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하던 시대에는 책을 보관하는 일이 까다로웠다. 책의 재료가 손상되기 쉬웠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새로 사본을 만들 때마다 판본을 검토하고 이를 언급해둬야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현자들은 목록집에 있는 모든 책을 그렇게 관리할 수 없었고,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궁극의 리스트』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리스트가 예술사와 문학사의 일부분으로서 문화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백과사전과 사전에서 리스트의 정교한 형식을 볼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 즉 문헌 목록, 참고문헌, 차례, 색인, 장서목록, 사전 같은 것들을 통해 무한을 이해할수 있게 된다. - P199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현자들의 위대한 독창성은 과거에 대한 사랑에 있지 않다. 그들을 선각자로 만든 것은 잉크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따라서 망각의 위협에 놓인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메데이아』가 수 세기에 걸쳐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손에 이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저항을 일으키고, 때로 어떤 진실은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일깨우고, 우리의 가장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우리가 진보의 자녀라는 지위에 너무 오만해질 때마다 찬물을 끼얹어줄 수 있도록, 그 이야기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미래의 권리, 즉 우리의 권리를 숙고한 사람들이었다. - P200

폴란드 시인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ława Szymborska)의 「통계에 관한 기고문」도 빼놓을 수 없다. "100명 중에 모든 걸 아는 사람은 52명 / 발걸음마다 불안한 사람은 그 나머지 사람들 /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재빨리 도와줄 사람은 거의 49명 / 별도리가 없어서 늘 좋은 사람은 4명 혹은 5명 / 행복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많아봐야 20명대 / 악의 없는 사람이지만 집단으로 모이면 난폭해지는 사람은 분명 절반 이상 / 사정에 끌려다닐 때 잔인해지는 사람은 대략적으로도 알고싶지 않음 /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100명 / 현재로선 이 수치에 어떤 변화도 없을 것임." - P203

좋은 리스트란 나열된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리스트다.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세상의 특수성과 세부사항을 어루만지는 리스트다. 물론 연말인 지금은 블랙리스트에 넣어버리고 싶은 게 넘쳐나긴 하지만 말이다. - P203

페넬로페에게 강요된 침묵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내내 반복된 명령의 시작일 뿐이다. 예컨대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이자 전복적 사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끔찍한 일이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에는 공식적인 발언이 남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정치, 웅변, 문학의 영역은 남성의 것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여자와 외국인과 노예 등 대부분의 주민을 배제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 마치 1980년대 영국의 「예스, 미니스터」라는 시트콤 주인공이 "성별에 상관없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남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P209

메데이아는 아테네의 가정에 자리 잡은 분노와 고뇌에 대해 큰 소리로 외친다. "우리 여성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재산을 낭비하는 남편을 사서 우리 몸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최악 중의 최악이다. 남편과 헤어지면 추문의 대상이 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지루하면 집을 나가 즐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아이를 봐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집에 있어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서 자기네 가련한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한다고 한다." 메데이아는 감금과 모성에 맞서 싸우며 한 번 아이를 낳느니 차라리 세 번 전쟁을 치르겠다고 말한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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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제 책을 전시해 주시는 고마움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판매금은 책방 운영비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순간 무표정했던 내 얼굴이 미안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내가 파는 건 책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꿈이라고. 이런 사람들의 책을 소개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만 좀 무기력해! 하품 좀 그만하라고! - P67

단골손님 5호 사과 씨가 맥주를 사 들고 놀러 왔다.
- 책방지기 : 오랜만이다. 왜 책방에 자주 안 와요?
- 단골손님 : 저는 직장에서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그런데 여기 오면 가면을 벗은 솔직한 사람들을 만나요. 책 제작자와 책방지기를 만나고 자극을 받고 돌아가면 다음 날 출근해서 가면을 다시 쓰는 게 힘들어요.
- 책방지기 : 사과 씨, 나 책방에서 가면 쓰고 있어. 책방지기 감정노동자야.
책방도 일터다. 낭만보다는 전쟁터에 가까운. - P80

- 나도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내 책방만 잘 운영하면 되는데 다른 책방들이랑 자꾸 비교하게 돼. 나는 내 속도대로 내 방식대로 공간을 꾸려나가면 되는데 좋은 책방이 생기면 도태되어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상대적으로 나는 무능력해지거든. 어쩌면 이 바닥도 서바이벌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방도 결국엔 살아남아야 하거든.
이 모든 말을 속으로 삼키고 다음에 술 한잔하자며 친구와 헤어졌다. - P81

