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인이 두 아이와 방종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어. 한 아이는 젖을 물고서 몹시 화를 내고 있었어. 글자 그대로 분노하고 있었어. 그리고 동생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짜증나게 하고 있었어. 그럼 엄마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멍한 얼굴로 모나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어. 부도덕하고 재수 없는 미소였어. 모성은 성스럽다고 확신하면서, 두 아이에게 규칙을 따르게 하지 않았어. 나머지 승객들에게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기독교의 자비가 진정으로 부족한 행동이 아닐까? 부인, 아이가 왜 고함치는 거죠? 살아 있 기 때문인가요? 나도 살아 있는데, 난 그걸 참고 있어야 해.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야. 이런 삶에서는 죄 없는 순진한 사람의 인내를 악용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찻잔을 가득 채우는 마지막 방울이 항상 있다는 것도 사실이야. 완전히 끝까지 가득 찬 찻잔에 한 방울이라도 더 떨어뜨리면 넘쳐 버려. - P151

그럼 경찰은? 이렇게 사건들로 가득한 나라에 경찰이 없을까? 물론 경찰은 있어. 그들은 ‘순경‘, ‘순사‘, ‘짭새‘, ‘권력의 지팡이‘, ‘범죄 사냥꾼‘, ‘초록 제복의 개새끼‘야. 그들은 투명 인간이야. 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거든. 유리컵보다 더 투명한 존재들이지. 그런데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면, 그들의 초록색 육체에 빛이 반사될 때면 어서 도망쳐야 해, 파르세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을 습격하고 두들겨 패서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거든. - P153

버스에서 죽은 사람이 또 하나 있어. 시비 걸기 좋아하던 거지였어. 국제 사면 위원회, 가톨릭교회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인권 위원회 사람들이 부추긴 마약 중독자 중의 하나였어. 그러니까 온종일 바수코를 피워 대면서 손에 막대기를 들고서 구걸하거나 강요하는 인간이었어.
"사장님, 뭐라도 좋으니 좀 주세요, 오늘 아침을 못 먹었어요. 배가 고파요."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당신을 낳은 어머니한테 먹여 달라고 해. 혹은 가난과 인간쓰레기의 번식을 목청껏 변호하는 교황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해.
거지들, 기독교인의 자비, 그따위 말은 그만! 부자들을 증오하는 것, 그건 옳아. 그러나 계속 가난하게 살면서 더 많이 낳으려고 고집하는 건······ - P153

가난의 유전자는 그것보다 더 심해, 더 지독해. 10000명 중에서 9999명이 확실하게 자기 아이들에게 전해져. 여러분은 그런 나쁜 유전자가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유전되는 것에 동의해? 유전적 이유로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번식할 권리가 없어. 세상의 부자들이여, 뭉쳐! 지금보다 더 단합해야 해. 아니면 가난이 밀어닥쳐 여러분을 휩쓸어 버릴 거야. - P155

"이봐, 내 아이야, 이 집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이 창문이 있는 이 방에서, 맑고 별이 총총 떠 있으며 미래가 유망하고 동시에 사기성이 농후한 어느 밤에 내가 태어났어."
바로 거기서 나는 죽어서 내 비문을 완성하고 싶어. 그건 라틴어 대문자로 내 이름과 동격으로, 그리고 문 이쪽으로 이렇게 말해야만 해. "유명 인사, 훌륭한 문법 학자, 뛰어난 문헌 학자, 신심이 돈독하고 자비로우며, 정중하고 공손하며, 우애 깊고 유순하며, 하나이고 같은 사람이며,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이고, 지극히 올바른 이 사람은······."그리고 거기에 비명을 세운 해를 적어 놓고, 내가 태어나고 죽은 해는 적지 말아야 해. 영원성이란 두 날짜 사이에 억지로 집어넣지 말아야 해. 구속복을 입히지 말아야 해. 나는 그걸 굳게 믿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적지 마. 그냥 아무 제약도 없이 지나가도록 놔 둬. 그건 자기도 모른 채 스스로 지나가게 되는 거야. 알려진 모든 은하계, 은하수, 태양계, 지구, 콜롬비아 공화국, 안티오키 아주, 메데인시, 보스톤 동네, 페루 거리에 있는 이 집. 이곳은 내가 내 뜻과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내 손으로 죽겠다고 생각 하는 장소야. - P156

어린 시절은 가난과 같아. 해롭고 나빠. - P159

만리케 동네는(나는 이 글을 읽을 일본과 세르비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독자들을 위해 이 말을 하는 거야.) 메데인이 끝나고 코무나가 시작하는 곳 혹은 코무나가 끝나면서 메데인이 시작하는 곳에 있어. 그건 지옥의 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입구인지 출구인지, 올라가는 방향에서 지옥이 저쪽에 있는 건지 아니면 이쪽에 있는 건지, 아니면 내려가는 방향에서 그런 건지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야.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상관없이 내 대모인 죽음의 여신은 그 치맛자락들을 배회하면서 자기 일에 열중하고, 아무에게도 멸시하는 표정을 짓지 않아. 그녀는 대자인 나, 거리낌 없이 마구 말하는 나와 같아.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 P162

