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걸 내게 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소." 리샤르트는 고결한 분노로 가득 차 부수도원장의 말을 상기시켰다. "내가 교구민들을 설득해서 그 성녀를 포기하도록 만들어주면 이 돈을 주겠다고 말이오! 이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오! 당신은 이 어리석은 물건을 당신 자신의 명예보다도 더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왔지. 하지만 이따위 것으로 내 양심을 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시오. 이로써 내가 당신에게 품은 의심이 옳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겠군. 당신은 당신 할 말을 했으니, 나는 주민들에게 내가 할 말을 하겠소. 당신이 약속한 대로 아무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말이오." - P102

회의의 열기는 저녁 미사 직전까지 지속되어 그 쓰디쓴 기분 탓에 미사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위니프 리드 성녀가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자신을 옮기는 일이라는 것을 수많은 계시를 통해 분명히 드러냈다면서 공포에 찬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 감히 당신 의지에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거쳐야 할 리샤르트와의 합의를 위해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새로 모색한 방법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캐드펠은 부수도원장의 말을 옮기며 위협의 강도를 최대한 약화시키려 노력했지만 주민들 중에는 그 위협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눈치챌 만큼 잉글랜드어를 알아듣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니, 그들의 냉랭하고 폐쇄적인 얼굴이 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미사가 끝난 뒤, 그들은 크래독 왕자에게 벌어졌던 일을 잊지 말라는 부수도원장의 엄포를 귀더린의 모든 주민들에게 전달할 터였다. 크래독 왕자라니! 그 살점이 산산이 흩어지고 비처럼 땅 위로 쏟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지상에서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말살되어버린 그의 예를 들다니! 부원장은 감히 위니프리드 성녀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에게도 그 와 똑같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섬뜩한 처벌이 내릴 것이라고 설교한 것이다. - P106

"이것만은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리샤르트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기야 하겠지만, 저로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와 부수도원장님의 견해차가 너무 커요. 수치스러워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여기 두 분께는 해도 되겠지요. 그분은 제게 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조금 뒤에는 귀더린에 돈을 주겠다는 뜻이었다고 말을 바꿨고요. 그게 대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제가 귀더린인가요? 저 역시 귀더린의 한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제 도리를 다 할 뿐입니다. 그래요, 그분은 돈주머니를 제게 주고 그것으로 반대 의견을 없애려 한 겁니다. 제가 고향 사람들을 설득해주길 바란 거죠. 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그분의 뜻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신의 시각으로 제가 이 문제를 봐주기 바란다는 그분의 희망도 알겠고요. 하지만 그분이 이 문제를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만큼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겁니다. 제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그분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며, 그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위협하신 바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게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 작은 성녀에 대한 저의 경외심은 그분이나 다른 수사들의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성녀께서 이 사실을 모르시리라고 보십니까?" - P114

"자신의 저항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던가요? 반대를 철회할 것 같습니까?"
[…]
"부수도원장님께서 그 사람을 제대로 설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캐드펠 수사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진정 어린 태도를 보이셔야 할 테고요. 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쉽게 설득될지 모르겠군요." 문득 이런 무의미한 말로 부수도원장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부수도원장님은 오늘 아침 그 사람에게 실수를 하셨습니다. 먼저 부수도원장님께서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리샤르트 씨의 것이든 부수도원장님의 것이든 말이지요." - P119

귀더린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다들 리샤르트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이었다.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백이나 유죄가 확실히 밝혀질 때까지는 이 객지 사람을 구금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동의했다. 그들이 의견을 정리할 때쯤 웅성임은 하나의 외침이 되어 있었다.
"그게 공정하겠습니다." 베네드가 말하자 이를 지지하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외로운 잉글랜드인 하나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군요." 존 수사가 캐드펠의 귀에 대고 넌덜머리 난다는 듯 속삭였다. "아무도 귀 기울여주는 이가 없는데, 저 사람이 곤경을 면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있기나 할까요? 저 사람 말이나 행동이 살인범의 것 같습니까?" - P149

달리는 사람은 그들 셋뿐이었다. 엥겔라드가 재빠르기는 하지만 다리가 긴 캐드월론 집안의 농노가 당장이라도 몸을 던져 그를 쓰러뜨릴 태세였으니, 결국 그들 세 사람이 격렬히 부딪치며 도주와 추적이 끝날 성싶었다. 마침내 농노가 다리 못지않게 강건하고 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달려들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 수사가 역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붙었다. 어느 쪽에서든 한껏 내뻗은 손이 엥겔라드의 윗도리를 막 붙잡으려는 참이었다. 부수도원장은 도망자가 붙잡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존 수사가 몸을 휙 날리더니, 페레디르가 아니라 농노의 무릎을 낚아채어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엥겔라드는 윗도리를 움켜쥔 추적자의 손을 뿌리치며 그대로 관목숲 속으로 뛰어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빈터는 완벽한 정적에 잠겼다. - P152

존 수사는 풀밭에 앉아 농노가 휘두르는 주먹을 잽싸게 피하며 잉글랜드어로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만두게나, 이 사람아! 저 청년이 자네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이러나? 내 말 들어보게.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그렇게 힘껏 내 동댕이칠 생각은 없었어. 제발 마음 좀 풀게나. 어차피 난 그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붙은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툭툭 털어내며 흡족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사태에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엄격한 노르만 귀족 출신인 그는 이 순간 반역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쇼네드도 있었다. 지치고 탈진하여 넋이 나간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눈에서 미약하나마 희망 비슷한 것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아네스트가 한 팔을 여주인의 허리에 두르고 선 채 그 꽃 같은 얼굴로 존 수사를 바라보았다. 부수도원장이 제아무리 우레 같은 고함을 내지른다 하더라도, 그 곁에서 아네스트가 감사와 찬탄이 담긴 환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존 수사로서는 후회할 것이 없었다. - P154

존 수사는 고분고분 두 수사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 닥칠지는 몰라도 평생 이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이 없는 듯했다. 그에게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에 대한 자긍심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결코 버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
"그 젊은이는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존 수사는 용감하게 말했다. "전 엥겔라드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고,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척 훌륭하고 점잖으며,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이지요. 누구에게든 폭력을 휘두를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더구나 리샤르트 씨를 해하다니요! 엥겔라드는 그분을 깊이 존경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엥겔라드가 그 분을 죽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가 리샤르트 씨를 죽였는지 알아내기 전까지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떠나버린다면 오히려 살인자를 돕는 셈이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엥겔라드에게 살인범을 잡을 기회를 선사하기로 한 겁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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