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사제의 발을 본다. 더러운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모욕이다. 사제는 신발을 벗어 밖에 두면서 발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국인이 등받이 없는 의자를 꺼내 온다. 그는 손이 빠르다. 유연하고 잘생겼고,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사제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창유리를 통해 강을 내다보면서 새삼 날카로운 질투를 느낀다. - P59

"네." 중국인이 말한다. "당신 문제 있어요."
"내 문제요?"
중국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아무 문제도 없어요." 사제가 말한다.
중국인이 웃는다. 원래 문제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그도 안다. - P59

중국인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소매를 팔꿈치까지 깔끔하게 접어 올리더니 손을 뻗어 사제를 만진다. 다른 사람과 닿은 것은 3년 만인데, 모르는 사람의 손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느껴진다. 어째서 상처보다 부드러움이 사람을 훨씬 더 무력하게 만들까? - P60

롤러의 딸과 보낸 파편 같은 시간들이 마음을 스친다.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녀는 자기 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때로 그런 그녀의 생각에 화가 났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음을 결코 증명 할 수 없었다. - P61

이제 중국인이 사제의 손을 주무르면서 뒤로 최대한 꺾자 사제는 손목이 틀림없이 부러질 것만 같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린다. 중국인이 사제의 머리 양옆에 무릎을 대고 그의 척추 맨 아래, 꼬리뼈에서부터 몸통을 지나 무언가를 끌어온다. 뭔가 딱딱한 것이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중국인의 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제는 미처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안에서 무언가가 접히는 것을 느낀다. 해안에서 바닷물이 접히면서 또 다른 파도를 만들 때 같다. 그의 입에서 파도가 부서진다. 그녀의 이름이 끔찍한 비명처럼 터져 나오고, 다 끝난다. - P62

사제가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건 뭐죠?"
"오래됐어요." 중국인이 말한다.
"비어 있네요."사제가 웃는다.
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비었어요." 사제가 말한다. "가득 차 있지 않다고요."
"네." 중국인이 말한다. "당신 문제 있어요." - P63

그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건조하고 기대로 가득 찬 봄이 왔다. 오리나무가 싹을 틔우면서 허연 가지가 놋빛으로 변한다. 이제 모든 것이 더 선명해 보인다. 울타리 기둥 너머에서 밤이 단단히 준비한다. 갈퀴는 무척 사랑받고 닳아서 반짝거린다.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뚜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 P64

"그건 그렇고, 암말에 편자를 달고 오는 길이야."
"말은 괜찮았어요?"
"난리였지." 레이든이 말한다. "여기 브래디가 안 도와줬으면 아직도 달고 있었을걸."
"젊은 애들이나 하는 일이야." 맥필립스가 말한다. "나도 팔팔할 때는 편자를 직접 씌웠지."
"파인트 세 잔만 마시면 안 해본 일이 없지." 노리스가 말한다.
"두 잔 마시면 못 할 일이 없고!" 레이든이 한술 더 뜨며 말한다. - P71

이제 뉴스가 끝나고 숀이 라디오를 끈다. 이 침묵은 모든 침묵과 마찬가지다. 다들 조용해져서 좋아하면서도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 뻔해서 좋아한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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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구에서 온 젊은 여자가 바텐더를 찾아서 바를 향해 몸을 숙인다. 그녀의 옆에서 이발사가 자기 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잔이 반쯤 빈 걸까요, 반쯤 찬 걸까요, 신부님?"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사제가 말한다.
"글쎄요, 뭘 마시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여자가 말한다. "둘 다겠죠. 둘 중 하나만일 수는 없잖아요." 이발사가 얼굴을 찌푸리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여자들이란 참."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여자들은 항상 답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 P37

"무슨 일이든 저절로 해결되는 법이지요." 사제가 위로한다.
"그런 일도 있죠."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광을 낸 커다란 구두 끝으로 의자를 툭툭 치며 말한다. "그저 물러서서 마음대로 하게 놔둬야 해요. 실수하게 내버려둬야 하죠. 그게 힘듭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을 당할 뿐이에요." - P39

