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내 거리의 눈은 쌓여간다. 아이의 키만큼. 눈은 자란다. 어른의 키만큼. 겨울이 깊어지는 만큼 더 높고 더 단단하게.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사랑하고 증오하고 기뻐하고 원망한다. 어떤 연인들은 삶이 그대로 멈추기를 바란다. 그들의 바람대로 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 않는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 P203
한동안 보이지 않던 행복이 어느 틈엔가 나타나 그들의 옆에서 웃었다. 이제 행복은 더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때때로 내리는 눈과 마찬가지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행복이 오기는 온다는 것을 이제 그들은 알게 됐으니까. 삿포로의 할머니가 한 말처럼, 그렇게 긴 삶이 계속됐다. - P205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이 떠오른다. 프랑스어 벨 에포크란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전까지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번성 했던 시절을 회고적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적으로‘라는 말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이어지지 않았어도 전쟁 전의 유럽이 그토록 평화롭고 풍요롭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회고적으로‘라는 말은 그뒤에 일어난 끔찍한 일, 즉 전쟁을 겪고 난 뒤에야 그 시절이 제대로 보였다는 뜻이다.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 P214
"책임감?" "다르게 말하면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리고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영향을 받는 만큼 그 사건이나 죽은 아이들의 의미도 달라질 테고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책임감이에요. 그 사건에 기꺼이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겠다는 것." - P236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주희의 눈에 수백 개의 별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수천 개의 별들까지 볼 수 있다. 하지만 주희가 보지 못하는 별들은 그보다 더 많다. 우리 은하계에만 천억 개 이상의 별들이 있으니까. 누구도 보지 못해 아직 밤하늘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별들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천문학적인 발견이란 관측을 통해 어떤 별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어떤 별은 우리가 보는 순간부터 반짝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측이 별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 P238
느닷없이 떠오르는 나의 생각처럼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건 누구의 생각일까? 세상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 P253
이 놀라운 것들은 다 무엇인가? 답을 제시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와 지켜보고 돌보는 사람이 될 때 모든 질문은 감탄으로 바뀐다. 이 놀라운 것들은 다 무엇인가! 질문을 하는 것도 나의 마음, 감탄을 하는 것도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에 따라 너무나 많은 삶이 입을 다물었다가 또 활짝 펼쳐지는 것이다. - P257
그날 밤, 엄마를 만나러 가는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답이 될 수 없는 곳에 지금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로는 종교란 대답하지 않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날 밤, 내게는 종교가 필요했다. 놀라고 감탄할 뿐, 어떤 대답도 주지 않을, 그런 종교가. - P258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 P262
죽어가는 사람은 늘 있을테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여름은 모두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이 있었다. 좋은 여름은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은 최고의 여름······ 나의 마음에 따라 이 름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여름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하나뿐인 여름이 해마다 시작된다. 그 여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나의 마음에 달린 문제다. - P263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 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 P264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 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 P266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 P281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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