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집을 부수도원장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캐드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쇼네드가 웨일스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창고도 있고 마구간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곳을 쓰십시오. 저는 죄인 곁에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며, 그곳 열쇠도 내어드겠습니다. 죄인을 감시할 사람은 부수도원장님께서 제 하인들 중 적당한 이로 직접 택하시지요. 죄인이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제 식구들이 마련하도록 조치하겠지만, 저 자신은 그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과연 그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지 미심쩍어하는 분들이 계실 테니까요."
현명한 여자군. 캐드펠은 쇼네드의 말을 통역하면서 생각했다. 거듭되는 재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도, 그녀는 사실상 한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교묘하게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더하여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배려할 줄 아는 너그러움은 또 어떠한가. - P156

"그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하지. 무엇보다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성격이 못 되니까. 화가 날 때 주먹질을 하고 덤벼들기는 해도,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유형은 아니야. 두 번째로, 만일 그런 짓을 하려고 계획했다면 한층 교묘하게 처리했을 거네. 자네도 화살이 박힌 각도를 보았겠지? 내가 알기로 엥겔라드의 키는 부친보다 손가락 셋을 합친 길이 정도는 더 크네. 어떻게 자기보다 키가 작은 사람의 늑골 밑으로 화살이 파고들도록 활을 쏠 수 있겠나?
설령 관목숲 속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거나 엎드려 있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화살이 박히기는 어려워. 그래, 그 혐의를 믿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 엥겔라드가 이 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궁수라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든 활을 쏠 수 있을 텐데 그처럼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위치를 택할 이유가 없지. 이 모든 게 상황을 정확히 볼 줄 몰라 벌어진 일일세.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머지않아 막다른 벽에 부딪치고 말겠지.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자네 연인이 남몰래 살인을 저지르기 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라는 점일세. 그런 사람은 설령 자기가 증오하는 자라 해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살해하지 않아. 더욱이 그 젊은이는 자네 부친을 증오하지도 않았지. 나한테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네." - P160

"자, 나는 쇼네드의 말을 전했네." 캐드필은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그녀에게 가면 그녀가 직접 자네 마음을 돌리겠지. 그리고 자네가 와주기를 바라는 또 한 사람이 있네. 그 사람은 내게 말을 전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 젠장." 페레디르는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푹 꺾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 나를 용서하게나. 이 일이 쇼네드만이 아니라 자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걸 잘 아네. 쇼네드가 그런 말을 하더군. 부친께서 자네를 무척 가장 아끼셨다고······."
젊은이는 갑자기 울먹이며 휙 돌아서더니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가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캐드펠은 생각에 잠겨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탐색해나가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부분을 만진 것처럼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 P166

"성스러운 수사님들을 살인자로 지목하다니 그건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베네드는 기겁했다.
"왕이든 수도원장이든 인간은 결국 인간이오.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지." - P169

그러면 리샤르트가 총애하고 아꼈다는 그 젊은이, 어릴 때부터 아들처럼 부담 없이 그 집에 드나든 젊은이는 어떤가? 캐드펠 수사는 생각에 잠긴 채 녹음이 짙게 깔린 어둠 속을 걸어 휴 신부의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엥겔라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려보건대 천품이 살인을 저지를 사람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그는, 아마도 사랑 때문에 엥겔라드에게 탈출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쇼네드의 감사와 호의를,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만이 아닌, 보다 어두운 다른 까닭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숲속에서 말없이 멀어져갈 때 캐드펠은 얼핏 악마에 시달리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설마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리샤르트의 죽음으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리샤르트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딸의 남편으로 맺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고 끈기 있게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페레디르는 캐드펠의 마음에 여전히 기이하고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다. - P172

"부수도원장님, 아아, 모두가 제 탓입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른 탓입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고해를 하고 싶습니다. 전 제 마음을 털어놓고 처벌을 받겠다는 각오로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이 계속되는 슬픔이 바로 저의 타락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캐드펠 수사는 생각했다.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땅바닥을 뒹굴며 풀잎을 물어뜯지는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 아닌가!
"말해보시오." 부수도원장은 자못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형제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사소한 것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지나친 처벌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 없소. 늘 형제 스스로가 가장 가혹한 심판관이었으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가장 가혹한 심판관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판단을 회피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 P175

카이가 미소 띤 얼굴로 뜰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지 음습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카이의 웃음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동료분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카이가 물었다. "그분이 과연 고마워하실지는 모르겠네요. 편안하게 누워 싸움닭처럼 음식을 잘 먹고 있거든요. 게다가 집행관이 온다는 소식도 아직 못 들었고요. 쇼네드 아가씨는 여태 그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수사님도 아시겠지만 휴 신부님 역시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부수도원장님만 조용하시면 하루 이틀 정도 더 이곳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마을 어귀에 말 탄 사람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아이들이 바로 달려와 알려줄 겁니다. 존 수사님은 좋은 사람들 손에 맡겨진 셈이에요."
카이는 엥겔라드와 함께 일하는 사이로 이 마을에 사는 누구보다도 엥겔라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니, 존 수사와 이 감시자는 틀림없이 호의로써 서로를 대하고 있을 터였다. 카이의 임무는 존 수사의 도주를 막는 것이라기보다 그가 외부세계로부터 위협 받는 일이 없도록 지키는 일에 가까운 듯했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카이는 자신이 가진 열쇠마저 얼마든지 내줄 용의가 있었다. - P185