사제가 문을 나설 때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때, 별로 오래되지 않은 예전에는 사제에게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을 텐데. 그는 바에 가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결혼식은 힘들다. 사방에 술이 넘치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지만 그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한 남자가 젊은 남자에게 딸을 빼앗긴다. 한 여자는 아들이 별것도 아닌 여자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반쯤 그렇게 생각한다. 비용이 들고 감정은 오가고 돌이킬 수는 없다. 공개적으로 서약하면 사람들은 항상 운다. - P40

"다들 잘 알지만 흰 옷이 얼룩지기 쉬운 법이지." - P45

신랑이 종이를 펴고 장인과 비슷한 인사말로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신부는 연설을 늘어놓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용히 앉아 있다. 웨이트리스가 샴페인을 들고 오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신부가 와인 잔 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사제는 무언가가 떠오른다. 선명하게 되살아난 기억 때문에 그는 혼자 있고 싶어진다. - P49

사제에게 마이크가 다시 넘어온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후 감사 기도를 드리지만 한마디도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은 기도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다. 하느님이 무엇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지만–바로 이것이 이상한 점이다–그는 하느님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계시뿐이다. 저녁이 되어 가정부가 돌아간 뒤 창가의 커튼을 꼼꼼하게 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사제가 되는 방법을 보여달라고 기도를 드릴 때도 있다. - P49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 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 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 P52

한때 집 한 채가 서 있던 곳에서 길이 끝난다. 담쟁이덩굴이 박공을 온통 뒤덮었다. 오리나무가 자라는 습지에 도착하 자물 쪽에서 당황한 듯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야생 오리 떼가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밑으로 늘어진 꽃이삭들이 떨린다. 사제가 가만히 서서 백로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다. 여기에 와서 못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갑자기 백로가 나타나 하늘을 향해 평온한 곡선을 그리며 느린 날갯짓으로 날아간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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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가끔 화가 나면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서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당신은 슬레이니강으로 끌려가서 어머니가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 강둑에서 던지는 것을, 양동이가 잠시 둥둥 뜨다가 가라앉는 장면을 상상했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임을 알았고, 너무 끔찍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끔 끔찍한 말을 했다. - P15

큰언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유진은 공부를 잘했지만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사진을 보면 장남과 장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새틴 리본, 짧은 바지, 두 눈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태양.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대로 먹이고 입히고 기숙학교에 보냈다. 가끔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과 낙관주의를 안고 오지만 낙관주의는 금방 시들었다. 언니와 오빠 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살던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지르면 뻣뻣하게 굳었다. 언니 오빠들은 집을 다시 떠나면 치유받는 것 같았고,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 이었다. - P16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에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P17

벚나무가 휘어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양치기 개들이 당신을 쫓아온다. 당신은 꽃밭을 지나고 배나무를 지나 자동차로 걸어간다. 포드 코티나 승용차가 밤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다. 디젤 연료통 옆에서 야생 민트 향이 난다. 유진이 시동을 걸고 농담을 하면서 차를 몰기 시작한다. 당신은 핸드백, 비행기표, 여권을 다시 본다. 넌 거기 도착할 거야,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거야. - P21

당신이 철조망 을 다시 칠 때 암망아지가 들판 가장자리를 따라 달려와서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히힝거린다. 붉은 기가 도는 밤색에 한쪽 발만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얗다. 당신은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서 이 암망아지를 팔았지만 내일은 돼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당신은 암망아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서지만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시선이 자갈길을, 타이어 자국 사이의 초록색 풀을 지나 개신교 시절부터 남아 있던 화강암 기둥을 따라 올라갔다가 저 너머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러 나온 어머니에게 닿는다. 어머니는 겁쟁이처럼 살짝 손을 흔든다. 어머니가 자신을 남편과 같이 여기 남겨두고 떠나는 당신을 용서하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 - P22

