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빔 벤더스는 storyshower‘라고 분류했다. - P256

옛날 중국에 ‘만다린‘이란 부자가 살았다. 그는 딸을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군에게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딸은 하인과 사랑에 빠져 도망갔다. 두 사람은 추격당하면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섬에 숨어든다. 섬에 안착해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으련만 하인의 문필력이 세상에 알려지고 만다. 비천한 하인 출신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병사들을 보내 그를 죽였다. 딸은 자기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타 죽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그냥 동화다. 그들의 사랑에 감탄한 신이 그들을 비둘기로 환생시켰다고 전해진다.
사랑은 죽어야 증명되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부자인 아버지는 신분 상승 욕구를 참을 수 없었고 딸은 사랑을 참을 수 없었고 하인은 글을 참을 수 없었다. - P259

한나 아렌트의 글을 보자.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 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 P262

거리에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문득 두려워진다. 사는 게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전시에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고독의 죽음. 그 대척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 P263

어떤 것도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편지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 힘을 준 자국만 남을 것이다. 사라짐은 아름다운 일이다.
예전에 강원도 국도 여행 중 FM 93.1에서 이 노래가 나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들었다.

기억하라, 함께 지냈던 행복한 나날을
그때 태양은 더 뜨거웠고
인생은 행복하기 그지없었지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다
- 자크 프레베르Jaques Prevert 「고엽Les Feuilles Mortes」 중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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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면서기는 강도귀달에게 여자이지만 귀신 두목처럼 남자를 호령하며 살리라는 주술을 걸었고, 밀양의 면서기는 조조간이 지아비가 없어도 앞날을 내다보며 후손을 잘 키워내리란 주술을 걸었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남자들의 세상에서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 P155

내가 주도하는 기도는 감동적인 문장으로 기염을 토했다. 나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는 어르신들도 있어서 이리 살아도 되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밤새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했다. 내가 맡은 중학생들도 나의 기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노라 울면서 간증했다. ‘야! 이 핏덩어리야, 네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하려다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 P167

동네 골목은 파자마 차림의 술 취한 남자들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윷놀이를 하는 곳이었다. 여자들은 공장으로 남의 집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뛰어놀았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같은 여자들끼리 말꼬리를 잡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매일 어디선가 쌈박질을 하는 이 동네가 나는 싫었다. 무기력했고 난폭했으며 동시에 뻔뻔했다. 내게 돈을 요구하는 엄마의 두꺼운 낯도 싫었다. - P174

지울 수 있는 과거는 없다. 다만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상처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굳은 살로 돋아나 생살보다 튼튼해진다. 같이 안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 P174

어린 시절 시장통 술집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싸구려 술집에서 젓가락으로 드럼통을 두들기며 동료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숟가락 두 개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때 아버지는 파산해서 식구를 데리고 떠돌아다니다 남의 공장에서 막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이혼녀가 두들기는 숟가락 장단에 눈물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구멍은 천길 낭떠러지, 숟가락으로 밥은 넘어가야 했다. - P178

살면서 희미하게 내 삶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모방했고 그들이 웃으면 같이 웃었다. 비슷한 학벌을 가지려 애썼고 비슷한 물질을 가지려 노력했 다. ‘유연하게 대처한다‘라고 나의 위선을 합리화했다.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수많은 가짜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속삭였다.

진짜를 두리번거린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물거품이 되기 전에. - P194

어느 날 엄마는 또 아들들에게 길몽을 얘기하며 흉몽의 상징으로 나를 거론했다. 나는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시험 범위인 세계 4대 문명을 얘기했다.
‘하천이 범람하며 비옥한 흙이 퇴적해 옥토가 되어 인간이 먹고사는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세계 4대 문명은 다 흙탕물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나는 흉몽이 아니라 길몽이다.‘
내가 조리 있게 말하자 미꾸라지 잡는 데 미쳐 있던 아들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미꾸라지는 흙탕물에서 잡혀!" - P198

입이 무거운 친구가 내 자취방에 찾아왔던 그날의 충격을 얘기했다.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한 손에 야스퍼스 책을 들고 밥솥을 안고 있더라고 했다. 생각나면 밥 한 수저 입에 처넣고 우물거리다 깍두기를 우걱우걱 씹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 앞에 서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입 주변에 김치 국물을 묻히고 싱긋 웃더란다.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복합적 미개 종족이었다고 혀를 찼다. - P202