"당신이야말로 정신을 빠짝 차려야겠구먼." 그렇게 말하면서도 캐드펠 수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이곳 왕자가 투철한 준법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아니면 베네딕토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말이오."
"아,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약 범죄자가 도망친다 해도 그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거든요. 벌을 받을 사람도, 상을 받을 사람도 없지요. 수사님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사방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한 적이 없으십니까?" - P186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하겠네. 하지만 당장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나. 우리가 귀더린의 평화를 깨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아직 변함이 없고, 나 또한 우리를 결함 없는 고결한 존재로 여기지 않거든. 죄인을 가려내기 전까지는 누가 결백한지 알 수 없는 법이지."
"저도 부수도원장님께 했던 말을 취소할 생각 없어요." 쇼네드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분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야. 내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사람을 샀을 수도 있잖아요. 성녀까지도 사려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분은 완고한 분이에요. 그게 동기가 될 수 있죠. 그리고 잊지 마세요. 잉글랜드인들과 마찬가지로 웨일스인들도 자신을 팔 수 있어요. 바라건대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을 거예요." - P196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부수도원장이 관대하게 허락한다면 그것으로 자기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여기는 것일까? 살인의 죄나 그로 인한 위협까지도 그것을 처음 명한 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자신은 아무 죄과도 치르지 않은 채 감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물론 캐드펠은 살인자의 손이 닿으면 피살자가 피를 뿜어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그 말을 믿는다는 사실, 그러한 믿음이 죄인을 압박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죄인이 공포에 질려 범행을 자백할 수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 P505

이즈음 캐드펠은 집행관을 믿어도 좋을 것이며,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나 머지않아 알게 될 사실들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결국 집행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모든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구실로 하루나 이틀쯤 왕실 집행관을 교구 전체로 돌아다니게 만들면 그 역시 캐드펠이 온갖 조사를 통해 얻어낸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되리라. 공적인 심판이란 깊이 있는 탐색을 하기보다 표면에 떠오른 사실들을 수확하고 그에 따라 합당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종종 돌출되는 의구심들은 신속한 질서 회복과 평안 유지를 위해 국가가 치러야 하는 대가인 셈이다. - P209

아네스트는 식사를 가져와 그가 밥을 먹는 동안 곁에 있어주었다. 아네스트 역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었다. 물건을 이용해 존 수사에게 간단한 웨일스 단어들을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마을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들을 무슨 수로 알린단 말인가? 그럼에도 때로는 둘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존 수사는 잉글랜드어로, 아네스트는 웨일스어로, 미래에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일종의 절제된 애무처럼, 그들은 서로의 어조만으로 친밀감 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독백을 통해 부족하나마 감정을 교환하고 평화를 느꼈다. - P213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아네스트의 얼굴을 더욱 세밀히, 더욱 열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보드랍고 둥근 뺨은 사과처럼 싱싱했고, 볕에 그을린 피부는 섬세하기 그지없었으며, 눈은 흐르는 햇살을 받은 냇물처럼 맑게 반짝였다. - P214

"수사님, 우리가 이 순례와 이 철야 기도에 나서게 된 건 그야 말로 크나큰 영광입니다." 콜룸바누스 수사가 캐드펠의 잰걸음에 어렵지 않게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수도원 역사에 우리 이름이 기록될 겁니다. 이후의 모든 형제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거예요."
"그래, 나도 들었네." 캐드펠은 건조하게 말을 받았다. "부수도원장께서 위니프리드 성녀의 생애를 기록하고, 그분 유골의 이장 과정으로 그 내용을 완성하려 하신다지. 하지만 수행원들 이름 하나하나까지 거기 써 넣으실지는 모르겠군." 하긴, 자네 이름 정도라면 모르겠군. 캐드펠은 생각했다. 아마 성스러운 샘물로 가서 치료를 받은 최초의 사람쯤으로 기록되리라. 그리고 제롬 수사 이름도 등장할 것이다. 그의 꿈을 통해 순례단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내 이름은 없겠지. 정말 다행이야! - P2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 때 아이들은 어떤 기술을 습득할까? 우선 어른 없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는 "일이 벌어지게 만드는 방법을 파악"한다고, 리노어는 말한다. 놀이를 생각해내려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떠올린 놀이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고 다른 아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아"낸다. 아이는 언제가 자기 차례이고 언제가 다른 친구 차례인지 협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므로 타인의 필요와 욕구, 그것들을 충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아이는 실망감과 좌절감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 이 모든 것을 "배제되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고, 길을 잃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나무를 기어오르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자!‘ 아이는 그럴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요. 그러다 결국 더 높이 기어오르고, 짜릿함을 느끼고, 다음번에는 더 높이 올라갑니다. 아니면 좀 더 높이 올라갔다가 너무 무서워서 울어버릴 수도 있죠··· 그래도 이제 그 아이는 꼭대기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전부 집중력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 P379

