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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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안에 다른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식대로 그 이야기를 알고 있던 것이다. 마치 한 권의 책에서 찢어낸 페이지들이 있고 그것을 순서에 상관없이 수천 번은 읽은 사람처럼, 나는 몇 년간 조각들을 수집했던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보았고 대화를 들었다. 부모님과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떤 주제가 갑자기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하고 다툼을 일으키는지 또 과거의 어떤 이름이 그들을 슬프게 하고 감동을 주는 위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를 하나로 조합해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 P175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름은 마치 눈을 녹이듯 기억을 지워버리지만 빙하는 아득한 겨울의 눈이자 잊히지 않으려는 겨울의 기억이라고.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한 명은 도시에서 20년을 같이 살았고 그 후 10년은 인연을 끊고 지냈던 낯선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산에서 보는 아버지였다. 언뜻 보았지만 더 깊이 알게 된 사람이었고, 내 뒤를 따라 산길을 걷던, 빙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아버지는 내게 재건이 필요한 폐허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첫번째 아버지는 잊고 두 번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 P184

"그러면 넌 뭘 하려고 태어났어?"
"산사람이 되려고."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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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곳이 겨울에는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 그가 나에게말했다. "눈밖에 없어."
"눈을 보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그 눈이 바로 거기 있었다. 이 눈은 해발 3천 미터에 있는 협곡의 꽁꽁 언 눈이 아니었다. 신발로 파고들어 발을 적시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눈이었다. 발을 들면 발자국 안에 뭉개진 8월의 꽃이 보이는 것이 묘했다. 눈은 거의 발목까지 쌓였지만 오솔길의 모든 흔적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매 걸음마다 덫을 숨길수 있을 만큼 눈은 관목과 구덩이, 돌을 덮었고 눈 위를 걷는법을 몰랐던 나는 브루노만 쫓아가며 그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가 어떤 본능 혹은 기억을 따라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뒤만 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 P121

그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아침마다 짐을 나르던 당시에 그의 어머니를 자주 만났다. 그녀는 안장을 고정시키고 노새의 옆구리에 연장이나 판자를 매달고, 또 노새가 나아가지 않으려고 할 때 유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돌아온 것과 본인의 아들과 함께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본 그녀는 우리의 인생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다른사람들은 마치 계절이 지나듯 그녀 곁에 잠시 머물다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든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 P162

"대들보는 크기가 어느 정도여야 하고 간격은 얼마나 두어야 하는지, 어떤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야 좋을지. 전나무는 부드러운 나무라서 적합하지 않아. 낙엽송은 그보다 견고한 나무야. 너희 아버지는 내가 그렇다고 하는 말로는 성에 차지 않았어. 늘 모든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지. 전나무는 그늘에서 자라고 낙엽송은 양지에서 자라거든. 햇빛은 나무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늘과 물은 나무를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나무는 대들보로 적합하지 않아."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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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어느 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냐에 매혹될 수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적어놓은 글에 심취해서 이탈리아 알프스 클럽 안내서를 일기 마냥 다시 읽었고 한 발 한 발 오솔길을 되짚어가는 듯한 착각 에 빠져들었다. ‘풀로 뒤덮인 험준한 절벽을 타고 버려진 목장 까지 올라가며‘, ‘여기서부터 자갈길과 일부 남은 만년설을 따라 계속 나아가며‘, ‘표시된 계곡 근처에 솟아 오른 산봉우리로 향하기 위해‘. 그러는 사이 내 다리에는 핏기가 사라졌고 긁힌 자국과 까진 상처가 아물었으며 쐐기풀로 인한 가려움과 맨살에 느껴지는 여울의 냉기,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가 지나고 이 불이 주는 편안함이 잊혔다. 이 정도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겨울의 도시에는 없었다.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게 하는 필터 뒤에서 도시를 바라보았고, 하루에 두 번씩 지나쳐야 하는 안개같이 뿌연 사람들과 자동차뿐이었다. 창밖으로 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라나에서의 일상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 흔자 지어냈거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발코니에서 새로운 빛 조각, 도로의 차선 사이의 잔디에서 새싹 하나가 몸부림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밀라노에도 봄이 찾아왔고 그리움은 그곳으로 돌아갈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 P79

나는 그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믿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내가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을 거리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나쁜 짓이란, 무모한 짓이나 바보 같은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다른 의미의 위험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외출을 허락하면서 금지나 당부의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P81

한때 지하 석탄고가 있었던 가장 메마른 층 바로 아래의 땅은 아직도 석탄의 색을 띠었다. 숲은 발굴 흔적과 쌓아올린 더미, 폐물로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고 죽은 언어의 기호라도 되는 듯이 브루노가 나를 위해 해석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과 더불어 표준어보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되는 방언을 가르쳐주었다. 마치 책 속의 추상적인 언어를 산에서는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사물의 구체적인 언어로 대체해야 하는 것 같았다. 낙엽송은 브레가, 붉은 전나무는 페차, 쳄브라 소나무는 아룰라이고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돌출된 절벽은 바르마 였다. 돌 Petra은 베리오이자 나, 피에트로였다. 나는 이 이름에 무척 애착을 느꼈다. 모든 개울은 계곡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발레이라 불렸고, 모든 계곡은 성격이 반대인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햇빛에 잘 드는 아드레이 양지 바른 비탈면 이고 이곳에는 마을과 들판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습하고 그늘진 앙베르로 숲이 있고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이 둘 중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그늘진 경사면이었다. - P82

무슨 말이 이럴까 나는 생각했다. ‘무난하다‘라는 단어를 누가 선택한 걸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브루노에게는 무난함이란 없었다. - P87

나는 열네 살 된 아들 피에트로와 함께 이곳에 왔다. 선두 등반가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얼마 후면 아들이 선두에서 나를 이끌게 될 테니까.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가장 멋진 대피소에서 보낸 날들을 기억하며 떠나겠다. 서명: 조반니 과스티

글을 읽고 나는 감동받거나 자랑스럽지 않고 짜증이 났다. 뭔가 가식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에서와는 다른, 산의 수사법이었다. 산 위가 천국이라면 왜 우리는 여기에 살지 않는 걸까? 산에서 나고 자란 한 아이를 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걸까? 도시가 그렇게 진절머리가 난다는데 왜 구태여 아버지를 우리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일까?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묻고 싶었다. 타인의 인생에 무엇이 이로운 건지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째서 못 하는 건가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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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우리가 함께 산을 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산에 대한 나의 대단한 열정이 처음 발현한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아직 잠자리에 있던 시각, 아버지는 부츠를 신고 집을 나서려다 따라나설 채비를 마치고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침대 위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실제 내 나이인 예닐곱 살보다 훌쩍 자란 모습이어서 아버지는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장차 변화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 아들을 암시하는 것이자 미래의 환영이었다. - P22

나는 몇 가지 명확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 첫 번째 규칙은 멈추지 않고 리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말하지 않기이고 세 번째는 갈림길이 나오면 항상 오르막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 P52

겨울 산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평온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에 대해, 혹은 아래쪽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을 피해 위쪽으로 도피한다는 그의 철학에 따르면 가벼움의 계절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일하는 시기, 평지에서 생활하는 시기 그리고 우울한 시기인 중력의 계절을 따라야 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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