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피부로 된 자신의 책에 무엇을 쓰는지 궁금했다.
한번은 타투이스트를 만나 그의 직업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부분 특정인이나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문신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영원히‘가 너무나도 짧으며, 통계적으로 봤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표현이나 노래 가사나 시를 새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것이 상투적인 문구나 잘못된 번역 혹은 별 의미 없는 글일지라도, 몸에 새기고 나면 자신이 유일하고 특별하며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문신은 마술적인 생각의 잔존이자 말이 지닌 아우라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 P96

피부와 말은 크리스토퍼 놀런이 감독한 영화 「메멘토」의 핵심이다. 주인공 레너드는 트라우마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에 대한 기억도, 지난달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준 비극적 사건 이후의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상실증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자신의 부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는 음모와 조작과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만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자신에대한 필수 정보를 손, 팔, 가슴에 문신으로 남기는 것이다. 기억상실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문신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게 된다. 진실은 인물들의 거짓말 속에서 흩어져버리고 우리는 레너드를의심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정신세계처럼 조각난 퍼즐 구조로 되어 있다. 또 간접적으로, 이 영화는 기억의 확장이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유일한 증인(불완전하고 모호하지만 대체할 수 없는)인 책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 P97

장갑을 끼고 두 손에 양피지를 들던 그 순간, 인간의 잔인함이 떠올랐다. 오늘날 좋은 품질의 가죽옷을 만들려고 새끼 바다표범을 몽둥이로 내리쳐 죽이듯이 중세에도 가장 비싼 필사본은 극도의 잔학함을 요구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주 하얀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양피지가 있는데, 바로 ‘송아지 가죽‘이다. 갓 태어난 새끼나 어미의 배 속에서 유산된 태아의 가죽이다. 과거의 말이 이 시대까지 이를 수 있도록 수 세기 동안 피 흘린 동물들을 생각했다. 정교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양피지 속에는 상처받은 가죽과 그들이 흘린 피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진보와 아름다움이 고통과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그런 모순적 행동 속에서 무수한 책들이 사랑과 선과 동정에 대한 현자들의 말을 세계로 퍼트리는 데 활용됐다. - P100

역사가 피터 왓슨(Peter Watson)의 계산에 따르면, 가죽 한 장의 크기를 50제곱센티미터로 가정하고 150쪽의 책을 만들려면 열 마리에서 열두 마리의 가축이 필요했다. 또 다른 전문가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성경을 만드는 데 100장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양피지 사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니 책을 소유한다는 건 오랫동안 귀족과 종교인들의 절대적인 특권이었다. 한 서기는 13세기 성경에 재료의 결핍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 P101

호메로스의 작품은 대중이 즐기는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꿈과 신화가 표현되어 있는 책이기도 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대와 세대를 거치며 역사적 사건을 얘기해왔으며 모든 세대의 기억속에 흔적을 남겨왔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설화하는 경향이있다. 21세기에 영웅적 무훈을 창작한다는 건 언뜻 원시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문명은 과거의 전설에 자긍심을 느끼기 위해 영웅을 신성화한다. 그런 신화적 세계를 만들어낸 마지막 국가는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서부극은 오늘날의 전 지구화된 세계를 향한 환각을 만들어냈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역사의 신화화에 관해 고찰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문기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여긴 서부입니다. 서부에서는 전설이 사실이 되면, 전설을 인쇄합니다." 그리운 시절(원주민 말살의 시대, 내전, 골드러시, 카우보이들의 권력, 무법의 도시, 라이플총에 대한 상찬, 그리고 노예제)이 실제로는 영광스럽지 않았다는 건 중요치 않다. 헬레니즘시대의 위대한 사건인 트로이전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먼지투성이 서부의 풍경, 경계 지대, 개척정신, 정복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를 뒤흔들듯 호메로스는 전장과 베테랑들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로 그리스인들을 열광하게 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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