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수세기 후 스페인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MiguelHernández)가 말에 대한 자신의 강박을 밝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말을 사랑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말이 지닌 힘, 말이 잘못 쓰일 수도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 P149

헤시오도스는 더 이상 귀족정치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서 모두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아가멤논이 혼자 챙긴다며 비난한 못생긴 테르시테스의 후손이다. - P150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게 말하기를, 수 세기 전 주사위, 체커, 숫자, 기하학, 천문학, 문자를 창안한 이집트의 신 토트가 이집트의 왕을 찾아가 그 발명품들을 신하들에게 가르치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말을 옮겨본다. "그러자 이집트 왕 타무스가 글쓰기가 어떤 효용이 있냐고 묻자, 토트가 대답했다. ‘왕이여, 이 지식은 이집트인들을 더욱 현명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이다.‘ 그러자 타모스가 말했다. ‘토트 신이시여, 글의 아버지로서 그것의 장점을 말하시는군요. 글쓰기를 배우고 기억을 소홀히 하면 망각이 유발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책만을 신뢰하여 외부로부터 기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글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지혜의 외연입니다. 진정한 교육 없이 책을 이해하게 된다면 현자가 아니면서 현자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 P152

소크라테스는 대담자가 승복한 상황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글로 쓰인 말은 제가 똑똑한 양 그대와 얘기하는 것 같지만,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뭔가를 물어보면 글은 그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책은 스스로를 변론할 능력이 없다" - P152

2011년 사회심리학 선구자인 대니얼 웨그너(Daniel Wegner)는 한 실험에서 지원자들의 기억력을 측정했다. 그들 중 절반은 보존할 데이터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몰랐다. 그런데 정보가 컴퓨터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정보를 익히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이런 기억의 이완 현상을 ‘구글 효과‘로 부른다. 우리는 원 데이터가 아니라 그 데이터가 있는 위치를 기억하려고 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은 그 어느 때보다 많다. 그러나 이는 거의 대부분 우리의 기억 밖에 저장되어 있다.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게으른 기억은 정보를 저장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주소록이 되는 건 아닌가? 알고 보면 우리가 구술 시대의 기억력 뛰어난 선조들보다 무지한 건 아닌가? - P153

플라톤은 책에 대한 스승의 평가절하를 근거로 글을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비판을 그의 책을 통해 읽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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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둘러본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러시아산 가죽 소파에 앉은 마리아가 텅 빈 정원을 향해 열린 쪽문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한 손을 라디오 위에 올린 채, 미동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게레가 자신을 보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마리아가 꾸민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무방비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드문 일이면서, 그와 함께 있을 땐 짓는 법이 없는 표정이었으므로 어쩌면 비밀스러운 모습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는 좀더 슬프고 상념에 젖어 보였다. 공허한 모습이었다. - P122

걸어가면서 앞치마를 벗어 벽난로 모서리에 걸어둔 그녀가 벽장에서 유리잔 하나와 식전에 주로 마시는 드라이 마티니 한 병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랐다. 상념에 잠겨, 곧 한 잔을 더 따랐다. 그녀는 잔을 들고서 가스레인지로 다가갔다. 마지못해 한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서 나무 스푼으로 냄비를 휘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벽을 따라 못으로 고정해둔 할인마트의 거울로 이어지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차갑고 조금은 적대적인 얼굴로 자신을 대면했다. 스푼을 내려둔 손이 턱으로, 머리카락으로 올라갔다. 간단한 동작으로 풍성하게 볼륨을 만들어보았지만, 거기엔 눈에 띄는 흥미도 열의도 없었다. 꼼짝하지 않고 아득히 머물러 있는, 권태와 무관심 그 자체인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오만한 눈꺼풀 아래 맑고 단단한 눈에서 너무나 둥글고 응축된 눈물이 아무런 전조 없이 연달아 솟아올랐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괴로움이 아닌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귓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 P131