‘고독한 영혼‘ 인수인계식을 마치고 인계받은 영혼의 제사를 명랑하게 지냈다. 시댁에서 명절이면 작은 소반에 구석에서 상을 받던 ‘고독한 영혼‘은 우리 집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는 음식상을 받았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감시 감독차 불시에 난입한 시어머니는 놀라서 입을 못 다물었다. 피자에 떡에 배달의 민족답게 연이어 들어오는 배달 음식에 놀라고 나의 독특한 제사 양식에 기함을 했다. 트집을 잡으려던 시모는 나의 선빵에 침묵했다.
"그동안 개다리소반에 얼마나 시장하셨습니까!" - P213

사실 집에서 지내는 제사의 번거로움은 내게 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배달해서 대한민국 식품계의 활황을 도모하는 거시적인 행사였다. 말 그대로 함포고복으로, 아들들은 제사가 흥겨운 것인 줄 알고 있다. 절에 모신다고 했을 때 B군이 말했다.
"이제 내 돈으로 피자를 사 먹어야겠군."
그래도 기일이면 절에 다녀와 저녁에 나름 소박한(?) 상을 차렸다.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켜 먹으며 망자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 P213

‘고독한 영혼‘의 기구한 삶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만 한다. 젊은 나이에 자식을 낳다 세상을 떠났으며 환영받지 못한 인생이었다는 것. 나는 내가 인계(?)받은 영혼을 웃게 해주려 최선을 다한다. 살아서 슬펐다고 죽어서까지 슬퍼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후의 삶은 명랑해야 한다. 산 자의 농담에 죽은 자들이 허리를 접으며 웃는 모습을 상상한다. - P214

화단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귀뚜라미는 전부터 울었을 터이지만 내게는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계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듣자니 사이다 먹은 듯 코끝이 시큰해졌다. 계절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몰라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모르고, 모르고, 모르겠고··· 게다가 집 열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 P216

나는 가락이 실린 사설을 듣다가 인내심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했다. 재산이 아니라 시어머니 수다에 질려서 안 오는 것 같았다. 가겠다고 나서니 밥 먹고 가라고 했다. 독거노인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양심과 호구로서 느끼는 불쾌함이 정면충돌했다. 결과적으로 밥 먹고 다시 설거지한 후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아서 집에 왔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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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는 폴을 침대로 데려갔고, 그는 3분 만에 잠들었다. 의식이 회색 구름에서 벗어난 후 처음으로 밤새도록 깊이 잠들었고, 처음으로 꿈을 전혀 꾸지 않았다.
꿈은 깨어 있는 동안 실컷 꿨으니까. - P218

‘깜빡했구나, 그렇지? 깜빡한 거야. 저기 저 빌어먹을 2월 달 달력을 넘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분기별 재산세 납부를 잊어 먹은 것은 달력 넘기는 거 잊어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고, 너는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이런 큰일을 잊어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애니, 사실 너는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그렇지? 매일같이 조금씩 나빠지지. 정신병자들은 세상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 너도 잘 알테지만 때로는 아주 지저분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지. 그러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정신병과 통제 불가능한 정신병 사이엔 경계선이 있단다. 너는 매일매일 그 경계선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너도 마음속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 - P259

"지금 우는 거야, 폴?"
손으로 뺨을 훑어보니, 물기가 있었다. 폴은 웃으면서 돈을 건넸다.
"약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음, 많은 사람들이 너의 진면목을 오해하지만······ 나는 잘 알아."
애니가 눈을 반짝거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부드럽게 폴의 입술을 만졌다. 폴은 애니의 숨결에 들어 있는 어떤 냄새를 맡았다. 내면의 어둡고 음산한 방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 걸레의 맛과 냄새보다 1000배는 더 끔찍했다.
그 냄새는 애니의 음산한 숨결이

[…]!

지옥에서 불어 온 더러운 바람처럼 목구멍 속으로 불어 닥쳤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폴은 웃어 보였다. - P266

하지만 그 무엇도 글쓰기를 망쳐 놓지 못했다. 창작 활동이라는 것이 으레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그도 지금 기분으로는 글쓰기를 망치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온 인생에서 글쓰기는 항상 가장 강인한 일이었고, 가장 끈질긴 일이었다. 그 무엇도 꿈으로 가득한 열정의 우물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술도, 마약도, 고통도. 이제 폴은 황혼녘이 되어서야 물웅덩이를 발견한 목마른 짐승처럼 꿈의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물을 들이켰다. 물을 마시고 종이에서 구멍을 찾아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멍 속을 탐험했다. - P271