이쪽은 조명이 더 환하다. 향수와 볶은 커피콩 향기, 비싼 것들의 냄새가 난다. 당신은 태닝 로션 병들을, 선반 가득 늘어선 검은 안경들을 알아본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지만 당신은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티셔츠와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로 향한다.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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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일을 분배했지만, 작업이 진척되자 점점 더 짜증스럽고 끔찍해졌다. 가끔은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해 며칠 동안이나 실험실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일을 마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기도 했다. 참으로 더럽고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 실험을 하던 시절에는 일종의 광적인 열의가 내 눈을 가려 이 끔찍한 일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내 마음은 노동의 결과물에 철저히 못박혀 있었고, 내가 하는 일의 공포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차갑게 식은 피로 일에 임하고 있었고, 심장은 내 손이 하는 일에 구역질하는 일이 잦았다. - P222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영원히 이어 질 후세에 이런 저주를 퍼부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전에는 내가 창조한 존재의 궤변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 악마의 협박에 무너져 분별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그 약속의 사악함이 내게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후대가 나를 종족의 역병과 같은 존재로 저주할 거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일신의 평안을 구하는 대가로 전 인류의 생존을 주저 없이 팔아버린 이기적인 인간으로. - P225

괴물은 내 얼굴에 떠오른 결의를 읽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노에 차서 이를 갈았다. "모든 인간이 제 가슴에 품을 반려자를 맞고, 모든 짐승이 제 짝을 찾는데,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 내게도 사랑의 감정이 있었는데, 돌아온 건 혐오와 경멸뿐이었다. 인간아! 증오해도 좋다. 하지만 조심하라! 네 시간들은 공포와 불행 속에 흘러갈 것이며, 머지않아 번개가 떨어져 네 행복을 영영 앗아갈 것이다. 나는 참담한 극한의 불행 속에서 뒹구는데, 네놈은 행복할 거라 생각하느냐? 다른 열정들은 다 짓밟힌다 해도 복수심만은 남는다. 복수, 앞으로는 복수가 빛이나 양식보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이 되리라! 나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당신, 나의 독재자이자 고문관인 당신이 당신의 불행을 내려다보는 태양을 저주하도록 만들어주겠다. 조심하라. 나는 두려움이 없고, 그렇기에 강력하다. 뱀의 간교함으로 지켜볼 것이며, 뱀의 맹독으로 찌를 것이다. 인간아, 내게 입힌 이 상처를 끝내 후회하고야 말 것이다." - P228

우리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며, 이 참담한 불행의 극한에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목숨에 대한 애착이란 얼마나 기이한 것인가! - P233

어째서 나는 죽지 않았을까? 이 세상을 살아낸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참담하게 불행했던 내가, 어째서 망각과 휴식 속으로 꺼져 들어가지 않았을까? 죽음은 맹목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유일한 희망인 꽃 같은 어린아이들을 무수히 낚아채 가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신부들과 젊은 연인들이 건강과 희망의 절정에 섰다가 바로 다음날 묘지의 벌레들과 부패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가 말이다! 대체 나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기에, 그 많은 충격들을 이렇게 다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매번 생고문 같은 고통이 새롭기만 했는데. - P239

내 비탄과 우울은 지독히도 끈질겼지만,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가 내가 살인 누명을 썼던 굴욕을 떨쳐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란 얼마나 허망한지 모른다면서 날 일깨워주려 할 때도 있었다.
"아! 아버지." 나는 말했다. "정말 저를 모르시는군요. 저처럼 형편없는 존재가 감히 자존심을 내세운다면 인간에게, 인간의 감정과 정념에 굴욕일 것입니다. 유스틴, 불쌍하고 운도 없는 유스틴은 저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었지만, 똑같은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원인도 저란 말입니다. 제가 그애를 죽인 거예요. 윌리엄, 유스틴, 그리고 앙리, 다들 제 손에 죽은 거란 말입니다." - P251

기억은 광기를 수반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진짜로 광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끔은 맹렬하게 화를 내며 분노에 불타기도 하고, 가끔은 시무룩하게 우울증에 빠져 있기도 했다. 말도 않고 보지도 않고 나를 덮치는 수없는 불행에 멍하니 넋을 잃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곤 했다. - P257