게레는 어디선가 두려움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건 진실일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개가 그에게서 그런 냄새를 맡은 게 아닐까? 밤에, 홀로 침울한 방에서 옷을 벗으며 게레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팔과 어깨에 코를 갖다 대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피부에 서 식별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의 냄새 였다. 낮엔 그 저주받은 직위를 거부한 것 때문에, 저녁엔 그걸 받아들이려 했다는 이유로 그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이 수치심이란 것은 냄새는 물론이고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P157

그는 등나무집 문 앞의 고리버들 의자에 일광욕을 하며 토요일과 일 요일을 보냈다. 속옷 바람으로 때때로 《레키프》나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사둔 세네갈에 관한 책 따위를 던지며, 휘파람으로 그녀와 동시에 종적을 감춘 개를 불렀다. 이 번 주말엔 죄다 바다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촌티 나는 의자에 앉아 태양이 흉측한 구릿빛 문양을 새겨넣도록 내 버려둔 채 오지 않는 개를 부르는 사람은 이 동네에서 게레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는 이 불운 속에서 어떤 위안을, 심지어 기쁨까지 느끼고 있었다. - P159

그는 천천히 발을 돌렸다. 순간 밤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미풍에 흔들리는 밀밭, 광재 더미에 뒤섞인 운모의 희미한 빛 같은 것들이. 열흘 만에 처음으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터무니없는 느낌이지만 확실히, 어디에선가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정의가 혹독하고도 분명하게 응답을 보내온 것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우연히 골칫거리에서 벗어난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꼭 운명이 그의 편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이, 내면의 누군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펴주는 것만 같았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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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전장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자 그 아버지들이 아들보다오래 살게 된다. 어느 날 밤 트로이의 왕은 죽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으려고 적진으로 들어간다. 왕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왕을 동정한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우는이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죽은 자를 묻을 권리를 공유한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P110

율리시스는 아킬레우스와 달리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운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신이 될 수 있었으나 노쇠한 아버지와 성장한 아들, 그리고 나이 든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러 이타카로 돌아간다. 율리시스는 인위적인 행복보다는 진실한 슬픔을 원하는 인물이다. 칼립소가그에게 제안한 선물은 일종의 신기루이자, 환각을 일으키는 약이 만들어낸 꿈, 혹은 평행현실에 가깝다. 율리시스의 결정은 아킬레우스를 움직인 명예라는 코드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지혜를 보여준다. 순박하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인간의 삶이 더욱 살아볼 만한 가치가있다는 지혜다. 젊음은 흩어지고 육신이 말라가며 힘을 잃어갈지라도 말이다. - P111

서사시를 읊는 시인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두 개의 세계, 즉 현실 세계와 전설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시인들은 시를 낭송하며 과거로 옮겨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글씨를 사용하지 않던, 따라서 역사가 없는 시대에 시인들은 뼈와 살로 된 살아 있는 책이었다. 그들은 모든 경험, 축적된 지식과 삶이 망각에 빠지지 않도록 붙드는 존재였다. - P117

모든 사회는 속되기를, 그리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사람의 기억을 연장하고 과거가 영원히 사라지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에도 시는 여전히 시인의 입을 통해 태어나고 여행했다. 그러나 몇몇 시인들이 문자를 배우고 미래를 위한 여권처럼 파피루스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무모한 행위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인지한 시인도 있었을 것이다. 시를 글로 쓴다는 것은 텍스트를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말은 책에서 결정체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여러 버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버전을 골라야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노래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글은 그 노래를 석화할 터였다. 따라서 하나의 버전을 골라낸다는 것은 나머지 버전을 희생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종 버전을 파괴와 망각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었다. - P118

연구자마다 호메로스의 정체를 다르게 파악한다. 어떤 이는 글을 모르는 고대의 시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결정판을 만든 작가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두 작품을 마지막으로 수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필사본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필경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책이라는 발명품에 미혹된 편집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문화에 초월적인 영향을 준 작가가 환영일 수도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 P119