그날 밤은 불길했어. 정신을 잃은 하늘이 쉬지 않고 밤새 비를 내렸어. 메데인 강은 넘쳐흘렀고, 그러자 180개의 개천도 넘쳐흘렀어. 이들 중 몇 개는 복개천이었어. 우리는 수많은 땀을 흘리고 수많은 돈을 횡령하면서 그 개울을 거리 아래에 묻었는데, 그것들이 성난 듯이 그들의 구속복을 찢어버리고서 아스팔트를 부수고는 옷을 제대로 입지 않는 미친 여자처럼 발광하고 실성하여 느닷없이 튀어나와 자동차들을 휩쓸면서 도시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었어. 다른 개울들, 그러니까 그들의 해방된 자매들은, 다시 말해서 제정신일 때는 온화한 비둘기처럼 상냥하고 쾌활했던 개울들이 이제 악마에 홀린 듯이 포효하고 소용돌이치며 산에서 격렬하게 흘러 내려와서, 우리를 덮쳤고 범람했으며 물에 빠뜨렸고, 나를 열병으로 헛소리하게 만들었어. 하늘은 속을 드러내고 강은 범람하고 개울은 발광하면서 하수관은 멋대로 거칠어져서 넘쳐흘렀어. 콸콸 세차게 흘러나왔고, 그 거대한 똥물의 바다가 우리 집 발코니로 올라오고 또 올라왔어. 내 말을 믿어. 난 이미 예고했어. 우리는 이 똥물로 끝나게 될 거라고. - P166

그때서야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걸 깨달았어. 그건 내가 한량없이 피곤해 있으며, 명예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고, 나한테는 무처벌이나 처벌이 똑같은 것이며, 복수는 내 나이에 하기에 너무나 큰 짐이라는 사실이었어.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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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해. 하지만 알렉시스는 아주 잘 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토록 잘 조준하겠어? 그런데 이번에는 변화를 주기 위해 이 주제에 관해 익히 잘 알려진 소나타를 윤색하면서,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지 않았어. 아니야, 그렇게 하지 않고서 대신 입에 꽂아 넣었어. 그가 욕을 내뱉었던 그 더러운 입에 쏴 버린 거야.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가 살아서 내뱉은 마지막 말은 "보지 못하는 거야?"가 되고 말았어. 이건 그의 말을 다시 듣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더는 보지 못했어. 죽은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해. 우리는 그 눈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눈들은 보지 못하고, 그런 눈은 눈이 아니야.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가 현명하고 정확하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 P61

만일 알렉시스가 적어도 무언가를 읽는다면······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이 아이는 너무나 철저해. 마치 그토록 오래 살면서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위대한 레이건 대통령과 똑같아. 인쇄된 글자로 오염되지 않은 이 순수함은 또한 내가 이 아이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해. 내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내 꼴을 봐! 나를 보란 말이야. 그런데 내 아이는 서명하는 법은 알까? 물론 알고 있었어. 내가 본 필체 중에서 가장 씩씩하고 가장 삐뚤거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악마인 천사가 쓴 것처럼 이상야릇해. 여기 그 애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사진 뒷면에 내게 바치는 글을 썼어. 간단하게 "평생 당신의 것"이라고만 썼는데, 그거면 충분해. 더 많은 것을 원할 필요가 있을까? 내 인생 전체가 그 말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 P68

콜롬비아의 모든 문제는 의미의 문제야. 자, 그럼 한번 보지. ‘개새끼‘는 여기서 많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어. 예를 들어 "정말 개새끼처럼 추워!"라는 말은 "너무 심하게 추워!"라는 의미야. "개새끼처럼 똑똑한 놈이야."라는 말은 아주 똑똑하다는 뜻이지. 그러나 그 빌어먹을 놈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개새끼."라고만 말하면, 그건 전혀 다른 의미야. 그건 뱀이 당신에게 내뱉는 독이야. 그런 독사들의 머리는 깨부숴야 해. 뱀이 죽느냐 우리가 죽느냐의 문제인 거야. 하느님이 그렇게 해 놓으신 거야. - P73

