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면서기는 강도귀달에게 여자이지만 귀신 두목처럼 남자를 호령하며 살리라는 주술을 걸었고, 밀양의 면서기는 조조간이 지아비가 없어도 앞날을 내다보며 후손을 잘 키워내리란 주술을 걸었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남자들의 세상에서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 P155

내가 주도하는 기도는 감동적인 문장으로 기염을 토했다. 나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는 어르신들도 있어서 이리 살아도 되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밤새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했다. 내가 맡은 중학생들도 나의 기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노라 울면서 간증했다. ‘야! 이 핏덩어리야, 네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하려다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 P167

동네 골목은 파자마 차림의 술 취한 남자들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윷놀이를 하는 곳이었다. 여자들은 공장으로 남의 집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뛰어놀았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같은 여자들끼리 말꼬리를 잡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매일 어디선가 쌈박질을 하는 이 동네가 나는 싫었다. 무기력했고 난폭했으며 동시에 뻔뻔했다. 내게 돈을 요구하는 엄마의 두꺼운 낯도 싫었다. - P174

지울 수 있는 과거는 없다. 다만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상처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굳은 살로 돋아나 생살보다 튼튼해진다. 같이 안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 P174

어린 시절 시장통 술집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싸구려 술집에서 젓가락으로 드럼통을 두들기며 동료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숟가락 두 개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때 아버지는 파산해서 식구를 데리고 떠돌아다니다 남의 공장에서 막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이혼녀가 두들기는 숟가락 장단에 눈물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구멍은 천길 낭떠러지, 숟가락으로 밥은 넘어가야 했다. - P178

살면서 희미하게 내 삶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모방했고 그들이 웃으면 같이 웃었다. 비슷한 학벌을 가지려 애썼고 비슷한 물질을 가지려 노력했 다. ‘유연하게 대처한다‘라고 나의 위선을 합리화했다.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수많은 가짜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속삭였다.

진짜를 두리번거린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물거품이 되기 전에. - P194

어느 날 엄마는 또 아들들에게 길몽을 얘기하며 흉몽의 상징으로 나를 거론했다. 나는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시험 범위인 세계 4대 문명을 얘기했다.
‘하천이 범람하며 비옥한 흙이 퇴적해 옥토가 되어 인간이 먹고사는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세계 4대 문명은 다 흙탕물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나는 흉몽이 아니라 길몽이다.‘
내가 조리 있게 말하자 미꾸라지 잡는 데 미쳐 있던 아들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미꾸라지는 흙탕물에서 잡혀!" - P198

입이 무거운 친구가 내 자취방에 찾아왔던 그날의 충격을 얘기했다.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한 손에 야스퍼스 책을 들고 밥솥을 안고 있더라고 했다. 생각나면 밥 한 수저 입에 처넣고 우물거리다 깍두기를 우걱우걱 씹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 앞에 서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입 주변에 김치 국물을 묻히고 싱긋 웃더란다.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복합적 미개 종족이었다고 혀를 찼다. - P202

‘고독한 영혼‘ 인수인계식을 마치고 인계받은 영혼의 제사를 명랑하게 지냈다. 시댁에서 명절이면 작은 소반에 구석에서 상을 받던 ‘고독한 영혼‘은 우리 집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는 음식상을 받았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감시 감독차 불시에 난입한 시어머니는 놀라서 입을 못 다물었다. 피자에 떡에 배달의 민족답게 연이어 들어오는 배달 음식에 놀라고 나의 독특한 제사 양식에 기함을 했다. 트집을 잡으려던 시모는 나의 선빵에 침묵했다.
"그동안 개다리소반에 얼마나 시장하셨습니까!" - P213

사실 집에서 지내는 제사의 번거로움은 내게 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배달해서 대한민국 식품계의 활황을 도모하는 거시적인 행사였다. 말 그대로 함포고복으로, 아들들은 제사가 흥겨운 것인 줄 알고 있다. 절에 모신다고 했을 때 B군이 말했다.
"이제 내 돈으로 피자를 사 먹어야겠군."
그래도 기일이면 절에 다녀와 저녁에 나름 소박한(?) 상을 차렸다.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켜 먹으며 망자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 P213

‘고독한 영혼‘의 기구한 삶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만 한다. 젊은 나이에 자식을 낳다 세상을 떠났으며 환영받지 못한 인생이었다는 것. 나는 내가 인계(?)받은 영혼을 웃게 해주려 최선을 다한다. 살아서 슬펐다고 죽어서까지 슬퍼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후의 삶은 명랑해야 한다. 산 자의 농담에 죽은 자들이 허리를 접으며 웃는 모습을 상상한다. - P214

화단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귀뚜라미는 전부터 울었을 터이지만 내게는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계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듣자니 사이다 먹은 듯 코끝이 시큰해졌다. 계절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몰라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모르고, 모르고, 모르겠고··· 게다가 집 열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 P216

나는 가락이 실린 사설을 듣다가 인내심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했다. 재산이 아니라 시어머니 수다에 질려서 안 오는 것 같았다. 가겠다고 나서니 밥 먹고 가라고 했다. 독거노인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양심과 호구로서 느끼는 불쾌함이 정면충돌했다. 결과적으로 밥 먹고 다시 설거지한 후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아서 집에 왔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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