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맛 들이면 꼼짝달싹 못하고 만다. 껌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보면 벌써 때는 늦어버린다. 어느새 그 제품에 악착같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물거리던 애매한 동작은 힘차고 기계적인 저작운동으로 바뀐다. 혀끝에 얼마간 단맛을 주던 설탕기가 빠진 뒤에도 껌이 지닌 고무질 맛과 탄성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씹을수록 짜증나고 불만스러운 맛이지만, 웬일인지 당장 뱉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자학행위에 빠진 사람처럼 자꾸자꾸 껌을 쩍쩍 씹어댄다. 뱉어버리자, 뱉어버리자. 석달 동안 너는 이 생각에 항상 전전긍긍해왔다. 껌을 뱉어 버린 지금, 그렇다고 과연 너는 안전한가? 아니다. 사방에서 함부로 뱉어버린 껌들이 살아서 끈적거리고 있다. 구두에 밟혀 끈적거리고, 공원 벤치, 극장 의자에 달라붙어 방심한 궁둥이를 기다린다. 껌팔이 애들이 사방에 퍼져서 아직 껌을 사지 않은 손님들을 적발 해내어 강매한다. 그 질긴 점착력은 결코 소멸할 수 없으리라. - P228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양일을 사년 동안 착실히 죽여온 셈이다. 험담을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다짐할수록 웬걸 가슴은 무슨 보람으로 뻑적지근해지고 자꾸 입술이 달싹 거려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건 오장육부를 훑어내는 참기 어려운 가려움증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그 돈을 빌려주는 순간부터 제발 갚지 말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마 양일이 돈을 갚지 못할 지경으로 사정이 나빠지기를 소망했으리라. 그만큼 나한테는 붙잡고 늘어질 그의 약점이 소중했던 게 아닐까? - P263
"다섯시간 자면 합격하고 여섯시간 자면 불합격한다." 이것이 내 좌우명이었지만 내가 불합격할 운명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좌우명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별반 없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시간까지 합치면 오히려 내 수면시간은 여덟시간도 넘었을 터이다. 밤 한시가 가까워져 졸음이 엄습해오면 책상머리에 놓아둔 등산칼을 집어 들고 숫돌에다 슥슥 갈아 날을 세웠다. 그래도 졸렸다. 졸음기 가득 찬 내 눈에는 금방 간 칼날도 언제나 무딘 빛으로 침침했다. 나는 그 순간 제풀에 팩 골을 내며 칼을 꼬나잡고 눈을 홉뜬다. 이미 무수한 칼자국으로 뒤덮여버린 앉은뱅이책상은 울퉁불퉁 달 표면처럼 황량하고 서글프다. 제기랄, 나는 다음 순간 후, 하고 책상을 내려찍는다. 칼끝에 흰 나무 속살이 툭 튕겨나온다. 빌어먹을, 그래도 졸립다. - P264
나는 감상적이 되는 것을 죽기 만큼이나 싫어한다. 가슴 복판이 별안간 천야만야 고즈넉하게 가라앉고 콧날이 새큰거린다 싶더니 어느새 여름감기 콧물 같은 게 비어져나오는 기분을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한다. 내가 어느 편인가 하면, 버스간에서 감상적인 넋두리를 푸는 고학생에게 껌 한통 사느니, 차라리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만원권을 소매치기당하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강짜로 술을 뺏어먹는 게 낫지 술을 구걸하다니, 이런 빌어먹을. - P274
술집 안에 틀어박힌 무더위, 날이 저물어도, 주모가 연탄불을 옮 겨가버려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전기가 들어오자 탁자 주변은 여기저기 썩은 쓰레기 같은 그늘이 쌓이고 석쇠에 먹다 남은 돼지 고기 두점이 그 썩은 그늘에 더럽혀져 있었다. 이 더러운 그늘은 또 돼지 냄새와 비지땀에 뒤범벅이 되어 맨살에 맥질치고 있었다. 몸에 눌어붙은 돼지 냄새가 급속도로 썩어갔다. 돼지 냄새는 손톱 사이, 잇새, 식탁의 금 간 틈서리, 식은 석쇠에서 사정없이 썩어갔다. 우리가 먹은 돼지고기는 썩어가고 우리는 거나하게 야만스러워지는 것이었다. - P280