시뻘겋게 달군 집게도 아니고, 펄펄 끓는 솔도 아니야. 지옥의 고통은 바로 소음이야. 영혼이 불태우는 뜨거운 열이 소음이거든. - P86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가져오고, 증오는 더 많은 증오를 가져와. 그렇게 되는 게 일종의 법칙이야. 빙빙 돌면서 자기 꼬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고양이의 법칙이지. 많이 매장한다고 쏟아지는 폭력을 잠재울 수는 없어······ 오히려 폭력에 불을 붙여. 그래서 코무나에서는 산 사람의 운명이 죽은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증오는 가난과 같아. 그건 아무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래 구덩이야.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지거든. - P88

늙은이가 젊은 애를 죽이는 게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지? 물론 그건 당연한 생각이야. 늙어서 하는 모든 건 타당치 않아. 죽이거나 웃거나 섹스하거나 무엇보다도 계속 살아가는 건 부적절한 행위야. 죽는 것을 제외하고 늙어서 하는 모든 건 부적절해. 늙음은 부끄럽고 천하며, 꼴사납고 혐오스러우며, 파렴치하고 구역질 나. 늙은이들은 죽을 권리 말고는 아무 권리도 없어. - P133

나는 자비롭게 옷은 그를 더 아름답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름다움을 감소시킨다고 그에게 설명했어. 그리고 모터사이클은 그에게 청부 살인자의 지위를 주고, 지프는 마약 밀매상 혹은 마약 조직원 같은 더럽고 저급한 인간쓰레기라는 걸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어. 그리고 오디오는 왜 필요하냐고 물었어. 우리가 안에 갖고 다니는 소리만 해도 시끄러운데 뭐하러 밖의 소리까지 원하는 거지? 그리고 냉장고 안에 넣을 것도 없을 텐데, 냉장고가 왜 필요해? 거기에 공기를 넣을 참이야? 아니면 시체를? 그러니 수프나 먹고 헛된 꿈은 잊어버리라고 말했어······. - P138

마술 상자 속을 뒤적거리고 찾으면서 깜짝 선물 속에서 갈수록 행복해 하는 고양이를 상상하도록 해. 여기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어. 국가는 조금 더 깨닫고 자각해서 젊은 애들에게 옷을 사주라는 거야. 그래야 생식이나 살인을 생각하지 않게 되거든. 축구장으로는 충분치 않아. - P148

사탄이여, 축복받으소서, 이 세상의 일을 걱정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없는 틈에 당신이 이 세상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오셨나이다. - P149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괴물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손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이 손쓸 수 없는 존재들이야. - P150

여기에는 죄 없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죄 많은 사람이야. 무지와 가난, 이런 걸 이해하려고 해야 하지만······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모든 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는 범죄에 영합하게 되는 거야. 그럼 인권은? 인권은 무슨 인권, 그런 건 생각해 볼 가치도 없어! 그건 영합이며 방탕이고 방종이야. 자, 그럼 잘 생각해 보자고. 만일 여기 아래에 죄지은 사람들이 없다면, 그게 뭐지? 그건 범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게 아닐까? 범죄가 스스로 저질러지지 않고, 여기 아래에는 죄지은 사람이 없다면, 죄 있는 장본인은 저 위에 계신 분이야. 이런 범죄자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무책임한 분이셔. 그런데 누가 그분을 벌주지? 당신이 벌주나? […]
국가는 탄압하고 총을 쏘기 위해 있는 거야. 나머지는 국민 선동, 그게 민주주의야. 더는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 일할 자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버스를 만원으로 가득 채우는 자유는 없어. 그건 모두 개소리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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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맛 들이면 꼼짝달싹 못하고 만다. 껌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보면 벌써 때는 늦어버린다. 어느새 그 제품에 악착같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물거리던 애매한 동작은 힘차고 기계적인 저작운동으로 바뀐다. 혀끝에 얼마간 단맛을 주던 설탕기가 빠진 뒤에도 껌이 지닌 고무질 맛과 탄성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씹을수록 짜증나고 불만스러운 맛이지만, 웬일인지 당장 뱉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자학행위에 빠진 사람처럼 자꾸자꾸 껌을 쩍쩍 씹어댄다. 뱉어버리자, 뱉어버리자. 석달 동안 너는 이 생각에 항상 전전긍긍해왔다. 껌을 뱉어 버린 지금, 그렇다고 과연 너는 안전한가? 아니다. 사방에서 함부로 뱉어버린 껌들이 살아서 끈적거리고 있다. 구두에 밟혀 끈적거리고, 공원 벤치, 극장 의자에 달라붙어 방심한 궁둥이를 기다린다. 껌팔이 애들이 사방에 퍼져서 아직 껌을 사지 않은 손님들을 적발 해내어 강매한다. 그 질긴 점착력은 결코 소멸할 수 없으리라. - P228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양일을 사년 동안 착실히 죽여온 셈이다. 험담을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다짐할수록 웬걸 가슴은 무슨 보람으로 뻑적지근해지고 자꾸 입술이 달싹 거려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건 오장육부를 훑어내는 참기 어려운 가려움증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그 돈을 빌려주는 순간부터 제발 갚지 말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마 양일이 돈을 갚지 못할 지경으로 사정이 나빠지기를 소망했으리라. 그만큼 나한테는 붙잡고 늘어질 그의 약점이 소중했던 게 아닐까? - P263

