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세계는 급속도로 풍화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풍화는 건물 표면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라는 영구적인 음영을 남긴다. 풍화가 만들어내는 빛과 어둠, 크고 작음, 또렷함과 모호함, 실재와 가상, 미켈란젤로 적인 의미의 ‘살아 있는‘ 돌과 ‘죽은‘ 돌, 정신과 물질의 대비는 풍요로 착각되지만, 그것은 파괴로 가는 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잠시의 풍요이다. - P143

빅토르 위고는 한 소설에서 책이 건축보다 더 오래간다고 말했지. 시간의 풍화를 막는 책의 물매가 건축의 물매보다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야. 책은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건축은 그럴 수 없으니까. 하지만 책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새로운 내용을 드러내진 않아. 어떤 질문에도 책은 정해진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지만 풍화되는 건축은 항상 새로운 대답을 내놓지. 쇠퇴한다는 것, 몰락한다는 것, 풍화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야.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영혼은 늙게 태어나 시간이 갈수록 어려지는데 이것이 인생의 희극이다. 반면에 육체는 어리게 태어나 점점 더 늙어가니 이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풍화되어야만 영혼이 드러나게 돼 있어. 폐허마다 영혼이 드러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저절로 드러나는 영혼이지. 이 폐허는 끝이 아니야. 이건 이 집의 가장 어린 영혼, 새로운 시작이야. 알겠니? - P145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관계성의 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인터뷰를 할 때 혹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물 한 잔을 떠올리는데, 그게 바로 그녀가 말하는 관계성의 물이었다.
"일단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는 게 중요해요. 물 한 잔 정도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면 관계성이 형성되거든요. 물 한 잔을 준 사람과 물 한 잔을 받은 사람. 그렇게 서로 맺어지는 거죠. 한 번 맺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좀 쉬워집니다." - P163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 P166

"그 언니의 손을 맞잡기 전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어요. 다 잘될 거야. 괜찮아질 거야.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하고, 아빠는 깨어날 거야. 하지만 어느 순간 머리는 폭발한 것처럼 멍해졌고 끔찍한 공포가 밀려왔죠. 그때 그 언니의 손을 잡게 된 거예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 언니의 손에만 집중했어요. 그러자 마치 태어나서 누군가의 손을 처음 잡아본 것처럼 그 손의 물성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물렁물렁한 손바닥이라든가, 그 안에 든 뼈 혹은 흐르는 피의 온기 같은 것들이. 나는 눈을 감고, 그 느낌에만 집중했어요. 거기서부터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 작지만, 내 쪽에서 찾아낸 좋은 느낌에서부터." - P167

"밖에서도 검게 칠하고 안에서도 검게 칠하면, 인간은 그 즉시 하찮아집니다. 그것 역시 인간진화학의 법칙이죠. 벌레보다도, 티끌보다도 더 하찮아지다가 인간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자 협동농장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렇게 두 손을 들어 바라봤습니다. 내가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