이때 문득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눈앞의 무사한 공간에 순식간에 번졌다가 사라지는 빛이 있다. 무얼까? 창 위로 재빨리 스치고 지나간 그 그림자는 아마도 국민학교 처마 밑에 살고 있는 비둘기들이리라. 완주는 학교 울타리를 올려다보았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하나 가득 퍼져 있는 운동장 위 짙푸른 공간. 울타리 너머 보이는 포플러나무들이 퍼석 마른 잿기둥같이 서 있다. 한여름 푸른 분수처럼 세차게 솟아올라 윤택한 빛을 튕겨대며 술렁거리던 것들이 어느새 저렇게 잎을 다 털려버리고 말았나? 이때 학교 후문의 급경사진 돌계단에 아이들 넷이 훌쩍 나타났다. 아이들은 계단 위에 여러 마디로 꺾인 자신의 그림자를 끌면서 급히 후문을 향해 올라갔다. 한 애가 축구공을 운동장 안으로 던져넣자 아이들은 일제히 문을 타고 넘어 짙푸른 하늘에 함빡 물들었다가는 문 안쪽, 능선의 지각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그 네가닥의 새까만 속력이 풍경을 뚫고 지나간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인데, 그런데도 풍경은 들쥐를 삼킨 뱀처럼 이상스럽게도 과장되게 부풀어올랐다. 돌계단과 후문이 한층 더 높이 솟아올라 흡사 바람과 햇빛이 가득한 노천무대같이 황량해 보인다. 어쩐지 그 쾌활한 아이들이 꼭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마음이 안쓰럽다. - P292
아이 넷을 삼킨 서편 하늘은 아까보다 더 불안스럽게 들떠 보인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재빨리 흘러갔다. 유리창이 덜컹거리지 않는 걸로 보아 바람은 꽤 높은 공중을 치닫고 있는 모양이다. 강풍에 휩쓸려 언저리가 헤실헤실 풀어진 구름떼가 계속 동쪽으로 밀려간다. 빛이 정체되어 보이는 평상시와는 달리, 지금 햇빛은 재빨리 움직이면서 사물 위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구름떼가 내던진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뒹굴 때마다 창밖 풍경은 전체가 흔들거린다. 앞집의 벽은 무슨 질펀한 손바닥이 쓰다듬는 것처럼, 혹은 이상한 심호흡에 빠져 있는 것처럼 벽의 누런 페인트 색깔이 밝아올랐다가는 어두워지곤 한다. 창틀에 올려놓은 맨발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햇빛도 환하게 부풀어올랐다가는 갑자기 핼쑥 오므라들고 있다. - P293
이렇게 부풀고 오므라드는 빛의 회전을 바라보는 동안 완주는 가벼운 현기증에 깜박깜박 떨어지곤 한다. 창밖은 시방 계절이 대 이동 중, 하늘 가득히 겨울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저 공중을 내달리는 바람이 곧 이 능선 아래로 덮쳐들 테지. 벌써 창가의 바람기가 을씨년스럽다. 발등을 감싸고 있는 햇빛은 미미한 바람결에도 쫓겨 덧없이 벗겨져내리고 발가락털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엄지발가락의, 구두에 짓눌려 죽은 세포 퇴적이 더욱 검게 질려 보이고······ 오직 담배연기만 창가에서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 P293
낮게 뜬 구름떼가 능선을 넘어 계속 동쪽으로 흘러갔다. 능선 위에 엎드린 시멘트벽돌집들이 겁에 질린 듯 몹시 창백해졌다. 하늘이 낮게 내려와 날카로운 날 같은 능선을 질편하게 내리누르고 능선을 따라서 대기가 끊임없이 흘러간다. 배합수가 나쁜 시멘트 벽돌담과 추녀 끝을 사정없이 할퀴면서. 매끄러운 능선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저 초라한 집들은 얼마나 서툰 줄광대들일까. - P294
이제 바람은 마침내 이 골짜기 밑까지 내려덮친 모양이다. 사방에서 줄에 널린 빨래들이 곤두박질치면서 미친 듯 펄럭거린다. 이 가난한 산동네의 누덕지고 빛바랜 빨래들은 바람만 불면 저렇게 제 분수를 훨씬 벗어난, 무슨 격정적인 깃발처럼 나부끼는 것이다. 유리창이 무시로 덜컹거리고 오싹오싹 추워진다. - P294