아! 불행한 사람이라면 체념도 좋겠지만, 죄인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과다한 슬픔에 허우적거리다보면 가끔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사치는 회한의 고뇌에 쓰디쓴 독으로 변해버렸다. - P258

정해진 혼인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비겁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예감 때문이었는지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내 감정을 감추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항상 나를 지켜보는 훨씬 섬세한 엘리자베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우리의 결혼을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과거의 불행이 새겨놓은 일말의 근심이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확실하고 구체적인 행복처럼 여겨지는 게 곧 헛된 꿈이 되어 흩어져버릴까봐, 그리하여 깊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회한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 P259

인간의 정신에 급작스러운 격 변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다. 햇살이야 비칠 테고 구름이야 낮게 깔릴지 모르지만, 그 무엇도 하루 전날의 풍광을 되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악마는 내게서 장래의 행복에 대한 마지막 희망까지 앗아가버렸다. 그 어떤 생물도 나만큼 비참했을 리가 없다. 이토록 소름 끼치게 무서운 사건은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 P267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그들을 죽인 살인자 역시 살아 있었고,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나는 지쳐빠진 육신을 질질 끌고 가야만 한다. 풀밭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키스를 하며, 떨리는 입술로 외쳤다. "내가 무릎을 꿇은 신성한 대지에 걸고, 내 곁을 헤매는 혼령들에게 걸고, 지금 내가 느끼는 깊고 영원한 비탄에 걸고 맹세한다. 또한 그대, 오 밤이여, 그리고 그대를 지배하는 정령들에게 걸고, 이런 불행을 초래한 악마를 추적할 것을 맹세한다. 그 아니면 내가 치명적인 결투로 죽어갈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서 나는 목숨을 부지할 테다. 이 값비싼 복수를 결행하기 위해서, 영영 눈앞에서 추방해버리려 했던 태양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이 대지의 푸른풀을 또다시 밟을 테다. 죽은 자들의 영이여, 내가 그대들을 초혼한다. 방랑하는 복수의 집행자들이여, 나를 도와 안내해달라. 저주받은 지옥의 악마가 고뇌를 깊이 들이마시게 하라. 지금 나를 괴롭히는 절망을 그가 느끼게 하라." - P274

"클레르발을 죽인 후, 나는 슬픔에 무너지고 철저히 피폐해진 심장을 안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프랑켄슈타인이 불쌍했다. 공포심에 가까운 연민을 느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내 존재와 그에 수반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는 비참과 절망을 쌓고 또 쌓아 안겨준 주제에 영영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나를 끔찍하게 허기진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내가 했던 협박을 기억해낸 나는 그대로 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고문 행위를 자초하는 짓임을 알고 있었으나, 나 자신은 충동적 본능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와 같아 혐오스러워하 면서도 순순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죽었을 때! ······아니, 그때 나는 비참하지 않았다. 감정은 모두 훨훨 떨쳐버리고 고뇌는 모두 억누르고 흘러넘치는 절망을 만끽했다. 그후로 악은 나의 선이 되었다. 여기까지 몰리자, 이젠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요소에 내 본성을 적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악마적 계획의 완수가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 열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끝이 났다. 저기 내 마지막 희생자가 있으니!" - P298

그러나 내 불행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어떤 공감도 내게는 있을 수 없으니까. 처음 공감을 구했을 때는 미덕에 대한 사랑에서, 내 온몸과 마음에서 흘러넘치던 행복과 사랑의 감정에서,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 그러나 이제, 그때의 미덕은 내게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행복과 애정은 쓰라리고 혐오스러운 절망으로 변해버렸으니, 이제 내가 무엇에 대한 공감을 구할까? 고통이 지속되더라도 혼자서 견뎌내는 데 나는 만족한다. 죽는다 해도, 혐오와 불명예가 기억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한때는 미덕과 명성과 기쁨의 꿈이 내 상상을 달래주었다. 한때는 이 외모를 용서하고 내가 풍기는 훌륭한 자질들을 사랑해줄 존재들과 만나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명예와 헌신이라는 고아한 생각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죄악으로 가장 미천한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 어떤 범죄도, 어떤 악행도, 어떤 악의도, 어떤 불행도 내가 겪은 것에는 비할 수 없다. 내가 저지른 끔찍한 짓 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면, 한때 숭고하고 투명한 미와 위풍당당한 선의 비전으로 사고가 충만했던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심지어 신과 인간의 원수에게조차 외로움을 함께할 친구와 동료가 있다. 나는 철저히 혼자다. - P300

