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뵈에게는 역시 적당한 호텔의 작은 방을 구해줘야겠다. 일주일에 10프랑 정도면 꽤 괜찮은 옥탑방을 빌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느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애를 태우기로 했다. 나는 나 자신이 느뵈에게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의식했다. 언제쯤 구원의 손길을 뻗어 줄지 모르는 신인 것이다.
느뵈의 얼굴이 불안으로 창백해졌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뭔가 난처한 일이 생겨도 체면을 차릴 줄 안다. 하지만 느뵈는 가난뱅이라 그런기술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은 자고 있는 사람의 손이 파리에 반응하듯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불안하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나쁜 짓일까. 이렇게느리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건 나중에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다. 만약 잠자리를 구해 줄 생각이 없었다면, 그를 애태우며 즐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2

유쾌하게 한잔했다. 그네를 탄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걸 느꼈다. 아무런 저의도 없는 정말로 좋은 사람 말이다. - P103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마치 타인의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뿌옇게 흐려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내 허리춤 높이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스쳐지나갔다. 귓속에 솜방망이가들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멀게만 들린다. 택시 엔진 따위는 뜨거운 고철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발밑의 보도가 흔들려 마치 체중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거리가 온통 불빛으로 넘쳐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행복했다. ‘난 행복하다!‘ 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느뵈와 나눠 갖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가난하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너무나 여유로운 편인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어,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해하는 이처럼 고귀한 환희가 또 있겠는가! - P104

내 마음은 친절함의 보고이다. 그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한순간의 욕정을 채우고 만 것이다. 누군가에게 친절히 대해주면 언제나 항상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만다. 이 땅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 P110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은 역의 출입문이 계속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유리를 깐 바닥은 미끈거려 마치 전나무 잎이 쌓인 숲길을 걷는 것처럼 발밑이 미끄럽다.
매점의 습기찬 창문에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틈새로 들이치는 센 바람에, 사람들은 신문을 펼쳐 들고 읽는데 애를 먹었다. 매표소 안쪽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철도 직원은 거리의 경찰관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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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아, 군대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장소도 기억 속에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다. 어렸을 적에 배운 노래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자주 불러대면 추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의 일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회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추억은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는 걸로 족하다.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서랍이 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6

오후 5시였다. 거센 바람에 코트가 마치 스커트처럼 나부꼈다. - P90

일꾼 한 명이 거룻배에 연결된 판자 위를 튕겨 오를 듯한 발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마치 침대 매트리스 위를 걷고 있는 듯했다. - P91

주위 풍경이 센강에 수직으로 비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바다표범이 헤엄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수면은 쉬지 않고 흔들렸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반대편 강가에 있는 집들이 수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네치아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P96

나는 죽기 싫었다. 게다가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끌려서 억지로 죽기는 싫었다. 자살이란 완벽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자살은 보통의 일반적인 죽음과는 다르니까. - P96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 원인은 언제나 나의 고독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갈망한다. 다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기회가 없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말하자면 한겨울밤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와 비슷한 처지다. 사람들은 그거지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거지를가장해 돈을 구걸하려는 사람이 하도 많아, 이미 모두들이력이 나고 만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리 난간에 팔을 괸 채 무료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있어도 어차피 시시한 연극이려니 생각하고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만다. 사실 그렇긴 하다. 연극이라는 걸 꿰뚫어 본 사람들이 정확히 본 것이다.
다만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한밤중에 다리 위에서 구걸을 한다거나, 난간에 기대 우울한 척을 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서글픈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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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한동안 생면부지의 그 남자 생각을 계속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도 자기가 나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신경 쓰고 있을까?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남길 원할 것이다. - P67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컬이 있는 구불구불한 머리가램프 불빛 아래에서 타오르는 듯 물결쳤다. 나는 맥이 탁 풀린 나머지 멍하니 문 앞에 멈춰 섰다. 도망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하기위해 문 앞으로 걸어왔다.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비야르의 어깨를 툭툭 쳐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손을 슬그머니 집어넣으며 방금 전의 지나친 용기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튼 소리를 내어 웃고 싶었다.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야르의 여자 친구는 절름발이였던 것이다. - P69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떨어진 빗방울 위에 또 다른 빗방울이 겹쳐 떨어지지는 않았다. - P74

오후 3시였다. 하루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이다. 일상의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도 나는 즐거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주 작고 하찮은 일조차 생기지 않는다. - P76

니나를 만나러 가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조금씩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럴 용기는 있었다. 왜냐하면 여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나의 소심함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리 머뭇거려도, 그런 점이 오히려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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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 P252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P264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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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 쪽임이 분명한 자리에서 붉은 병을 집어 들었다. 그 병은 길쭉한 직사각형에 크기가 꽤 컸다. 병에 굵게 쓰인 붉고 희고 파란 글씨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3배 더 큰 용량
당신의 존엄만은 남겨 두고
남자의 향기로 무장하라.
더러움을 차버리고
악취를 박살내라.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내 아들이 여기서 사워를 하는 건지, 전쟁을 준비하는 건지?
나는 여자아이들의 가날프고 반짝이는 분홍 병들 중 하나를 들어 보았다. 그 병에는 나를 향해 짖어대던 군대식 명령문들 대신 필기체로 속삭이듯 흘려 쓴, 뜬금없는 형용사들이 있었다. 매혹적이고 윤기 있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반짝이고 도발적이며 가볍고 매끄러운. 동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해야 하는 행동은 없고, 그저 그렇게 보여야 하는 모습들의 목록만 있었다. - P29

샤워를 하는 것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정말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당연히 아니었다. 21세기인데도 남자 아이들은 여전히 진정한 남자는 크고 거칠고 폭력적이며, 참을 성이 없고 여성성에 혐오감을 가지며, 여자와 세상을 정복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고 배우고 있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진정한 여자는 조용하고, 예쁘고 작고 수동적이며, 정복당할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어야만 하는 대상임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은 여전히 아침에 옷을 차려입기 전에 그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커다란 존재다. 대량 생산된 이 딱딱하고 작은 병 속에는 자신을 육여넣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결국은 어느새 거기에 맞춰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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