어머니는 침대맡에 앉아서 매일 밤 책을 읽어주셨다. 어머니는 시를 낭송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거기 매료된 청중이었다. 장소, 시간, 표정, 고요함은 늘 같았다. 일종의 친근한 의례였다. 어머니가 읽기를 마친 곳을 찾으며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려고 앞서 읽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부드러운 바람 같은 이야기가 그날의 모든 걱정과 밤의 두려움을 없애줬다. 독서의 시간은 내게 작고 잠정적인 천국과 같았다. 나는훗날 모든 천국은 그렇게 소박하고 일시적이라는 걸 이해했다.
어머니의 목소리.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폈다. 뱃머리에 부딪히는 물소리, 눈을 밟는 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미지의 걸음 소리, 늑대의 울음소리, 문밖에서 들리는 속삭임. 어머니와 나는 서로 다른 장소에, 서로 다른 차원에 있으면서도 하나가 된 듯했다. 침실의 시계가 반 시간 동안 째깍대는 사이에 수년에 이르는 이야기가 흘러갔으며 많은 사람과 친구와 염탐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P120

읽는다는 건 주술과도 같았다. 책 속에 있는 이상한 검은 벌레를 읽어내야 했다. 그 벌레들은 거대한 개미 같았다. - P121

헤블록에 따르면, 뮤즈가 글쓰기를 배우면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새로운 텍스트들은 무한히 다양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기억의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저장고는 독점적 청각에서 물질적 자료로 변했으며, 따라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사방으로 확장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기억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주제와 관점도 자유로워졌다. 전통적 형식과 아이디어에 유착된 구전성과 달리, 문자로 된 글은 독자에게 미지의 지평을 열어줬다. 독자가 고요한 상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사색할 시간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기발한 주장, 개인적 목소리, 전통에 대한 도전이 담겼다. - P127

이 책을 쓰고 있는 나는 호메로스를 떠올린다. 호메로스를 뒤이은 무수히 많은 떠돌이 음유시인들 말이다. 그들은 궁전에서 부자들을 위해 노래하기도 했고 마을 광장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노래했다. 당시 시인은 등에 악기를 메고 닳아빠진 신발로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며 해가 지면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방랑 예술가들, 뮤즈가 보낸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노래로 세상을 이야기한 보헤미안 현자들, 반은 지식인이고 반은 광대인 그들이 작가의 조상이다. 그들의 시는 산문보다 앞섰으며, 그들의 음악은 말 없는 독서보다 앞섰다.
구술성에 수여된 노벨상 가장 오래된 것이 미래가 될 수도 있다. - P132

책과 관련된 나의 모든 경험은 내 어린 시절의 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는 하나의 본질적인 모티브가 있다. 바로 큰 소리로 글을 읽으면서 문학을 접했다는 것. 그건 마치 문자라는 현재와 구술이라는 과거, 그 모든 시간이 만나는 교차로 같았다. 또 그것은 단 한 명의 관객이 있는 작은 연극이자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기도와도 같았다. 누군가 책을 읽어주며 당신이 기뻐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삶이라는 전투 속에서의 휴전이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술자와 책은 하나의 목소리로 용해된다. 밤의 어스름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당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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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거야. 음악도 좋고 이 텅 빈 거리도 아름다워. 우린 우리의 예쁜 집으로 돌아가 함께 잠들 거고. 그게 중요한 거지?‘
그가 부드럽게, 단단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P112

