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까요?
질문을 하면서도 나 역시 그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막연히 내가 알고 있던 현규, 이전의 현규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까, 그런 마음과 동시에 이전의 현규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을 뿐이다. 이전의 현규, 원래 현규, 진짜 현규, 그런 게 있을까. 현규와 같이 살게 되면 그걸 알 수 있을까. 스물여섯 이전의 현규를 모르듯 지금의 현규 역시 나는 모르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의사들은 확정적인 대답을 잘 하지 않아요. 저 역시 기다려보자는 말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네요. MRI다, CT다, 환자들은 대단한 건 줄 알지만 결국 그것들이 찍어낸 영상은 그림자일 뿐이에요. 왜 판독이란 말을 쓰겠어요. 그림자를 더듬어 실체를 추측해보는 거죠. 명백한 실체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요. - P145

현규의 차 위로 농익은 버찌가 몇개 떨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이파리만이 검게 보일 뿐 버찌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도 저렇게 가려놓지 않으면 세상은 검은 비명으로 가득 차버리겠지. 우린 모두 바닥에 떨어져 터져버리기 전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시고 떫은 덩어리를 속에 품고 서 있는 나무 같은 거겠지. 말하지 않은 것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46

"어느 선승이 있었어. 도에 이르기 위해 금식을 하며 정진하다 가 사흘째 되는 날 그만 허기를 참지 못하고 죽을 먹어버렸대. 옆에 있던 그의 스승이 그걸 보고는, 숟가락을 들고 같이 죽을 떠 먹기 시작했어. 아무 말 없이. 한 사람의 번뇌와 고통은 몸속 어딘가 에 너무도 교묘히 감추어져 있어서, 꺼내서 보여줄 수도 누가 어루 만져줄 수도 없다는 걸 알았던 거지. 어린 제자가 그만 죽을 허겁지겁 떠 먹기 시작했을 때 옆에서 같이 죽을 떠 먹어주는 것, 그걸 해줄 수 있을 뿐이지." - P147

올려다본 하늘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 모르핀 앰플 때문인지, 성공적인 수술 끝에 숨을 거둔 쉰 세살 남자 때문인지, 꽃구경을 끝내 가지 않겠다던 게으른 연인 때문인지, 그 무렵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남교수 때문인지, 그날 내가 입었던 푸른 줄무늬 셔츠 때문인지, 꽃그늘 아래를 흘러다니던 인파 때문인지, 미정의 전화 때문인지, 어둑한 화면을 가득 채우던 만월 때문인지, 차창에 들러붙던 꽃잎 한장 때문인지 현규인들 알 수 있을까. 옆에 서 있는 현규의 등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 손바닥이 무얼 말하는지 읽어내는 건 현규의 몫이겠다. - P147

"하은아, 난 저 불빛들이 무섭다. 주차 관리, 자판기 관리, 말이 좋아 근로장학생.….. 여기서 이렇게 바스러지지 말고 떠나자, 하루에도 몇번 그런 생각 하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니란 것도 알아. 알바 뛰다보니 성적은 엉망, 이 성적으로 취직은 난망. 멀리서 볼 땐 이 도시가 화려한 유혹 그 자체였는데 들어와보니 슈퍼컴처럼 내 초라한 견적서를 뽑아주네. 내가 뭘 하는지 어디서 온 촌놈 인지 나란 인간의 값은 얼마인지…… 꿈은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유한 자의 아들은 권세 있는 자가 되고 권세 있는 자의 아들은 명예로운 자가 되는 거라고, 가난한 자의 자식은 더 가난하게 되어 먼지처럼 이 도시를 떠돌게 될 거라고 자상하게 가르쳐주네." - P165