- 딸이 캐나다에 사는데 지금 임신을 했어요. 이 책을 사 오라는데 교보에도 없고 물어물어 여기에 왔어요.
- 아고, 이렇게 고생하신 걸 따님이 아셔야 할 텐데.
- 이런 걸 수고스럽다고 생각 안 해. 어렸을 때 자기랑 잘 못 놀아준 것, 서운한 것만 따지고.
- 원래 자식들은 부모님 고마운 건 기억 못 하잖아요. 섭섭한 것만 마음에 남고.
- 응, 우리 고향 말로는 그런 걸 싸가지 없다 그래. - P84

- 라면이 말이야, 옆에 사람이 맛있게 먹고 있으니까 나도 너무 먹고 싶은데 물이 너무 안 끓으니깐 조급하잖아요. 그런데 물은 100도에 끓어요. 99도에도 안 끓어. 물이 안 끓는다고 포기하거나 조급해하면 안 돼. 목표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전진하면 되는 거에요. - P84

추석이니까 오늘의 식사는 특별히 꼬치전이 담긴 편의점 추석 스페셜 도시락! 피노키오 책방 영원 님 것까지 두 개를 사기 위해 편의점 도시락코너에 도착하니 내 앞에 먼저 와있던 사람이 두 개 남은 스페셜 도시락을 사려고 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내 앞에 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영원 님이었다. 나와 나눠 먹으려고 도시락을 고르던 중이었단다. 이렇게 스페셜 도시락과 이웃사촌과 함께하는 정겨운 명절!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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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는 현실을 지속적인 긴장으로 설명했다. 그는 그것을 "전쟁", 혹은 대립적인 것들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밤과 낮, 각성과 수면, 삶과 죽음은 서로 변해가고, 오직 대립 속에서만 존재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이다.("질병은 건강을 지키게 해주고, 배고픔은 포만을, 노력은 휴식을 필멸의 불멸, 불멸의 필멸, 타자의 죽음으로 살아가고 타자의 삶으로 죽어가고.") - P171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 매료된 보르헤스는 이런 시를 썼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에페소스의 오후를 걷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요한 강가에 다다르게 된다. 그가 말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 그가 멈춰 선다. 그는 자기 또한 흘러가는 강임을 느낀다. 그는 그날 아침과 밤과 전날 밤을 돌이키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 - P172

헤라클레이토스의 논리에 따르면 힘의 균형에 발생한 사소한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 그러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희망은 언제나 타당하다. - P173

그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책을 파는 건 12온스 무게의 종이와 잉크와 풀을 파는 게 아니에요. 완전히 새로운삶을 파는 거지요. 사랑과 우정과 유머와 밤을 항해하는 선박들. 책에는 모든 게 있어요. 정말 좋은 책엔 천상과 지상이 있지요. 세상에나! 내가 책이 아니라 빵이나 고기나 빗자루를 파는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몰려나와 내 물건을 사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난 영원한 구원을 가지고 여기 있는 겁니다. 나는 그대들의 여리고 슬픈 영혼을 구원하러 온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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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대의 두 배에 가까운 인선의 그림자가 천장의 흰 벽지 위로 일렁이며 다가온다.
내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선 건 그 그림자가 멈추길 원했기 때문이다. 엎지른 먹처럼 번져와 내 그림자를 삼키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45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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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더미 위쪽 회벽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드리워진, 방금 밑동 아래 아마를 묻은 나무의 그림자다. 여러 사람의 팔처럼 소리 없이 흔들리는 그 형상을 바라보다가. 인선이 마지막 영화에서 스스로를 인터뷰했던 배경이 이 벽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햇빛 드는 회벽에 일렁이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거의 흡사했다.
인선이 그 영화를 만든 것은 이곳으로 내려와 살기 전이었으니 당시 건물은 아직 창고였을 거다. 인선의 어깨와 무릎, 희끄무레한 목선의 굴곡은 마치 잘못 끼어든 피사체처럼 화면 가장자리에 있었고,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벽 위로 저 그림자가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긴장을 느끼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인터뷰이가 방금 뱉은 말을 부인하며 내는 팔 같은, 힘껏 내밀었다가 돌연히 거두는 손길 같은 일렁임이 인터뷰의 흐름에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넣었다. - P156

어떵할 수가 이시냐. 억지로 끄성 올 방법이 어디 이시냐. 아이를 살려사주. 이 아이가 무신 죄가 이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0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아이처럼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든 인선을 향해 나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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