리노어의 지적 멘토 중 한 명인 이저벨 벤키 박사는 칠레의 놀이 전문가다. 나와 스코틀랜드에서 만났을 때 그는 지금까지 나온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놀이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아동 발달의] 세 부분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창의력과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두 번째 부분은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어울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유대"이며, 세 번째 부분은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이저벨은 우리가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는 인간이 되는 데 추가적으로 따라붙는 사소한 요인이 아니라 그것의 핵심이 라고 설명했다. 놀이는 견고한 인격의 토대가 되며, 이후에 어른들이 자리에 앉아 설명해주는 모든 것은 이 토대 위에 쌓인다. - P380

"오늘날의 어린 시절은 옛날과는 무척 달라요. 요즘 아이들은 성인기를 대비해줄 삶의 주고받기를 경험하지 못해요." 그 결과 아이들은 "문제를 겪지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 짜릿함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날 어바인 캘리포니아 대학의 인지과학 부교수인 바버라 사르네카 Barbara Sarnecka는 리노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게 너의 환경이야. 내가 이미 지도를 만들어놨어. 탐험은 그만둬.‘ 하지만 그건 유년기의 정의와 정반대되는 것이요." - P381

리처드와 에드는 동기가 외재적일 때(그래야만 해서, 또는 나중에 무언가를 얻으려고 그 행동을 할 때)보다 동기가 내재적일 때(자신에게 의미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할 때) 더 잘 집중하고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기가 내재적일수록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쉬워진다. - P383

동네를 배회하던 어린 리노어는 자신을 신나게 하는 것(독서, 글쓰기, 분장 놀이)을 알아내고 자신이 원할 때 그것을 할 자유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자신이 축구나 암벽 타기, 작은 과학 실험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그것은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오늘날 이 방식은 아이들에게 차단되고 있다. 리노어는 이렇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끊임없이 나의 주의력을 관리한다면 어떻게 주의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집중력을 기르는 데 너무나도 중요한 자신의 내재적 동기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 P384

덴마크 오르후스의 심리학 교수인 얀 퇴네스방 jan Tonnesvang은 내게 본인이 ‘통달‘이라고 칭하는 감각, 즉 자신이 무언가에 능숙하다는 감각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감각은 기본적인 심리 욕구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고 느낄 때는 그 일에 집중하기가 훨씬 수월하고,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낄 때는 집중력이 소금에 전 달팽이처럼 쪼그라든다. L.B.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현재 우리의 학교 제도가 너무 편협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의 학교 경험은 무능하다는 느낌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L.B.가 스스로 무언가를 통달할 수 있다고 (그것을 잘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자 L.B.의 집중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 P391

우리의 학교들은 전만큼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지 않는다. 전만큼 놀게 하지도 않는다. 미친 듯이 시험을 쳐서 불안을 가중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내재적 동기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학생에게 통달감, 즉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는 감각을 기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는 내내 많은 교사가 학교를 이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경고했지만, 정치인들은 학교 재정 지원을 이러한 흐름에 결부시켰다. - P396

해나는 나와 함께 학교 부지를 걸으며 규칙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규칙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매일 있는 회의를 통해 학교의 모든 규칙을 만들고 투표에 부친다. 모두가 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낼 수 있고, 모두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네 살부터 성인 직원에 이르는 모두가 똑같은 발언권과 똑같은 한 표를 갖는다. 학교는 지난 수년간 꼼꼼한 규칙을 만들어왔다. 그 규칙을 위반하다가 걸리면 모든 나이대의 학생을 대표하는 배심원단에게 재판을 받고, 배심원단이 처벌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를 꺾으면 배심원단은 몇 주간 나무를 탈수 없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 학교가 얼마나 민주적이냐면, 어린아이들도 매년 각 직원의 재계약을 결정하는 투표에 참여 한다. - P399

피터는 대부분의 인류 역사상 아이들이 서드베리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학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렵채집 사회(진화의 측면에서는 그저께라 할 수 있는 시기까지 인류가 살았던 방식)의 아이들에 관해 지금까지 쌓인 증거를 연구했다." 수렵채집 사회의 아이들은 놀고, 배회하고, 어른을 모방하고, 질문을 엄청 많이 하며, 정식 교육을 별로 받지 않고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유능해진다. 피터는 역사에서 예외는 서드베리가 아니라 현대의 학교라고 설명했다. 현대적 학교는 매우 최근인 1870년대에 고안된 것으로, 자리에 가만히 입 닥치고 앉아 시키는 일을 하도록 아이들을 훈련해 공장 노동을 준비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피터는 아이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탐험하도록 진화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자연히 배우기를 원하고, 흥미로워 보이는 활동을 추구할 수 있을 때 자발적으로 학습한다. 아이들은 주로 자유롭게 놀면서 배운다. - P400