매일 오후가 되면 애니는 폴을 커다란 파란 담요로 둘둘 말아 머리에 녹색 사냥 모자를 푹 눌러 씌우고 휠체어를 밀어 뒤쪽 현관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럴 때마다 폴은 몸의 소설을 들고 갔는데, 거의 읽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운 경험이어서 다른 데 별로 신경 쓸 수 없었다. 뒤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폴은 솔직히 말해 병실이나 다름없는 침실의 퀴퀴한 실내 공기 대신 달콤하고 상쾌한 공기를 맘껏 마셨고, 고드름이 녹아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눈이 녹는 벌판을 천천히 흘러가는 광경을 감상했다. 그중에서 구름 벌판 구경이 제일 좋았다. - P280

폴은 작가 에드먼드 윌슨이 어떤 수필에서 그만의 투덜대는 어투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인 워즈워스가 내세운 좋은 시를 판단하는 기준, 곧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일어난 강력한 감정의 폭발이라는 기준이 대부분의 극적 소설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옳은 말이지 싶었다. 폴은 결혼 생활의 위기 같은 일을 겪고 난 다음에 글 쓸 능력을 상실한 작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기분이 엉망일 때는 대개 글을 써 내려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반대 결과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 직업인 탓에 의무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에 몰입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대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원인을 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일어났다. - P283

"쥐 심장 뛰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우리랑 똑같아, 폴.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야. 우리는 스스로 아주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쥐덫에 걸린 쥐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등이 부러진 쥐가 살고 싶어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것 좀 봐." - P288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기 사오 년 전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독일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유태인 대학살에서 할아버지와 고모를 잃은 번스타인에게 폴이 말했다.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유럽 다른 데도 아니고 특별히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왜 해외로 도피하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은 대체로 바보가 아니었고, 대다수가 독일 사회에서 직접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독일에 그대로 머물렀을까? 번스타인의 대답은 폴에게 하찮고 잔인하며 이해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들 대부분이 피아노를 갖고 있었어. 우리 유태인에게 피아노는 꼭 필요한 생활의 일부야. 피아노를 가지고 있으면, 이사를 결심하기가 힘들지."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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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두 할머니가 집에서 맞닥트렸다. 그들은 각자 이름대로 말싸움을 했다. 강도귀달 씨는 귀신 두령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가며 당신 아들이 내 딸을 고생시킨다고 퍼부었다. 그러자 조조간 씨는 조곤조곤 당신 딸의 팔자가 박복해서 내 아들이 더 고생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나는 두 할머니의 언쟁을 감동으로 바라보았다. 위대한 면서기들이 할머니들에게 주술을 건 것이었다. - P139

비록 크다 말았지만 쪼깐이는 총명하고 바지런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생활력 없는 한량 남편을 비웃었다. 조조간 씨는 첫날밤 혼인이 ‘나가리‘란 느낌에 어금니를 물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붙들고 사내놈에게 기대하면 안 된다는 대남성관을 주입시켰다. 우리 집안 여자들의 금과옥조인 ‘그놈이 그놈이다‘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인물 뜯어먹고 살지 못한다는 말씀도 부록으로 첨부되었다. - P141

진주 강씨 강도귀달 씨와 풍양 조씨 조조간 씨의 격돌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다름없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모두 할 말이 가득했다. 두 할머니 는 그때의 투쟁이 어떻게 격돌하고 소멸하였는지 다 내게 쏟았다. 왜냐면 두 할머니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조손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뒤에는 이름에 주술을 걸어준 진주와 밀양의 두 위대한 면서기가 있었다! - P150

‘불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외증조부는 딸 둘에게 아무도 믿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나라가 망한다는 의미는 권력이 바뀐다는 것에 불과했다. 어떤 놈이 권력을 잡든 자기 좋자고 하는 거지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개소리였다. 없는 놈은 있는 놈 걸 뺏으려 들고 있는 놈은 더 가지려 든다고 가르쳤다. 철저한 경제관념과 불신 교육 속에서 성장한 강또귀딸 씨는 냉소적이 되었다. 딸들에게 남긴 부친의 유언은 ‘목숨은 내놓아도 땅문서는 내놓지 말라‘였다. 거지로 빌어먹고 능멸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씀이었다. - P151

강또귀딸 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냉정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다녔다. 성가셔하는데도 꽁무니에 붙은 나를 하루는 물끄러미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꾸준한 데가 있구나. 갑자기 다가와서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을 믿지 말거라. 그런 사람이 등에 칼을 꽂는 사람이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사람이란다." - P154

조쪼깐 할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던 밤 옆에 누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애비를 닮아 의리가 있고 외할미를 닮아 영악하구나.똑똑하면 사는 게 고달프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가 두 할머니에게 배운 것은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절망도 없었다. 단지 힘이 들고 힘이 들지 않고의 차이였다. 두 할머니는 속으로 서로를 인정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두 여자 다 그 힘든 세상을 당차게 살아 낸 사람들이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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