앞집의 지붕 위에는 바람에 휘말린 미친 햇빛이 나뒹굴고 있다. 저 지붕 위에 폭양이 내리쬐던 지난 8월, 혼자 영흥도에서 이박하고 돌아온 그날이었지. […] 그때 저 지붕은 기왕골마다 불아지랑이가 일어나 지붕 위로 내려뜨려진 푸른 하늘 자락이 너울거리고, 백탄같이 달궈진 기왓장 사이사이에 끼어든 콜타르 빛 그림자들이 흐느적흐느적 독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끓는 지붕, 누런 화염에 뒤덮인 모진 폐허. 분무기로 뿜어낸 듯 기왓골 군데군데 옅은 초록색 분말같이 밀생해 있던 이끼가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그만 허옇게 말라 죽고 만 것이었다. - P294
한번만 더 만나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을장마는 시작되고, 그는 이 창가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를 하릴없이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붕 위의 죽은 이끼 떼는 비가 와도 다시 회생하지 않았다. 낡은 필름이 영사된 스크린 위를 번쩍번쩍 흘러내리는 사선처럼 빗줄기들은 하루 종일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앞집의 저 홈통 끝에선 흰 손수건 같은 물줄기가 나부꼈다. 균질한 명도로 흐려져 있는 하늘, 물 젖은 기와들의 정수리에 떠올라 있는 은은한 광택······ […] 때때로 바람이 불어와 빗줄기를 흔들어놓으면 비에 가린 저 지붕은 장막처럼 술렁거리기도 했다. - P295
작년 겨울 어느날 둘이는 무심코 하인천행 기차를 탔는데, 말하자면 그게 불찰이었던 것이다. 그때 차창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왔는데, 완주가 지금도 그 온기가 기억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차내는 스팀이 꺼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서로가 갑자기 가까워져버린 것은 단지 그 날 추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추위를 별나게 타는 아이처럼 완주 곁에 바싹 다가앉아서 그 오죽잖은 햇빛을 손톱 끝으로 톡톡 튕겨대는 시늉을 하며 웃고 있었다. 우중충한 겨울 날씨를 꿰뚫고 뻗어 있는 레일의 흰빛과 수증기, 물이 얼어붙은 논 위를 곤두박질 치며 굴러가는 겨울 태양, 가슴이 울렁거리도록 느닷없이 불거터지는 기적 소리, 이런 것들이 아마 그녀를 조금은 감상적으로 만들었나보다. - P296
봄에도 가고 여름에도 갔다. 푸른 경기평야가 기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연도의 미루나무, 포도밭의 붉은 황토, 채석장의 흰 돌 따위가 모두 한데 어울려 창가에서 흐드러지게 무너지곤 했었다. 그건 한데 어울려 핀 풀꽃 무더기 같았다. - P297
결국 사랑은 스웨터 위로만 메마르게 비비적거리다 만 셈이었다. 화학섬유 스웨터끼리 비비적비비적 마른 전기만 일으키다 끝장난 것이었다. - P299
이제 해가 넘어간 모양이다.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언덕배기 주택지는 능선을 따라서 희끄무레한 잔광이 떠올라 있을 뿐 아래쪽은 꽤 어둡다. 모든 집들이 저 어둡고 질편한 평면의 품 안으로 여며들고 있다. 능선 위 잎 털린 나무마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목탄 화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 어째서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나? 왜 밤마다 어둠은 내려와 하는 어두운 손길로 사물들을 조그맣게 싸서 빛과 운동이 빠져나간 가공의 의한 뭉치로 만들어버리는가? - P302
그날밤 그는 밤새도록 술에 취해 바닷가를 헤매다녔다. 사방은 지척을 분간 못하게 어두웠고 어둠속에서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옷은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밤새도록 모래를 쓸어안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불면을 달래던 밤바다. 검은 목선 세 척이 흔들거리고, 은은한 미광이 덮여 있는 수면······ 모래톱에 닿는 잔물결은 부드러운 바람에 주름 잡히는 커튼 자락 같았다. 한숨처럼 다가와 모래톱 위로 볼을 비비며 뒹굴고 있었다. 왜 밤이면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빛깔을 잃어버릴까? - P303