전 세계 성취도 평가표에서 종종 가장 훌륭한 학교들이 있다고 평가받는 국가인 핀란드가 이러한 진보적 모델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아이들은 7세가 되기 전까지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그냥 논다. 7세에서 16세 사이의 아이들은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하고 오후 2시에 하교 한다. 숙제는 거의 없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험도 거의 없다. 핀란드 아이들 삶의 고동치는 심장에는 자유로운 놀이가 있다. 법적으로 핀란드의 교사들은 45분 지도할 때마다 15분의 자유 놀이 시간을 줘야 한다. 그 결과는? 핀란드 어린이의 겨우
0.1퍼센트만이 집중력 문제를 진단받으며, 핀란드인은 세계에서 읽고 쓰는 능력과 산술 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 중 하나다. - P404

어린이에게는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른인 우리의 일이다. 이 문화에서 우리는 대체로 아이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자유롭게 놀지 못하게 하고, 전자기기 화면으로 소통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는 집 안에 아이들을 가두며, 우리의 학교 제도는 대개 아이들을 무감각하고 지루하게 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먹이는 음식은 에너지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약물처럼 아이들을 들뜨게 할 수 있는 첨가제가 들었으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양소는 없다. 우리는 뇌를 망가뜨리는 대기 속 화학물질에 아이들을 노출시킨다. 아이들이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이 세상의 잘못이다. - P405

나는 이렇게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해야 몰입 상태에 빠져들어 깊이 집중할 수 있는 능력에 가닿을 수 있을까? 미하이가 가르쳐준 몰입의 주 요소를 떠올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의미한 활동이 무엇일까? 무엇이 내 능력의 한계에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 이 기준에 맞는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몰입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자기 처벌적인 수치심보다 훨씬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 P414

나는 깊이 집중하는 능력이 식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집중력이 잘 자라서 잠재력을 온전히 피워내려면 특정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성인에게는 몰입이 필요하고, 책을 읽고, 자신이 집중하고 싶은 유의미한 활동을 찾고,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이 배회할 공간을 마련하고, 신체 활동을 하고, 잘 자고, 뇌가 건강하게 발달할 수 있도록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안정감을 느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집중력을 방해하고 성장을 막기 때문에 차단해야 할 것들도 있다. 지나친 속도와 전환, 지나친 자극, 우리를 공격하고 중독시키는 침략적 기술, 스트레스, 탈진, 우리를 각성시키는 식용색소로 범벅인 가공식품, 대기오염이 그러한 것들이다. - P420

어떤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면 정치인들은 재당선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회사가 성장하면 CEO는 목에 화환을 걸 가능성이 크다. 어떤 국가의 경제나 어떤 기업의 주가가 위축되면 정치인이나 CEO는 쫓겨날 위험이 커진다. 경제성장은 우리 사회의 중심 원리다. 경제성장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핵심에 있다. - P428

하버드 의대에서 찰스 체이슬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우리 모두가 다시 전처럼 뇌와 몸이 필요로 하는 만큼 잔다면, "우리 경 제체제에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경제체제는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중력 부진은 로드킬일 뿐이에요. 그저 사업의 대가죠." - P429

나의 친구인 런던 대학의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 박사는 아마 전 세계에서 경제성장 개념을 가장 강력히 비판하는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며, 그는 오래전부터 경제성장의 대안이 있음을 설명해왔다. 나와 만났을 때 제이슨은 우리가 성장 개념을 넘어 ‘평형 상태 경제 steady-state economy‘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경제를 추동하는 원칙으로서의 경제성장을 포기하고 다른 종류의 목표를 선택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녹초가 될 만큼 일해서 물건을 살 수 있으면(대부분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번영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이슨은 우리가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자연에 머물거나, 충분히 자거나, 꿈꾸거나,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번영의 의미를 재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는 빠른 삶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원한다. 죽기 직전에 자신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형 상태 경제에서는 우리의 집중력을 공격하지 않고 지구 자원을 공격하지 않는 목표를 선택할 수 있다. - P429

시드니에 사는 친구가 화재경보기의 전원을 끌 수 있도록 전화 를 끊으며 생각했다. 우리의 주의력이 계속해서 파편화된다면, 생 태계는 우리가 집중력을 되찾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생태계는 무너지고 불탈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의 시인 W. H. 오든 W.H. Auden은 인간이 발명한 새로운 파괴 기술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고 경고했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함께 집중하지 않으면 이 산 불에 홀로 직면하게 되리라 믿는다. - P4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이걸 내게 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소." 리샤르트는 고결한 분노로 가득 차 부수도원장의 말을 상기시켰다. "내가 교구민들을 설득해서 그 성녀를 포기하도록 만들어주면 이 돈을 주겠다고 말이오! 이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오! 당신은 이 어리석은 물건을 당신 자신의 명예보다도 더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왔지. 하지만 이따위 것으로 내 양심을 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시오. 이로써 내가 당신에게 품은 의심이 옳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겠군. 당신은 당신 할 말을 했으니, 나는 주민들에게 내가 할 말을 하겠소. 당신이 약속한 대로 아무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말이오." - P102