전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유일한 범죄자라는 멍에를 써야 하는가? 어째서 당신은 자기 친구를 경멸하며 문간에서 몰아낸 펠릭스를 미워하지 않는가? 어째서 자기 아이를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했던 시골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가? 아니, 이 사람들은 덕스럽고 흠 없는 존재들이겠지! 불행하고 버려진 내가 추물이니, 당연히 면박당하고 발길에 차이고 짓밟혀 마땅하겠지. 심지어 지금도 이런 불의를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른다. - P301

당신은 나를 미워하겠지. 그러나 그 증오는 나 스스로 느끼는 혐오감에는 차마 비길 수도 없다. 나는 그 일을 집행한 손을 본다. 그런 상상을 처음 품었던 심장을 생각한다. 그들이 내 눈길과 마주치고 그 행위가 내 생각을 온통 사로잡을 그 순간만을 갈망한다. - P301

몇 년 전, 이 세계가 담은 심상들이 처음 내게 열렸을 때, 여름의 명랑한 온기를 느끼고 바스락거리는 잎사귀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내게 이들이 전부였을 때는 죽기 싫어 흐느꼈을 텐데. 죽음은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다. 범죄에 더럽혀지고 쓰디쓴 회한에 갈기갈기 찢긴 내가 죽음이 아니라면 어디서 휴식을 찾겠는가?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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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려움들을 꺾고, 몇 달 안에 받기로 마음먹은 심판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가끔은 내 생각이 이성의 고삐를 풀어버리고 낙원의 벌판을 헤매며, 내 감정에 공감하고 우울할 때 기분을 돋워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감히 상상해보도록 내버려둘 때도 있었다. 그들의 천사 같은 얼굴들이 숨쉬며 위안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모두 덧없는 꿈이었다. 내 설움을 달래주고 내 생각을 공유해줄 이브는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아담이 조물주에게 했던 청원이 기억났다. 그러나 내 조물주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저버렸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그를 저주했다. - P175

저주받을, 저주받을 창조자! 어째서 나는 살았던 것인가? 어째서 바로 그 순간, 당신이 그렇게 방탕하게 붙인 존재의 불꽃을 꺼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절망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고 비명소리와 불행을 탐닉할 수도 있었다.
밤이 내리자 나는 은신처에서 나와 숲속을 헤맸다. 이제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사라져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으로 괴로움을 분출 했다. 마치 올가미를 부수고 나온 야생동물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수사슴처럼 민첩하게 숲속을 횡행했다. 오! 그날 밤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차가운 별들이 조롱하듯 빛났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머리 위에서 가지를 흔들어댔다. 가끔 새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쥐죽은듯 고요한 사위를 뚫고 터져나오곤 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악마의 수장처럼 내 안에 지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주위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나서 주저앉아 그 폐허를 만끽하고 싶었다. - P182

나는 남은 시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축사 속에서 멍하니 보냈다. 보호자들은 떠났고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처음으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이 내 가슴을 채웠고, 나도 굳이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격류에 몸을 맡기고 상해와 죽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친구들, 드 라세의 온화한 목소리, 아가타의 부드러운 눈빛과 아라비아 여인의 섬세한 미모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솟구치는 눈물이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그러나 새삼 저들이 나를 저버리고 푸대접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분노가 다시 돌아 왔다, 격렬한 분노가. 차마 인간을 해칠 수 없어 사나운 분노를 무생물에 풀었다. - P185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 P187