"낮에 그 문자 받고 얼마나 네 생각 많이 했는데. 말해줘? 이제 식당 가서 두가지 메뉴 시켜서 나눠 먹는 즐거움은 끝이구나. 물냉 면과 비빔냉면 주문해서 매운 것 먼저 먹고 시원한 육수 마실 때의 그 행복감, 짜장면과 짬뽕을 나눠 먹던 풍요로움, 치즈김밥과 떡볶이, 라떼와 프라뿌치노. 둘이 나누어 먹던 그 맛있는 것들. 결국 이 인간하고 헤어지는 것 자체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는 존재론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 거지."
으, 흐흐. 유강의 웃음은 잘게 토막 난다. 차가운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휘저어놓은 것처럼, 웃음 끝에 쓸쓸함이 부유물처럼 떠올랐다가 얼마간 녹아들고는 다시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 느낌도 나쁘지 않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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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끔찍하게 생긴 사내였다. 돼지처럼 뚱뚱한 데다가 낯빛은 코티지 치즈처럼 허옛다. 옷깃 단추는 풀려 있었고, 실크 넥타이는 군데군데 달걀 얼룩이 져 지저분했다. 툭 튀어나온 배는 축 늘어진 베개같았고, 그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달려 있는 작고 가느 다란 다리 끝에는 찢어진 털 실내화가 걸려 있었다. 처진 턱살을 뒤덮은 뻣뻣한 금색 수염, 조그맣고 통통한 손, 긴 금발 곱슬머리, 마치 기괴한 아기가 성인 남자 크기로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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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쯤 집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버리고 온 것에 관한 생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모든 걸 잃었다 하더라도 어쩌겠는가! 아직 목숨은 남아 있었다. 그는 목숨만은 구할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미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쪼그라든다. 그는 이제 내년이나 내달이 아니라 곧 다가올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 P103

"자넨 나중에 자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1940년 피난 때 아빠는 노르망디에서 투렌까지 걸어서 갔단다.‘ 물론 자네는 걷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트럭이나 자동차를, 또 가끔은 자전거를 얻어 타고 갈 걸세. 순수한 상태의 비극은 존재하지 않으니 잘 알아두게나. 언제나 약간의 변동, 희미한 농담, 미묘한 차이들이 있는 법이니까." - P111

"이건 너무해. 나한테는 무리야. 더는 못 견디겠어."
"아뇨, 견디실 거예요. 우리 둘 다 아주 잘 해내고 있으니까요." 마르크가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 자네야 열일곱 살이니 그렇지. 그 나이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난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이해하겠어? 폐허로 변한 세상에 가난하고 늙은 불구자로 남는다고 해도 살고 싶단 말이야." - P113

"삶이 끔찍한 거지. 너희는 삶에서 동떨어져 있어. 너희가 옳아. 삶은 여자를 아프게 하고, 망가뜨리고, 더럽히고, 상처 입게 해. 여자에겐 사랑 외에는 삶이 없다고 말하는 건 남자들이야. 그런데 혼자 사는 너희는 행복하잖니? 날 봐. 나도 이제 너희처럼 혼자야.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 찾은 고독이 아니라, 굴욕적이고 쓰디쓴 나쁜 고독이야. 버림받 고 배신당해 얻은 고독이지. 난 직업도 없어. 가슴을 채우고 정신을 달래줄 게 아무것도 없어. 자식? 그건 날 계속 후회하게 하는 살아 있는 기억이야. 너희는, 너희는 행복하잖아." - P125

몇 년 후에 엄마는 다시 결합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변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건 마치 정신병에 걸렸다가 완치된 사람한테 강압복 을 다시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요, 가엾은 양반··."
내 아버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홀로 지내다가 몇 달 후 갑자기 사망했다. - P131

나는 엄마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강력한 경쟁자로 보이는 모든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자란 그 세 사람은 안전했다. 그들이 엄마의 소중한 남자를 앗아갈리는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의 물결에 휩쓸려갔다. 분명,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떠나갔다. 마개를 열어놓은 향수병에서 향기가 날아가듯, 사랑은 그녀의 가슴에서 달아났다. 분명히 말하는데, 프랑스에서 첫 밤을 보낸 순간부터 엄마는 아버지를 잊기 시작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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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회사에서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데 전화를 해왔다. 창문 한번 열어봐요. 왜? 달빛이 너무 좋아요. 사무실 창문은 열리지 않는 고정 창이었다…… 그러네. 열었다 해도 달이 보일 리 없는 콘크리트 숲이지만 넉넉한 달빛을 본 듯 마음이 환해졌다. 달은 어디나 똑같아요. K가 말했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구나. 아주 환한 게, 어디서나 똑같겠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별이 아주 또렷이 보인다고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귀찮았고 가끔은 단순하게 반가웠다. 겨울의 끝에 처음 갔던 돼지껍데기집에 또 한번 갔다. 찬 소주와 먹는 돼지껍데기 맛은 처음과 달리 먹을 만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했다. - P105