회의의 열기는 저녁 미사 직전까지 지속되어 그 쓰디쓴 기분 탓에 미사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위니프 리드 성녀가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자신을 옮기는 일이라는 것을 수많은 계시를 통해 분명히 드러냈다면서 공포에 찬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 감히 당신 의지에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거쳐야 할 리샤르트와의 합의를 위해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새로 모색한 방법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캐드펠은 부수도원장의 말을 옮기며 위협의 강도를 최대한 약화시키려 노력했지만 주민들 중에는 그 위협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눈치챌 만큼 잉글랜드어를 알아듣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니, 그들의 냉랭하고 폐쇄적인 얼굴이 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미사가 끝난 뒤, 그들은 크래독 왕자에게 벌어졌던 일을 잊지 말라는 부수도원장의 엄포를 귀더린의 모든 주민들에게 전달할 터였다. 크래독 왕자라니! 그 살점이 산산이 흩어지고 비처럼 땅 위로 쏟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지상에서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말살되어버린 그의 예를 들다니! 부원장은 감히 위니프리드 성녀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에게도 그 와 똑같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섬뜩한 처벌이 내릴 것이라고 설교한 것이다. - P106

"이것만은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리샤르트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기야 하겠지만, 저로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와 부수도원장님의 견해차가 너무 커요. 수치스러워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여기 두 분께는 해도 되겠지요. 그분은 제게 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조금 뒤에는 귀더린에 돈을 주겠다는 뜻이었다고 말을 바꿨고요. 그게 대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제가 귀더린인가요? 저 역시 귀더린의 한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제 도리를 다 할 뿐입니다. 그래요, 그분은 돈주머니를 제게 주고 그것으로 반대 의견을 없애려 한 겁니다. 제가 고향 사람들을 설득해주길 바란 거죠. 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그분의 뜻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신의 시각으로 제가 이 문제를 봐주기 바란다는 그분의 희망도 알겠고요. 하지만 그분이 이 문제를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만큼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겁니다. 제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그분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며, 그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위협하신 바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게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 작은 성녀에 대한 저의 경외심은 그분이나 다른 수사들의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성녀께서 이 사실을 모르시리라고 보십니까?" - P114

"자신의 저항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던가요? 반대를 철회할 것 같습니까?"
[…]
"부수도원장님께서 그 사람을 제대로 설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캐드펠 수사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진정 어린 태도를 보이셔야 할 테고요. 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쉽게 설득될지 모르겠군요." 문득 이런 무의미한 말로 부수도원장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부수도원장님은 오늘 아침 그 사람에게 실수를 하셨습니다. 먼저 부수도원장님께서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리샤르트 씨의 것이든 부수도원장님의 것이든 말이지요." - P119

귀더린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다들 리샤르트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이었다.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백이나 유죄가 확실히 밝혀질 때까지는 이 객지 사람을 구금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동의했다. 그들이 의견을 정리할 때쯤 웅성임은 하나의 외침이 되어 있었다.
"그게 공정하겠습니다." 베네드가 말하자 이를 지지하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외로운 잉글랜드인 하나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군요." 존 수사가 캐드펠의 귀에 대고 넌덜머리 난다는 듯 속삭였다. "아무도 귀 기울여주는 이가 없는데, 저 사람이 곤경을 면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있기나 할까요? 저 사람 말이나 행동이 살인범의 것 같습니까?" - P149

달리는 사람은 그들 셋뿐이었다. 엥겔라드가 재빠르기는 하지만 다리가 긴 캐드월론 집안의 농노가 당장이라도 몸을 던져 그를 쓰러뜨릴 태세였으니, 결국 그들 세 사람이 격렬히 부딪치며 도주와 추적이 끝날 성싶었다. 마침내 농노가 다리 못지않게 강건하고 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달려들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 수사가 역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붙었다. 어느 쪽에서든 한껏 내뻗은 손이 엥겔라드의 윗도리를 막 붙잡으려는 참이었다. 부수도원장은 도망자가 붙잡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존 수사가 몸을 휙 날리더니, 페레디르가 아니라 농노의 무릎을 낚아채어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엥겔라드는 윗도리를 움켜쥔 추적자의 손을 뿌리치며 그대로 관목숲 속으로 뛰어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빈터는 완벽한 정적에 잠겼다. - P152

존 수사는 풀밭에 앉아 농노가 휘두르는 주먹을 잽싸게 피하며 잉글랜드어로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만두게나, 이 사람아! 저 청년이 자네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이러나? 내 말 들어보게.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그렇게 힘껏 내 동댕이칠 생각은 없었어. 제발 마음 좀 풀게나. 어차피 난 그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붙은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툭툭 털어내며 흡족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사태에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엄격한 노르만 귀족 출신인 그는 이 순간 반역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쇼네드도 있었다. 지치고 탈진하여 넋이 나간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눈에서 미약하나마 희망 비슷한 것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아네스트가 한 팔을 여주인의 허리에 두르고 선 채 그 꽃 같은 얼굴로 존 수사를 바라보았다. 부수도원장이 제아무리 우레 같은 고함을 내지른다 하더라도, 그 곁에서 아네스트가 감사와 찬탄이 담긴 환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존 수사로서는 후회할 것이 없었다. - P154