"다섯시간 자면 합격하고 여섯시간 자면 불합격한다." 이것이 내 좌우명이었지만 내가 불합격할 운명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좌우명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별반 없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시간까지 합치면 오히려 내 수면시간은 여덟시간도 넘었을 터이다. 밤 한시가 가까워져 졸음이 엄습해오면 책상머리에 놓아둔 등산칼을 집어 들고 숫돌에다 슥슥 갈아 날을 세웠다. 그래도 졸렸다. 졸음기 가득 찬 내 눈에는 금방 간 칼날도 언제나 무딘 빛으로 침침했다. 나는 그 순간 제풀에 팩 골을 내며 칼을 꼬나잡고 눈을 홉뜬다. 이미 무수한 칼자국으로 뒤덮여버린 앉은뱅이책상은 울퉁불퉁 달 표면처럼 황량하고 서글프다. 제기랄, 나는 다음 순간 후, 하고 책상을 내려찍는다. 칼끝에 흰 나무 속살이 툭 튕겨나온다. 빌어먹을, 그래도 졸립다. - P264

나는 감상적이 되는 것을 죽기 만큼이나 싫어한다. 가슴 복판이 별안간 천야만야 고즈넉하게 가라앉고 콧날이 새큰거린다 싶더니 어느새 여름감기 콧물 같은 게 비어져나오는 기분을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한다. 내가 어느 편인가 하면, 버스간에서 감상적인 넋두리를 푸는 고학생에게 껌 한통 사느니, 차라리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만원권을 소매치기당하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강짜로 술을 뺏어먹는 게 낫지 술을 구걸하다니, 이런 빌어먹을. - P274

술집 안에 틀어박힌 무더위, 날이 저물어도, 주모가 연탄불을 옮 겨가버려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전기가 들어오자 탁자 주변은 여기저기 썩은 쓰레기 같은 그늘이 쌓이고 석쇠에 먹다 남은 돼지 고기 두점이 그 썩은 그늘에 더럽혀져 있었다. 이 더러운 그늘은 또 돼지 냄새와 비지땀에 뒤범벅이 되어 맨살에 맥질치고 있었다. 몸에 눌어붙은 돼지 냄새가 급속도로 썩어갔다. 돼지 냄새는 손톱 사이, 잇새, 식탁의 금 간 틈서리, 식은 석쇠에서 사정없이 썩어갔다. 우리가 먹은 돼지고기는 썩어가고 우리는 거나하게 야만스러워지는 것이었다. - P280

이때 문득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눈앞의 무사한 공간에 순식간에 번졌다가 사라지는 빛이 있다. 무얼까? 창 위로 재빨리 스치고 지나간 그 그림자는 아마도 국민학교 처마 밑에 살고 있는 비둘기들이리라. 완주는 학교 울타리를 올려다보았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하나 가득 퍼져 있는 운동장 위 짙푸른 공간. 울타리 너머 보이는 포플러나무들이 퍼석 마른 잿기둥같이 서 있다. 한여름 푸른 분수처럼 세차게 솟아올라 윤택한 빛을 튕겨대며 술렁거리던 것들이 어느새 저렇게 잎을 다 털려버리고 말았나? 이때 학교 후문의 급경사진 돌계단에 아이들 넷이 훌쩍 나타났다. 아이들은 계단 위에 여러 마디로 꺾인 자신의 그림자를 끌면서 급히 후문을 향해 올라갔다. 한 애가 축구공을 운동장 안으로 던져넣자 아이들은 일제히 문을 타고 넘어 짙푸른 하늘에 함빡 물들었다가는 문 안쪽, 능선의 지각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그 네가닥의 새까만 속력이 풍경을 뚫고 지나간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인데, 그런데도 풍경은 들쥐를 삼킨 뱀처럼 이상스럽게도 과장되게 부풀어올랐다. 돌계단과 후문이 한층 더 높이 솟아올라 흡사 바람과 햇빛이 가득한 노천무대같이 황량해 보인다. 어쩐지 그 쾌활한 아이들이 꼭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마음이 안쓰럽다. - P292

