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쯤 집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버리고 온 것에 관한 생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모든 걸 잃었다 하더라도 어쩌겠는가! 아직 목숨은 남아 있었다. 그는 목숨만은 구할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미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쪼그라든다. 그는 이제 내년이나 내달이 아니라 곧 다가올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 P103

"자넨 나중에 자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1940년 피난 때 아빠는 노르망디에서 투렌까지 걸어서 갔단다.‘ 물론 자네는 걷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트럭이나 자동차를, 또 가끔은 자전거를 얻어 타고 갈 걸세. 순수한 상태의 비극은 존재하지 않으니 잘 알아두게나. 언제나 약간의 변동, 희미한 농담, 미묘한 차이들이 있는 법이니까." - P111

"이건 너무해. 나한테는 무리야. 더는 못 견디겠어."
"아뇨, 견디실 거예요. 우리 둘 다 아주 잘 해내고 있으니까요." 마르크가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 자네야 열일곱 살이니 그렇지. 그 나이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난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이해하겠어? 폐허로 변한 세상에 가난하고 늙은 불구자로 남는다고 해도 살고 싶단 말이야." - P113

"삶이 끔찍한 거지. 너희는 삶에서 동떨어져 있어. 너희가 옳아. 삶은 여자를 아프게 하고, 망가뜨리고, 더럽히고, 상처 입게 해. 여자에겐 사랑 외에는 삶이 없다고 말하는 건 남자들이야. 그런데 혼자 사는 너희는 행복하잖니? 날 봐. 나도 이제 너희처럼 혼자야.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 찾은 고독이 아니라, 굴욕적이고 쓰디쓴 나쁜 고독이야. 버림받 고 배신당해 얻은 고독이지. 난 직업도 없어. 가슴을 채우고 정신을 달래줄 게 아무것도 없어. 자식? 그건 날 계속 후회하게 하는 살아 있는 기억이야. 너희는, 너희는 행복하잖아." - P125

몇 년 후에 엄마는 다시 결합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변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건 마치 정신병에 걸렸다가 완치된 사람한테 강압복 을 다시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요, 가엾은 양반··."
내 아버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홀로 지내다가 몇 달 후 갑자기 사망했다. - P131

나는 엄마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강력한 경쟁자로 보이는 모든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자란 그 세 사람은 안전했다. 그들이 엄마의 소중한 남자를 앗아갈리는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의 물결에 휩쓸려갔다. 분명,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떠나갔다. 마개를 열어놓은 향수병에서 향기가 날아가듯, 사랑은 그녀의 가슴에서 달아났다. 분명히 말하는데, 프랑스에서 첫 밤을 보낸 순간부터 엄마는 아버지를 잊기 시작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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