존 수사는 고분고분 두 수사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 닥칠지는 몰라도 평생 이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이 없는 듯했다. 그에게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에 대한 자긍심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결코 버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
"그 젊은이는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존 수사는 용감하게 말했다. "전 엥겔라드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고,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척 훌륭하고 점잖으며,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이지요. 누구에게든 폭력을 휘두를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더구나 리샤르트 씨를 해하다니요! 엥겔라드는 그분을 깊이 존경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엥겔라드가 그 분을 죽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가 리샤르트 씨를 죽였는지 알아내기 전까지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떠나버린다면 오히려 살인자를 돕는 셈이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엥겔라드에게 살인범을 잡을 기회를 선사하기로 한 겁니다." -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했소!" 수도원장은 진심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원대한 목적에 몰두하고 있는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 되지. 부수도원장에게는 그 젊은 형제를 순례에 참여시키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시오. 일단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뒤에 다른 곳을 곁눈질하는 이들에게 무척 엄격한 사람이니까. 그것은 그 나름의 꺾을 수 없는 확신이라오."
"그렇지만 수도원장님, 우리 모두가 타고날 때부터 성직자의 운명을 받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다른 일을 함으로써 세상에 더욱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맞는 말이오!" 수도원장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띠며 캐드펠 수사 자신 또한 종종 곱씹는, 그러나 쉽게 잊히곤 하는 난제에 대해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의문을 품은 적이 있지. 이제는 다 끝난 얘기지만······. 어쨌든 좋소. 그 젊은 형제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그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오." - P46

"저는 성인들이 스스로에게 영광을 바치기를 요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휴 신부는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성인 들은 당신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는 분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일에 관해서도 위니프리드 성녀의 뜻이 어떠하실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교단이 성녀께 올바른 영광을 바치고자 한다는 것은, 물론 아주 훌륭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성인의 뜻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욱이······ 이 축복받은 성녀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조용하고 기적적인 수도 생활을 하셨지요. 그분은 이곳에서 두 번이나 돌아가셨고, 결국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비록 제 교구민들이 약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라 그분을 합당하게 섬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들 위니프 리드 성녀께서 자신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웨일스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한 성인에게 바치는 경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자님과 주교님께서는—물론 저야 그 두 분께 합당한 존경을 표합니다만—성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그 유골이 잉글랜드로 옮겨질 경우 이곳 교구민들의 기분이 어떠할 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분들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그 유골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건 성인은 성인이십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귀더린 주민들은 이런 일을 결단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 P58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서 헤어졌다. 건너편 골짜기 기름진 농토에서는 아직도 수소와 팀을 이룬 사람들이 두 번째 밭을 갈아엎는 중이었다. 하루에 밭뙈기 둘이라니, 엄청난 노동이었다.
"부수도원장께서 조금만 현명하시다면 아까 본 그 젊은 형제로부터 교훈을 얻으실 수 있을 텐데요." 이리엔 신부는 캐드펠을 두고 떠나면서 말했다. "이런 마을에서는 재촉하기보다 한발 앞장서서 구슬리는 편이 더 좋은 성과를 얻는 법이지요. 하긴, 굳이 형제에게 이런 얘길 할 필요는 없겠군요. 형제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웨일스 사람이니까." - P64

캐드펠은 잘생긴 젊은이와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길을 피해 그곳을 떠났다. 소녀는 한동안 수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소몰이 청년이 강을 건너 둑으로 올라오자 반갑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캐드펠이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아마 소녀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주어 무척 안심했으리라. 수놓은 가운을 입은 웨일스의 지체 높은 아가씨가 이 혈족 사회에서 땅도 뿌리도 없는 이방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친족 관계가 없는 사람은 살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유쾌하고 잘생긴 젊은이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일을 잘하고 가축을 다루는 데 능숙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캐드펠은 숲에 가려져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두 남녀는 기쁨에 겨워 꼼짝도 안 하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직은 수줍은 사이인 듯 서로 몸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채였다. 캐드펠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 P70

"수사님도 아시겠지만, 객지 사람이 웨일스에서 살아간다는 게 좀 힘든 일입니까?"
캐드펠도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 모두가 같은 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는 곳, 모든 인간관계가 토지에 기반하며 마을에서의 지위가 자유 지주와 농노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곳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객지 사람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기반을 마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삶의 근거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의 삶을 확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처와 일굴 땅을 내주고 그가 가진 기술을 써줄 지주를 만나 계약을 맺는 길뿐이었다. 이 계약은 3대까지는 언제라도 양쪽 당사자에 의해 해지할 수 있었고, 계약이 해지될 경우 객지 사람은 삶의 기회를 부여해준 지주와 소유물을 공정히 분배한 뒤 떠날 수 있었다. - P83