아이 넷을 삼킨 서편 하늘은 아까보다 더 불안스럽게 들떠 보인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재빨리 흘러갔다. 유리창이 덜컹거리지 않는 걸로 보아 바람은 꽤 높은 공중을 치닫고 있는 모양이다. 강풍에 휩쓸려 언저리가 헤실헤실 풀어진 구름떼가 계속 동쪽으로 밀려간다. 빛이 정체되어 보이는 평상시와는 달리, 지금 햇빛은 재빨리 움직이면서 사물 위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구름떼가 내던진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뒹굴 때마다 창밖 풍경은 전체가 흔들거린다. 앞집의 벽은 무슨 질펀한 손바닥이 쓰다듬는 것처럼, 혹은 이상한 심호흡에 빠져 있는 것처럼 벽의 누런 페인트 색깔이 밝아올랐다가는 어두워지곤 한다. 창틀에 올려놓은 맨발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햇빛도 환하게 부풀어올랐다가는 갑자기 핼쑥 오므라들고 있다. - P293

이렇게 부풀고 오므라드는 빛의 회전을 바라보는 동안 완주는 가벼운 현기증에 깜박깜박 떨어지곤 한다. 창밖은 시방 계절이 대 이동 중, 하늘 가득히 겨울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저 공중을 내달리는 바람이 곧 이 능선 아래로 덮쳐들 테지. 벌써 창가의 바람기가 을씨년스럽다. 발등을 감싸고 있는 햇빛은 미미한 바람결에도 쫓겨 덧없이 벗겨져내리고 발가락털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엄지발가락의, 구두에 짓눌려 죽은 세포 퇴적이 더욱 검게 질려 보이고······ 오직 담배연기만 창가에서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 P293

낮게 뜬 구름떼가 능선을 넘어 계속 동쪽으로 흘러갔다. 능선 위에 엎드린 시멘트벽돌집들이 겁에 질린 듯 몹시 창백해졌다. 하늘이 낮게 내려와 날카로운 날 같은 능선을 질편하게 내리누르고 능선을 따라서 대기가 끊임없이 흘러간다. 배합수가 나쁜 시멘트 벽돌담과 추녀 끝을 사정없이 할퀴면서. 매끄러운 능선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저 초라한 집들은 얼마나 서툰 줄광대들일까. - P294

이제 바람은 마침내 이 골짜기 밑까지 내려덮친 모양이다. 사방에서 줄에 널린 빨래들이 곤두박질치면서 미친 듯 펄럭거린다. 이 가난한 산동네의 누덕지고 빛바랜 빨래들은 바람만 불면 저렇게 제 분수를 훨씬 벗어난, 무슨 격정적인 깃발처럼 나부끼는 것이다. 유리창이 무시로 덜컹거리고 오싹오싹 추워진다. - P294

앞집의 지붕 위에는 바람에 휘말린 미친 햇빛이 나뒹굴고 있다. 저 지붕 위에 폭양이 내리쬐던 지난 8월, 혼자 영흥도에서 이박하고 돌아온 그날이었지. […] 그때 저 지붕은 기왕골마다 불아지랑이가 일어나 지붕 위로 내려뜨려진 푸른 하늘 자락이 너울거리고, 백탄같이 달궈진 기왓장 사이사이에 끼어든 콜타르 빛 그림자들이 흐느적흐느적 독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끓는 지붕, 누런 화염에 뒤덮인 모진 폐허. 분무기로 뿜어낸 듯 기왓골 군데군데 옅은 초록색 분말같이 밀생해 있던 이끼가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그만 허옇게 말라 죽고 만 것이었다. - P294

한번만 더 만나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을장마는 시작되고, 그는 이 창가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를 하릴없이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붕 위의 죽은 이끼 떼는 비가 와도 다시 회생하지 않았다. 낡은 필름이 영사된 스크린 위를 번쩍번쩍 흘러내리는 사선처럼 빗줄기들은 하루 종일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앞집의 저 홈통 끝에선 흰 손수건 같은 물줄기가 나부꼈다. 균질한 명도로 흐려져 있는 하늘, 물 젖은 기와들의 정수리에 떠올라 있는 은은한 광택······ […] 때때로 바람이 불어와 빗줄기를 흔들어놓으면 비에 가린 저 지붕은 장막처럼 술렁거리기도 했다. - P295

작년 겨울 어느날 둘이는 무심코 하인천행 기차를 탔는데, 말하자면 그게 불찰이었던 것이다. 그때 차창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왔는데, 완주가 지금도 그 온기가 기억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차내는 스팀이 꺼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서로가 갑자기 가까워져버린 것은 단지 그 날 추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추위를 별나게 타는 아이처럼 완주 곁에 바싹 다가앉아서 그 오죽잖은 햇빛을 손톱 끝으로 톡톡 튕겨대는 시늉을 하며 웃고 있었다. 우중충한 겨울 날씨를 꿰뚫고 뻗어 있는 레일의 흰빛과 수증기, 물이 얼어붙은 논 위를 곤두박질 치며 굴러가는 겨울 태양, 가슴이 울렁거리도록 느닷없이 불거터지는 기적 소리, 이런 것들이 아마 그녀를 조금은 감상적으로 만들었나보다. - P296