"그러니까, 점 같았어요. 그냥 하나의 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이요. 이곳이 익숙해지는 만큼 그만큼 불안해졌어요. 내가 딛고 설 영토를 갖고 싶었어요." - P108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K는 죽이 든 봉투 위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제 삶의 뿌 리를 뽑아들고 달아난 까닭을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도망자처럼. - P109

차에서 내린 K는 내가 골목 끝에 이를 때까지 차 꽁무니를 바라 보고 있었다. 집 앞에 내려준 적이 몇번이지만 집에 들어가본 적은 없다. K는 정말 저기 살고 있는 걸까. 어둑한 골목에 서 있는 서른 살 청년은 백미러 속에만 출몰하는 창백한 유령처럼 부피감이 없다. 다시 어딘가로 날아갈 커다란 새 같기도 하고 이제 막 그곳에 부려진 정처없는 난민 같기도 하다. - P109

돌이킬 수 없을 때의 후회는 후회가 아니다. 핑곗거리가 되어줄 무언가를 건져오라고, 기억의 우물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무심히 보낸 시간들을 자잘하게 쪼개 연속사진 처럼 한장씩 한장씩 떠올리면서, 여기쯤이냐고, 아니면 어디서부터였느냐고, 길이 나누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라고, 저 자신을 다그치고 또 다그치는 짓이다. - P119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어. 그건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래."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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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여, 깊은 밤 모든 게 심연으로 가라앉는 중에 삶이라는 게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겉모습으로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죽어서야 살게 되는 것인가?" - P290

우리는 수세기에 걸친 침묵 속에 갇힌 난파선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한다. 도서관, 학교, 박물관은 폭력적 환경에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취약한 기관이다. 내 상상 속에서, 광신적인 시대의 참상 앞에 놓인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을 무국적자로 느낀 온유하고 교양 있고 평화주의적인 사람들의 슬픔에 물들어 있다. 팔라다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은 자들과 평화롭게 책을 얘기하며 삶을 보냈다. "나는 비정한 시대에 존중을 퍼트리고자 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죽은 자들의 영사일 뿐이었다." - P293

"책이 타버리면, 책이 부서지면, 책이 죽으면, 우리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훼손된다. 책이 불타면, 모든 생명,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생명과 그 책이 장차 모든 생명에게 줄 수 있었던 따스함, 지식, 지성, 기쁨, 희망도 죽는다. 책을 파괴하는 짓은 그야말로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불씨는 며칠이고 타올랐고 자욱한 연기는 어두운 눈처럼 도시를 떠다녔다. 사라예보 주민들은 행인 위로, 폐허가 된 땅 위로, 거리 위로, 반쯤 무너진 건물 위로 떨어지며 죽은 자들의 환영과 뒤섞이는 그 불타버린 책의 재를 ‘검은 나비‘라고 불렀다.
우연의 일치인지 『화씨 451』에 등장하는 소방관도 유사한 은유를 사용한다. 그는 책을 손에 들고 책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첫장을 태우라. 그리고 다음 장도 태우라. 그 종이들이 하나씩 검은 나비로 변하리라. 아름답지 않은가?" 미국의 환상소설 작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에 묘사된 암울한 미래에선 독서가 엄격히 금지되고 모든 책은 파기된다. 그 세계에서 소방관은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을 지피고 부채질하여 위험하고 은밀한 물건을 숨기고 있는 집을 불태운다.
합법적인 책은 한 권뿐이다. 바로 불을 지르는 조직의 규정이다. 그 텍스트에는 1790년 미국에서 영어로 된 책을 불태우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소방관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혀 있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글도 없으며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문서가 제거되고 책이 유통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역사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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