"우리가 귀더린에 가져온 문제 말고도, 이 마을에는 이 마을 나름의 문제가 있는 모양이구먼." 카이와 헤어지면서 캐드펠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시간을 두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겠지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 채 카이는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멀어져갔다. 캐드펠은 심란한 기분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그래,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이 간혹 약간의 도움을 구할 때면 인간은 대개 훼방만 놓지. - P86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동조하며 자신들이 품은 분노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낸 이 대변인에게 환호를 보냈다. 게다가 교회 중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닌 켈트인들의 성스러운 교회, 세속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고 왕권의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으며 속세로부터 물러나 명상과 기도라는 축복받은 고독에 파묻힌 이 교회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가. 사람들의 속삭임은 억제된 웅성거림으로, 천둥 같은 고함으로, 포효로 점점 커져갔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그 외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도 목소리를 높여 맞고함을 질렀으나 현명한 대응은 아니었다. - P96

웅변과 논증에서 그만한 적수를 만나다니, 로버트 부수도원장에게는 그야말로 생애 최악의 타격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웨일스인 지주, 그것도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영주도 아닌 평범한 지주에 불과한 인물 아닌가. 저 무수한 열등한 인간들과 견주어 겨우 조금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인 보잘것없는 자. 적어도 이 노르만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랬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지위와 계급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리샤르트는 혈연관계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혈연 관계에 속하는 이라면 누구든 가족 속에 서로의 자리를 가질 뿐, 그 어떤 사람도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라비는 집중력 면에서 "차이가 매우 뚜렷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받자 사람들의 집중력이 크게 개선된 것이다. 시그네는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돈과 관련된 문제가 집중에 매우 나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경제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면··· 뇌가 가진 능력의 상당 부분이 거기에 쓰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으면 다른 것들을 생각할 능력이 생기죠." - P284

다른 많은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다. 실험의 내용은 무척 다르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1920년대 영국에서는 W. G. 켈로그(시리얼 제조업체 창립자)가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작업 중 사고(집중력을 측정하는 좋은 기준)가 41퍼센트 줄었다. 2019년 일본에서는 마이 크로소프트가 주4일 근무를 도입했고 생산성이 40퍼센트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 같은 시기 스웨덴 고센버그에서는 한 요양원 이 임금을 줄이지 않고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그 결과 직원들은 수면 시간이 늘고 스트레스가 줄었으며 병가를 더 적게 냈다. 같은 도시에서 토요타는 하루 근시간을 두 시간 줄였고, 그 결과 정비공의 생산성이 114퍼센트로 높아졌으며 이윤이 25퍼센트 늘었다. - P297

우리는 더 빨리 걷고 더 빨리 말하고 더 오래 일하라고 명령하는 문화에 살며, 바로 거기서 생산성과 성공이 나온다고 생각하게끔 배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요. 우리는 속도를 줄일 것이고, 휴식과 집중을 위한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할 겁니다. - P299

현재 이 같은 결정은 우리 대다수에게 불가능한 사치처럼 보인다. 사람들 대부분은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데, 그렇게 하면 일자리나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인의 56퍼센트가 1년에 단 1주일의 휴가를 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에게 집중력 개선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한 번에 하나씩만 하고, 더 많이 자고, 책을 더 많이 읽고, 딴생각하기)을 말하는 것이 그토록 쉽게 잔혹한 낙관주의로 변질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서는 그런 것들을 실천할 수 없다. 그러나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다. - P299

20세기 중반에 신선 식품은 미리 조리된 가공식품으로 급속히 대체되었고, 이 가공식품은 슈퍼마켓에서 구매해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제조되었다. 이러한 음식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해야 했다.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서 상하지 않도록 각종 안정제와 방부제를 쏟아부었고, 이러한 가공 절차에서 수많은 영양 성분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P314

니컬러스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이러한 결과를 특정 방식으로 정당화할 것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의사가 주의력 문제를 겪는 자 녀들의 부모에게 하는 말, 즉 집중력 장애는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되므로 약물을 이용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니컬러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 여정이 시작된 지점, 바로 끙끙이를 하던 말에서 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생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말은 지금껏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 말들을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가두는 ‘가축화‘의 문제예요. 말들이 마구간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초기에 그런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끙끙이를 하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 P343

니컬러스가 이 말들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표현 하나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말들이 "생물학적 목적의 좌절‘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말은 돌아다니고 달리고 풀을 뜯고 싶어 한다. 이런 타고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말들의 행동과 집중력은 망가지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니컬러스는 "생물학적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압력이 너무 심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이 파괴적인 심리 압박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완화해줄" 행동을 뭐든 찾게 된다. "야생말은 자기 시간의 60퍼센트를 풀을 뜯는 데 씁니다. 그러니 말에게 해방감을 주는 행동 중 하나가 일종의 가짜 풀 뜯기인 끙끙이라는 사실도 놀라운 일은 아니죠." - P343