봄에도 가고 여름에도 갔다. 푸른 경기평야가 기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연도의 미루나무, 포도밭의 붉은 황토, 채석장의 흰 돌 따위가 모두 한데 어울려 창가에서 흐드러지게 무너지곤 했었다. 그건 한데 어울려 핀 풀꽃 무더기 같았다. - P297

결국 사랑은 스웨터 위로만 메마르게 비비적거리다 만 셈이었다. 화학섬유 스웨터끼리 비비적비비적 마른 전기만 일으키다 끝장난 것이었다. - P299

이제 해가 넘어간 모양이다.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언덕배기 주택지는 능선을 따라서 희끄무레한 잔광이 떠올라 있을 뿐 아래쪽은 꽤 어둡다. 모든 집들이 저 어둡고 질편한 평면의 품 안으로 여며들고 있다. 능선 위 잎 털린 나무마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목탄 화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 어째서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나? 왜 밤마다 어둠은 내려와 하는 어두운 손길로 사물들을 조그맣게 싸서 빛과 운동이 빠져나간 가공의 의한 뭉치로 만들어버리는가? - P302

그날밤 그는 밤새도록 술에 취해 바닷가를 헤매다녔다. 사방은 지척을 분간 못하게 어두웠고 어둠속에서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옷은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밤새도록 모래를 쓸어안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불면을 달래던 밤바다. 검은 목선 세 척이 흔들거리고, 은은한 미광이 덮여 있는 수면······ 모래톱에 닿는 잔물결은 부드러운 바람에 주름 잡히는 커튼 자락 같았다. 한숨처럼 다가와 모래톱 위로 볼을 비비며 뒹굴고 있었다. 왜 밤이면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빛깔을 잃어버릴까? - P303

완주는 어두운 책상 위를 더듬어 홍합 조가비를 손에 움켜잡았다. 이건 밤마다 불면증을 달래주는 내 소주잔, 영흥도 바닷가에서 잔물결 타는 종이배처럼 비딱하게 기울어져 모래톱 위에 얹혀 있었지. 모래알의 세계, 그 마멸의 시간 속으로 이미 떠나 있는 이 조가비에 무심히 시선이 끌리어갔었다. 그 익명의 아름다움이 눈의 망막으로 옮아붙은 거였지. 그래서 그 조가비를 주운 것이지 별게 아니었다. - P304

이때 문득 오른쪽 손등에 초록색 반점이 하나 뚝 떨어졌다. 뭘까? 아주 조그만 풀벌레. 하도 작아서 발이 안 보일 지경이다. 여태 이런 여름것이 살아 있었다니. 완주는 별생각 없이 왼쪽 손가락으로 그 곤충을 부드럽게 누른 채 옆으로 칙 그어버린다. 그러자 벌레는 없어지고 대신 손등에 푸른 잔디 잎새 같은 흔적만 남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치 그 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P305

마을은 온통 타버린 잿더미였는데 그 운동장만이 햇볕에 내다 넌 넓은 광목천같이 희게 표백되어 있었다. 잔모래알들이 햇살을 받자마자 낱낱이 수직으로 되쏘아서 해가 번들거리는 중천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었을까? 뜨겁고 바람기 한점 없는 정오. 고막에 달라붙은 매미 울음소리. 그림자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사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 - P309

물속에 들어온 것이 금방 후회스러워졌다. 물은 뜨뜻무레해서 전혀 시원한 맛이 없을뿐더러 다리의 맨살에 부딪쳐 밀려날 때마다 밀가루 반죽같이 육중하고 끈끈하다. 정말 물속은 흐느적거리는 무성한 물풀 때문인지 아주 뻑뻑하게 느껴졌다. 비린 물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입을 벌려 숨을 쉬었다.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뿜어 물고랑을 파면서 가운데로 헤엄쳐갔다. 다리는 앞질러 있는 팔의 리듬을 능숙하게 쫓아오고 물발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로 국수 가락처럼 길게 빠져나간다. 가슴은 맞닿은 평평한 물을 능히 지탱 했다가는 다음 순간 그걸 으깨버리고 있다. 가느다란 물가락들이 헝클어지고 부서지면서 어지러이 온몸에 감겨오고, 몸이 그럭저럭 밍근한 물 온도에 익숙해져갔다. 맷방석만 한 개구리밥떼가 올망졸망 물결 타며 뒤로 물러갔다. 물 가운데로 오자 나는 어깨에 달라붙은 개구리밥을 떼어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리 위 어느 뜨거운 허공 일점을 후벼대는 풍뎅이 날개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한낮. 수면에 흰 막을 친 듯 엉겨 있던 수증기가 조금씩 흔들거리며 피어오른다. - P310