완주는 어두운 책상 위를 더듬어 홍합 조가비를 손에 움켜잡았다. 이건 밤마다 불면증을 달래주는 내 소주잔, 영흥도 바닷가에서 잔물결 타는 종이배처럼 비딱하게 기울어져 모래톱 위에 얹혀 있었지. 모래알의 세계, 그 마멸의 시간 속으로 이미 떠나 있는 이 조가비에 무심히 시선이 끌리어갔었다. 그 익명의 아름다움이 눈의 망막으로 옮아붙은 거였지. 그래서 그 조가비를 주운 것이지 별게 아니었다. - P304
이때 문득 오른쪽 손등에 초록색 반점이 하나 뚝 떨어졌다. 뭘까? 아주 조그만 풀벌레. 하도 작아서 발이 안 보일 지경이다. 여태 이런 여름것이 살아 있었다니. 완주는 별생각 없이 왼쪽 손가락으로 그 곤충을 부드럽게 누른 채 옆으로 칙 그어버린다. 그러자 벌레는 없어지고 대신 손등에 푸른 잔디 잎새 같은 흔적만 남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치 그 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P305
마을은 온통 타버린 잿더미였는데 그 운동장만이 햇볕에 내다 넌 넓은 광목천같이 희게 표백되어 있었다. 잔모래알들이 햇살을 받자마자 낱낱이 수직으로 되쏘아서 해가 번들거리는 중천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었을까? 뜨겁고 바람기 한점 없는 정오. 고막에 달라붙은 매미 울음소리. 그림자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사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 - P309
물속에 들어온 것이 금방 후회스러워졌다. 물은 뜨뜻무레해서 전혀 시원한 맛이 없을뿐더러 다리의 맨살에 부딪쳐 밀려날 때마다 밀가루 반죽같이 육중하고 끈끈하다. 정말 물속은 흐느적거리는 무성한 물풀 때문인지 아주 뻑뻑하게 느껴졌다. 비린 물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입을 벌려 숨을 쉬었다.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뿜어 물고랑을 파면서 가운데로 헤엄쳐갔다. 다리는 앞질러 있는 팔의 리듬을 능숙하게 쫓아오고 물발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로 국수 가락처럼 길게 빠져나간다. 가슴은 맞닿은 평평한 물을 능히 지탱 했다가는 다음 순간 그걸 으깨버리고 있다. 가느다란 물가락들이 헝클어지고 부서지면서 어지러이 온몸에 감겨오고, 몸이 그럭저럭 밍근한 물 온도에 익숙해져갔다. 맷방석만 한 개구리밥떼가 올망졸망 물결 타며 뒤로 물러갔다. 물 가운데로 오자 나는 어깨에 달라붙은 개구리밥을 떼어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리 위 어느 뜨거운 허공 일점을 후벼대는 풍뎅이 날개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한낮. 수면에 흰 막을 친 듯 엉겨 있던 수증기가 조금씩 흔들거리며 피어오른다. - P310
나는 하루 종일 뙤약볕에 땀 흘리며 하릴없이 동네 안팎을 터벅터벅 걸어다녔다. 길 복판이나 돌담 그늘 같은 데서 아이들과 마주 친다. 녀석들은 언제나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서로 맞붙어서 한낮의 시커먼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는 게 마치 단단히 뭉 쳐진 바윗돌이었다. 그 바윗덩어리가 내가 다가가는 눈치면 힘차게 무너져 사방으로 튀는 거였다. 공깃돌을 내던지고 된 코를 손으로 풀면서 햇빛 속에 뿌려진 그 공깃돌처럼 새까만 점들이 되어 눈부신 길 복판에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멀어갔다. 그러면 내 앞 길은 더 뜨겁고 적막해버린다. 길가에 질긴 질경이풀이 뜨거운 흙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 P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