인간의 얼굴과 마주칠까 두려워 밤에만 여행했다. 사방에서 자연이 쇠락했고, 태양은 열기를 잃었다. 내 주위로 비와 눈이 내렸다. 힘차게 흐르던 강물은 얼어붙었다. 땅 표면은 딱딱하고 차갑고 헐벗어, 도무지 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대지여! 내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에 얼마나 자주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른다! 본성의 온유한 기질은 사라지고, 내면은 온통 울분과 원한으로 화했다. - P187

이것이 내가 베푼 자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했는데, 보답으로 살과 뼈가 박살나는, 상처의 참담한 고통에 뒹굴어야 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내게 찾아왔던 친절과 온정의 감정은 사라지고 지옥의 분노와 앙다문 이빨만 남았다. 고통에 격앙된 나는 전 인류에 대한 영원한 증오와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상처의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맥박이 멈추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 P189

내가 견뎌야 하는 고초는 이제 찬란한 태양이나 부드러운 봄의 산들바람도 덜어줄 수 없었다. 기쁨은 모두 내 쓸쓸한 신세에 모욕을 가하는 조롱에 불과했고, 내 팔자에 환희를 만끽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한층 고통스럽게 실감시킬 뿐이었다. - P189

박수를 치며 나는 외쳤다. ‘나 역시 절망 을 창출할 수 있다. 내 숙적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야. 이 죽음이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줄 테고 천여 개의 다른 불행들이 그를 괴롭히고 파멸시킬 것이다.‘ - P191

며칠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계속 찾아갔다. 가끔은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또다른 때는 인간 세상과 번뇌를 영원히 떠나리라는 다짐 때문에 말이다. 마침내 나는 산맥 쪽으로 정처 없이 흘러가서 거대한 산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오로지 당신만이 만족 시켜줄 수 있는 불타는 정념으로 괴로워했다. 당신이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결코 당신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 내야 한다. - P192

"거절하겠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문을 해도 내 동의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의 눈에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네놈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창조한다면, 둘이 합심하여 악행을 저질러 세상을 참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꺼져라! 나는 이미 대답했다. 고문을 해도 좋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P194

인간의 감각은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 P194

오!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딱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다오! 나도 내가 다른 존재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다오! - P195

어떤 유대도 사랑도 가질 수 없다면, 내 몫은 오로지 증오와 악뿐이다.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면 내 범죄의 원인은 없어져버리고 나는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사물이 될 것이다. 내가 저지른 악행들은 억지로 견뎌야 했던 지긋지긋한 고독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러니 동등한 존재와 함께 살게 된다면 미덕들도 당연히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내가 지각 있는 존재의 애정을 느낄 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소외되어 있지만 존재와 사건의 사슬과도 이어질 것이다. - P197

며칠을 나른한 권태 속에서 보내며 헤아릴 수 없는 장거리를 횡단한 후,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이틀 동안 클레르발을 기다렸다. 그가 왔다. 아,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던가! 그는 새로운 풍광 하나하나에 생생하게 반응했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기뻐했고, 해가 뜰 때는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새날을 시작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풍경의 색채와 하늘 모습을 내게 가리켜 보였다. "산다는 건 이런 거야." 그가 외쳤다. "지금 나는 존재를 만끽하고 있네! 하지만 내 친구 프랑켄슈타인, 자네는 어째서 의기소침하고 슬픔에 젖어 있나?"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음침한 생각에 빠져 저녁 별이 지는 것도, 라인강에 비치는 황금빛 일출도 보지 못했다. 친구여, 당신은 클레르발의 일기를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내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감정과 기쁨을 담은 눈으로 풍경을 관찰했으니까. 비참한 인간쓰레기인 나는 저주에 쫓겨 즐거움으로 통하는 문을 모조리 닫아버렸다. - P208

나는 이제 한 그루 말라죽은 나무다. 번개가 내 영혼을 이미 유린했다. 나는 살아남아서 남들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스스로도 혐오스러운 망가진 인간성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어차피 이마저도 곧 스러져 없어질 테지만. - P217

시련이란 사람들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마저 그토록 무디게 만드는 법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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