나는 하루 종일 뙤약볕에 땀 흘리며 하릴없이 동네 안팎을 터벅터벅 걸어다녔다. 길 복판이나 돌담 그늘 같은 데서 아이들과 마주 친다. 녀석들은 언제나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서로 맞붙어서 한낮의 시커먼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는 게 마치 단단히 뭉 쳐진 바윗돌이었다. 그 바윗덩어리가 내가 다가가는 눈치면 힘차게 무너져 사방으로 튀는 거였다. 공깃돌을 내던지고 된 코를 손으로 풀면서 햇빛 속에 뿌려진 그 공깃돌처럼 새까만 점들이 되어 눈부신 길 복판에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멀어갔다. 그러면 내 앞 길은 더 뜨겁고 적막해버린다. 길가에 질긴 질경이풀이 뜨거운 흙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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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 아이들에게 부자나 마구 평평 돈 쓰는 사람, 혹은 외국 스타일의 이름을 붙여 줘. 가령 타이슨 알렉산더, 혹은 페이버나 에더 또는 윌퍼나 롬멜, 그리고 예이손 등등의 이름을 들 수 있어. 나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이름을 가져오는지, 혹은 어떻게 그런 이름들을 만들어 내는지 몰라. 이것들, 그러니까 쓸모도 없고 바보 같은 외국 이름이나 억지로 만들어 낸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가난한 삶 속에서 자기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남보다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야. - P10

나는 길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어. 똑같이 생긴 집들이 죽 늘어선 새로운 동네들 사이로, 내 어릴 적의 낡고 오래된 작은 시골집 몇 채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마술적인 장소인 ‘봄바이‘ 술집이 있었어. 한쪽으로 가솔린펌프, 그러니까 주유소가 있었어. 주유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술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대들보가 받치고 있는 지붕은 과거와 똑같았고, 회반죽 벽돌로 만든 흰 벽도 똑같았어. 가구는 지금의 것이었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곳의 영혼은 계속 그 안에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내 기억과 비교했는데, 그대로였어. ‘봄바이‘는 그대로였어. 내가 어린아이, 청년, 어른, 늙은이였더라도 항상 나였던 것처럼. 이제는 지겨워진 원한과 증오도 그대로였어. 증오와 원한은 기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불평과 불만을 잊어버려. - P16

이봐, 알렉시스, 네가 나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어. 너는 젊고, 나는 곧 죽을 몸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는 내가 경험했던 행복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을 거야. 행복은 텔레비전과 카세트 라디오, 펑크광과 록 마니아, 그리고 축구 경기로 가득한 네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거든. 인류가 텔레비전 앞에 오래도록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스물두 명의 유치한 어른들이 공을 차는 걸 지켜본다면, 희망은 없는 거야. 희망은 불쾌하게 만들고, 유감스럽게 하며, 사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 그렇게 사람들을 영원의 절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어서 지구에서 떠나게 하고 결코 못 돌아오게 하려고 해. - P17

인류가 살아가려면 신화와 거짓말이 필요해. 만약 누군가가 그대로 드러난 진실을 본다면, 아마도 자기 머리에 총을 쏴 버릴 거야. - P20

알렉시스는 지금이 아니라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머나면 과거에 내게 왔어야만 했어.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그날 밤, 멈춘 시계로 가득한 그 아파트에서 우리가 만나도록 계획되어 있었지. 내 말은 우리가 만나야만 했던 시간보다 한참 후의 일이란 소리야. 내 인생의 줄거리는 부조리한 책과 같아. 그러니까 먼저 나와야 할 것이 나중에 나오지. 이런 책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것은 이미 쓰여 있었어. 나는 단지 우유부단하게 한 장 한 장씩 실천에 옮기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최소한 마지막 페이지라도 내 손으로 단숨에 써 내려 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꿈은 꿈일 뿐이야. 아마 그것조차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 P23

"이봐, 그건 음악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니야. 흰 벽을 보는 법과 침묵을 듣는 법을 배우도록 해." - P24

내 오래된 친구인 루피노 호세 쿠에르보는 내가 젊은 시절에 자주 접했던 문법 학자야. 그는 100년 전에 이미 ‘해야만 한다‘와 ‘해야 했을 것이다라는 말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거든. 앞의 말은 의무이지만, 뒤의 말은 의심이나 추측이기 때문이지. 여기서 두 개의 예를 들어보겠어. 하나는 이거야. "그의 형제들이 공공사업 계약으로 부자가 되고, 대통령도 그걸 허락하기에 그 역시도 도둑놈일 거야." 그러니까 나는 무언가를 단언하지 않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이든지 내가 믿고 있다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그리고 믿는 것으로 보이기에, 비방이나 중상모략 따위는 없지. - P28