말라붙은 피딱지가 코를 틀어막고 있고 여전히 옆 구리가 쑤시는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 시간에 할 짓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저 불쌍한 놈들과 말이다. 그는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자조하면서, 방금 전까지 문 앞에서 두드려 맞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우쭐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또다시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이번만은 자신이 뭘 할 지, 왜 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댈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홀가분했다. 그는 생생한 도취감을, 일종의 평온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의 감각임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음에도 알았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자유가 발길질당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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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피부로 된 자신의 책에 무엇을 쓰는지 궁금했다.
한번은 타투이스트를 만나 그의 직업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부분 특정인이나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문신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영원히‘가 너무나도 짧으며, 통계적으로 봤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표현이나 노래 가사나 시를 새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것이 상투적인 문구나 잘못된 번역 혹은 별 의미 없는 글일지라도, 몸에 새기고 나면 자신이 유일하고 특별하며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문신은 마술적인 생각의 잔존이자 말이 지닌 아우라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 P96

피부와 말은 크리스토퍼 놀런이 감독한 영화 「메멘토」의 핵심이다. 주인공 레너드는 트라우마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에 대한 기억도, 지난달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준 비극적 사건 이후의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상실증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자신의 부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는 음모와 조작과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만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자신에대한 필수 정보를 손, 팔, 가슴에 문신으로 남기는 것이다. 기억상실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문신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게 된다. 진실은 인물들의 거짓말 속에서 흩어져버리고 우리는 레너드를의심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정신세계처럼 조각난 퍼즐 구조로 되어 있다. 또 간접적으로, 이 영화는 기억의 확장이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유일한 증인(불완전하고 모호하지만 대체할 수 없는)인 책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 P97

장갑을 끼고 두 손에 양피지를 들던 그 순간, 인간의 잔인함이 떠올랐다. 오늘날 좋은 품질의 가죽옷을 만들려고 새끼 바다표범을 몽둥이로 내리쳐 죽이듯이 중세에도 가장 비싼 필사본은 극도의 잔학함을 요구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주 하얀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양피지가 있는데, 바로 ‘송아지 가죽‘이다. 갓 태어난 새끼나 어미의 배 속에서 유산된 태아의 가죽이다. 과거의 말이 이 시대까지 이를 수 있도록 수 세기 동안 피 흘린 동물들을 생각했다. 정교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양피지 속에는 상처받은 가죽과 그들이 흘린 피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진보와 아름다움이 고통과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그런 모순적 행동 속에서 무수한 책들이 사랑과 선과 동정에 대한 현자들의 말을 세계로 퍼트리는 데 활용됐다. - P100

역사가 피터 왓슨(Peter Watson)의 계산에 따르면, 가죽 한 장의 크기를 50제곱센티미터로 가정하고 150쪽의 책을 만들려면 열 마리에서 열두 마리의 가축이 필요했다. 또 다른 전문가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성경을 만드는 데 100장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양피지 사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니 책을 소유한다는 건 오랫동안 귀족과 종교인들의 절대적인 특권이었다. 한 서기는 13세기 성경에 재료의 결핍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 P101

호메로스의 작품은 대중이 즐기는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꿈과 신화가 표현되어 있는 책이기도 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대와 세대를 거치며 역사적 사건을 얘기해왔으며 모든 세대의 기억속에 흔적을 남겨왔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설화하는 경향이있다. 21세기에 영웅적 무훈을 창작한다는 건 언뜻 원시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문명은 과거의 전설에 자긍심을 느끼기 위해 영웅을 신성화한다. 그런 신화적 세계를 만들어낸 마지막 국가는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서부극은 오늘날의 전 지구화된 세계를 향한 환각을 만들어냈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역사의 신화화에 관해 고찰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문기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여긴 서부입니다. 서부에서는 전설이 사실이 되면, 전설을 인쇄합니다." 그리운 시절(원주민 말살의 시대, 내전, 골드러시, 카우보이들의 권력, 무법의 도시, 라이플총에 대한 상찬, 그리고 노예제)이 실제로는 영광스럽지 않았다는 건 중요치 않다. 헬레니즘시대의 위대한 사건인 트로이전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먼지투성이 서부의 풍경, 경계 지대, 개척정신, 정복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를 뒤흔들듯 호메로스는 전장과 베테랑들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로 그리스인들을 열광하게 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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