니컬러스는 ‘주코시스zoochosis (동물원과 정신질환psychodis의 합성어로,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이상 증세를 가리킨다)‘라 불리는 증세를 보이는 동물에게 약물을 처방하는 자신의 접근법이 몹시 제한적인 해결책임을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예를 들어 나는 그에게 북극곰에게 약을 먹여서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물었다. "아니요." 니컬러스가 대답했다. "그건 반창고를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북극곰을 북극에서 끌어내 동물원에 가둔 것이에요··· 자연에서 북극곰은 북극 툰드라를 몇 마일씩 걸어 다닙니다. 물개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수영을 하고 물개를 먹죠. 전시장[북극곰이 갇혀 있는 동물원 우리]은 실제 삶과 전혀 같지 않아요. 그러니 곰들은 감옥에 갇힌 수감자처럼 진짜 삶을 부정당한 내면의 고통을 달래려 서성이는 겁니다··· 곰들에게는 본능이 있어요. 그 본능은 생생히 살아 있는데, 쓸 수가 없습니다." - P344

니컬러스 혼자서는 그런 세상을 불러올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장기적인 해결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논의했다. 나는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해는 가지만 본능적으로 불편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말 포커는 갇혀 있는 것이 싫었고, 비글 에마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었다. 말은 본래 뛰어다녀야 하고, 개는 본래 무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동물들이 보내는 신호를 그가 약물로 덮어버림으로써 주인들에게 일종의 환상을 불어넣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되었다. 한 생명체를 데려다가 그 본성을 무시하고, 동물의 필요가 아닌 주인인 자신의 필요에 맞는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는,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 말이다.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P345

사미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아이가 ADHD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폐렴 진단을 받은 것과 비슷할 거라 상상한다고 했다. 이 경우 의사는 숨어 있던 병원균이나 질병을 확인하고, 그 신체적 문제를 해결할 무언가를 처방한다. 그러나 ADHD는 의사가 실시할 수 있는 신체검사가 없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 본인 및 그 아이를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아이의 행동이 정신과 의사가 작성한 점검표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게 다다. 사미는 이렇게 말한다. "ADHD는 진단이 아닙니다. 이따금 동시에 발생하는 특정 행동들의 묘사일 뿐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가 ADHD를 진단받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아이가 잘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그 말은 ‘왜‘라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아이가 기침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아이의 기침 소리를 들은 뒤, ‘그렇군요, 아이는 기침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가 아이에게서 집중력 문제를 확인한다면, 그것은 진료 과정의 끝이 아니라 첫 단계여야 한다. - P350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가 집중력 문제를 겪을 확률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네이딘 버크 해리스를 통해 알게 된 모든 내용을 떠올렸다. 앨런은 여기에 네이딘의 연구 결과와 양립하는 또 다른 층위의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자신을 달래주고 진정시켜 줄 어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위로받는 경험을 충분히 하고 나면, 시간이 흘러 성장할수록 혼자서 자신을 달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가족이 주었던 안심과 이완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쌓인 부모는 자기 잘못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녀 달래기를 힘들어하는데, 본인이 너무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의 자녀도 중심을 잡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그들의 자녀는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는 방식으로 힘든 상황에 대처할 확률이 높아지고, 분노와 괴로움은 집중력을 망가뜨린다. - P353

다른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이 약물들의 긍정적 효과가 (실재하긴 하지만) 놀라울 만큼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뉴욕 대학의 소아청소년 정신의학 교수인 그자비에 카스테야노스는 각성제 효과에 관한 훌륭한 연구에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각성제는 반복을 요구하는 작업에서는 어린이의 행동을 개선하지만, 학습 능력은 개선하지 못한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다 각성제 처방의 지지자들이 ADHD 연구의 황금률로 제시한 연구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14개월간 각성제를 복용한 아이들은 시험에서 1.8퍼센트 나은 결과를 보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행동 지도만 받은 아이들도 1.6퍼센트 개선된 결과를 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증거에 따르면 초기에 나타나는 각성제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성제를 복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성이 생긴다. 몸이 약물에 익숙해져서 똑같은 효과를 내려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어린이에게 허용된 최대 복용량에 다다르게 된다. - P360

그래서 제이는 여러 연구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설명해줄 유전자 이외의 다른 요인이 있다고 말했다. "일란성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훨씬 비슷한 행동을 유발하는 환경에서 성장한다는 사실"로 그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일란성쌍둥이의 집중력 문제가 유사하게 발생하는 이유는 이들의 유전자가 더욱 유사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생활이 더욱 유사해서일 수 있다. 만약 집중력 문제를 일으키는 환경 요인이 있다면, 일란성쌍둥이는 똑같은 정도로 그 요소를 경험할 가능성이 이란성쌍둥이보다 높다. 그러므로 제이는 "쌍둥이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의 잠재적 영향을 구분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가 자주 듣는 통계 수치(예를 들면 ADHD의 75-80퍼센트가 유전적 문제라는 것)가 믿을 수 없는 토대 위에 있다는 뜻이다. 제이는 이러한 수치가 "사람들을 호도하며,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 P364

그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오래된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강가에 있다가 시체 한 구가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죠. 사람들은 시체를 건져서 장례를 치러줍니다. 다음 날은 시체 두 구가 떠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두 시체를 땅에 묻습니다. 한동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이 시체들은 어디에서 떠내려오는 걸까? 이 상황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답을 알아내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자에 앉은 조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약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를 알아내야 합니다." 나는 지금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 P3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