그건 그렇고, 당신은 택시 운전사들이 빈 택시로 다니는데 왜 손님들을 그토록 함부로 대하는 것이냐고 따질지도 몰라. 그건 그래야만 일이 생기기 때문이야. 어느 현자는 "노동이 인류를 타락시킨다."라고 말했지. 그럼 버스로 다니는 건? 음악 소리를 듣지 않고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그것은 산소 없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P31

바닥에 엎드리라고? 나 말이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명예와 체면이 있어서 그런 행동은 하지 못해. 그래서 내 귓가에는 마치 전기면도기의 날처럼 윙윙거리며 날아오는 총알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총알들 사이로 계속 길을 걸어갔어. 그러면서 오래된 시구를 생각했어. 그게 누구의 시더라? "아, 죽음이여, 화살에 실려 조용히 오라."라는 시구였어. 나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멀쩡하게 그곳을 지났고, 뒤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갔어. 호기심이란 악당들의 나쁜 습관이거든. - P34

도망친다고? 줄행랑친다고? 그건 내가 절대로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어. 결코 말이야. 죽음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심부름꾼이거든. - P35

햇빛을 받은 그의 몸에서는 금빛 솜털이 반짝거렸어. 그러니 어떻게 내가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있겠어! 하나의 영상이 1000개의 단어보다도 더 가치 있다면, 우리 아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겠어! - P38

그 장소에서 떠나기 전에 나는 우글대는 구경꾼들을 슬쩍 쳐다보았어. 그들의 야비하고 천한 영혼 밑바닥부터 말할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이 용솟음치고 있었어. 심지어 나보다 더 행복해했어. 죽은 사람과 전혀 관계없는 그 사람들이 말이야. 오늘 먹을 게 없을지 몰라도, 이야깃거리는 있으니까 그랬을 거야. 적어도 오늘 그들은 벅차고 충만한 삶을 산 것이거든. - P40

그는 병을 땄고, 한 모금을 마시고서, 입에 머금은 술을 내게 주었어. 그렇게 나는 그의 입에 있는 술을 마셨고, 그는 내 입에 있는 술을 마셨어. 그렇게 어리석은 삶, 불가능한 사랑, 타인을 향한 증오를 두고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큰 술병을 모두 비웠어. 그리고 다음 날 토사물 속에서 눈을 떴어. 그건 메데인, 그러니까 저주받은 도시의 악마들이었어. 우리가 그곳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삼켜버린 악마들이었어. 그들이 눈이나 귀, 코나 입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왔던 거야. - P41

시간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려. 심지어 관습까지도. 그래서 변화에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는 점차 유대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헤지고 누덕누덕 기운 침대보처럼 되어 버려. - P44

미래에 희망이 있으면, 현재는 아주 잘 흘러가거든. 과거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과거이고, 그것이 나를 지금 이렇게 지탱해주는 거야. - P53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계속 길을 갔어. 뛰는 건 좋지 않아. 뛰는 사람은 체면과 품위를 잃어버리고, 꼴사납게 엎어지고, 결국 체포되고 말아. 게다가 여기서는 오래전부터, 정말로 오래전부터 아무도 도둑을 뒤쫓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렸을 때는 천하고 시시한 보행자일지라도 법이라는 것의 보호를 받아 도둑놈 뒤를 쫓곤 했어. 하지만 오늘날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 그를 잡는 사람은 죽거든. 집단정신과 단체정신은 비열하고 야비하게 변했어. 겁쟁이 사냥개 같은 개자식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 쫓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지 마. 당신이 계속해서 보고 싶으면 말이야. 주변에는 경찰이 없었어. 아니 그들을 도와줄 경찰이 없었지. 세 개의 총탄이 내 아이의 쇳덩이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세 명의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그릴 수 있었어.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거든.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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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그 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 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 P201

이념이, 명분이 밥 먹여주나. 이 어려운 세월에 그건 오히려 입으로 가져가는 밥숟갈을 빼앗아가는 생존의 적이 아니냐. 이념이나 명분에 집착하는 것은 편집증일 뿐이다. 이념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한가지 선입견에 불과하다. 선입견을 좀 바꿔 바라보자. […]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감정의 혹사가 아닌가. 감상주의가 아닌가. - P204

너는 어서 골목길을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빨리한다. 의사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나. 날 저문 날 공장데기 아이가 길 잃기 쉬운 곳이란다.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버리고, 돈은 떨어져,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고······ 그럴 땔수록 길을 잃기 쉽단다. - P217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 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 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 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 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 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그것은 버스를 타고 한참 흔들리다보면 누구나 자연히 터득하게 되는 굳은 껍질이다. 치면 둔중한 금속성이 날 것 같다. 땀 젖고 끈적거리는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빨려들어갔나? 모두 저렇게 단단히 굳어버렸는데 그 멀컹한 손을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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