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도 어느 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냐에 매혹될 수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적어놓은 글에 심취해서 이탈리아 알프스 클럽 안내서를 일기 마냥 다시 읽었고 한 발 한 발 오솔길을 되짚어가는 듯한 착각 에 빠져들었다. ‘풀로 뒤덮인 험준한 절벽을 타고 버려진 목장 까지 올라가며‘, ‘여기서부터 자갈길과 일부 남은 만년설을 따라 계속 나아가며‘, ‘표시된 계곡 근처에 솟아 오른 산봉우리로 향하기 위해‘. 그러는 사이 내 다리에는 핏기가 사라졌고 긁힌 자국과 까진 상처가 아물었으며 쐐기풀로 인한 가려움과 맨살에 느껴지는 여울의 냉기,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가 지나고 이 불이 주는 편안함이 잊혔다. 이 정도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겨울의 도시에는 없었다.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게 하는 필터 뒤에서 도시를 바라보았고, 하루에 두 번씩 지나쳐야 하는 안개같이 뿌연 사람들과 자동차뿐이었다. 창밖으로 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라나에서의 일상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 흔자 지어냈거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발코니에서 새로운 빛 조각, 도로의 차선 사이의 잔디에서 새싹 하나가 몸부림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밀라노에도 봄이 찾아왔고 그리움은 그곳으로 돌아갈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 P79
나는 그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믿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내가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을 거리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나쁜 짓이란, 무모한 짓이나 바보 같은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다른 의미의 위험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외출을 허락하면서 금지나 당부의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P81
한때 지하 석탄고가 있었던 가장 메마른 층 바로 아래의 땅은 아직도 석탄의 색을 띠었다. 숲은 발굴 흔적과 쌓아올린 더미, 폐물로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고 죽은 언어의 기호라도 되는 듯이 브루노가 나를 위해 해석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과 더불어 표준어보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되는 방언을 가르쳐주었다. 마치 책 속의 추상적인 언어를 산에서는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사물의 구체적인 언어로 대체해야 하는 것 같았다. 낙엽송은 브레가, 붉은 전나무는 페차, 쳄브라 소나무는 아룰라이고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돌출된 절벽은 바르마 였다. 돌 Petra은 베리오이자 나, 피에트로였다. 나는 이 이름에 무척 애착을 느꼈다. 모든 개울은 계곡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발레이라 불렸고, 모든 계곡은 성격이 반대인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햇빛에 잘 드는 아드레이 양지 바른 비탈면 이고 이곳에는 마을과 들판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습하고 그늘진 앙베르로 숲이 있고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이 둘 중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그늘진 경사면이었다. - P82
무슨 말이 이럴까 나는 생각했다. ‘무난하다‘라는 단어를 누가 선택한 걸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브루노에게는 무난함이란 없었다. - P87
나는 열네 살 된 아들 피에트로와 함께 이곳에 왔다. 선두 등반가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얼마 후면 아들이 선두에서 나를 이끌게 될 테니까.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가장 멋진 대피소에서 보낸 날들을 기억하며 떠나겠다. 서명: 조반니 과스티
글을 읽고 나는 감동받거나 자랑스럽지 않고 짜증이 났다. 뭔가 가식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에서와는 다른, 산의 수사법이었다. 산 위가 천국이라면 왜 우리는 여기에 살지 않는 걸까? 산에서 나고 자란 한 아이를 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걸까? 도시가 그렇게 진절머리가 난다는데 왜 구태여 아버지를 우리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일까?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묻고 싶었다. 타인의 인생에 무엇이 이로운 건지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째서 못 하는 건가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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