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강둑에 갔을 때 이래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체취. 루시의 가슴 속에서 진실이 솟아오르며 흙탕물을 만들었다. - P266

루시는 전처럼 혼자 강물에 몸을 담근다. 피부가 쪼글 쪼글해진다. 그래도 루시는 계속 물에 떠다닌다. 땅에 있을 때도 물에 있을 때처럼 쪼글쪼글할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친구 옆에 앉아 웃음을 짓고 있을 미래. 다른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루시는 자기가 말한 대로 되었다. 고아. 아무도 없음. 돈도, 땅도, 말도, 가족도, 과거도, 집도, 미래도 없다. - P267

샘은 씹고 말하고 삼키고 허풍을 치고 루시의 배 속에는 허기가 감돈다. 거친 땅에 대한,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대한, 스위트워터에서 야생성과 함께 사라진 공포에 대한 굶주림. 간을 안 한 귀리죽과 차갑게 식은 콩이 특식이 되는 길, 몸을 달구어 깨어나게 하는 길에 대한 굶주림. 거리가 전부 지도로 기록되고 알려진 이 따분하고 평탄한 곳이 아니라. - P257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자 샘의 매력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게 보인다. 그 아래에 바를 죽인 것과 똑같은 과격함, 쓰라림, 희망이 있다. 루시가 스스로 고아가 되어 떨어져 나온 옛 역사가. - P277

주황색 불빛이 샘의 광대, 샘의 짙은 색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몇 해 뒤 샘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스테이크를 먹어 대서 몸집이 커지고 샘이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모습이 되겠지. 열한 살 때 이미 샘은 선언했다. 모험가. 카우보이. 무법자. 어른이 되면. 사라진 오 년, 잃어버린 오 년, 샘을 가둘 장소도 다잡을 사람도 없었던 오 년 뒤에 돌아온 샘이 오히려 더 익숙하게 보인다. 더욱 샘다워진 샘. - P281

루시는 거리가 텅 비기를, 샘이 으르렁거리고 난 뒤에 생겨나 아직도 멈추지 않은, 웃자란 풀로 뒤덮인 좁은 오솔길처럼 말로 할 수 없는 세계로 이어지는 떨림을 느끼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샘이 좋다고 대답한다. - P282

거기, 진흙탕 속을 헤집어 보면, 가장 밑바닥에 강철 이빨을 가진 질투가 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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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어.
"다시는 거짓말하지 마." 네 엄마가 나에게 경고했거든.
그때 네 엄마에게 나머지 진실은 절대 말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말했다가는 나를 떠날 테니. 나는 내 이야기, 진짜 이야기를 내 안 가장 깊은 곳에 감춰 두었어. 그곳에서는 내가 여전히 이 언덕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어린아이였지. 내가 어디 출신인지는 절대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 거짓말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어. - P231

사람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어떻게 알겠니? 그 순간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해 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자기 파트너 하고 무슨 내기라도 한 걸까? 담배가 지겨워져서 없애 버리려고 한 걸까? 덫 가장자리까지 와서 갑자기 움찔 경계하며 본능적으로 털을 곤두세우는 짐승의 행동 같은 것이었을까? 궁지에 몰리면 귀를 내리깔고 간사하게 사람 아기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재칼처럼 군 걸까? 외로웠던 걸까? 어리석었던 걸까? 친절했던 걸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훑어보며 재 볼 때 머릿속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 때문에 어떤 날에는 우리를 칭크라고 부르고 다른 날에는 그냥 내버려 두고 또 어떤 날에는 자선을 베푸는 걸까? 나는 모르겠다, 루시 걸. 아무래도 모르겠어. - P234

"넌 어디서 왔어? 저 사람들하고 같아?"
그날 밤 나는 반은 미친 상태였고 억눌러 놓은 진실이 배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어. 그러다 보니 말하게 됐지. "이 지역 출신이야. 여기서 멀지 않아."
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어.
나는 그의 파이프를 입에 넣었어. 그의 담배를 급히 빨았어. 파이프 불빛 너머 지평선에서 아직도 불이 타고 있었어. 동물들이 달아났고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겠지. 나는 파이프를 빨아 불빛을 내며 뭐가 웃기냐고 물을까 생각했지만, 그 사람을 비롯해 수천 명이 지난해 이곳에 와서 이 땅을 파괴하고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 한다는 게 떠올랐지. 저렇게 불타고 있는 게 원래는 내 땅이고 빌리의 땅이고 인디언들의 땅이고 호랑이와 버펄로의 땅인데—그때 네 엄마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의. - P235

불의 생각은 달랐어. 불은 그냥 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솟구쳤어. 거대한 짐승이 하늘로 솟아올랐어. 검은 연기 줄무늬가 있는 주황색 불꽃. 언덕에서 태어난 존재, 이 땅이 느끼는 분노에서 태어난 존재. 전혀 온순하지 않았지. 짐승을 궁지에 몰아 본 적이 있니? 생쥐조차도 최후의 순간이 오면 돌아서서 문단다. 죽을 게 확실하다 싶으면. 그 불꽃과 연기 속에서 루시 걸, 그 언덕이 정말로 호랑이를 낳았어. - P237

오랜 세월이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어.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할 수 있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그럴 거야. - P238

정말 그랬을까? 베인 상처가 깊지는 않았는데 힘줄을 깔끔하게 끊어 버려서 그 뒤로 다시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어. 피부는 아물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 어떤 본질이 베여 나갔어. 그 날카로운 상처가 우연히 생긴 걸까? 아니면 송곳니를 드러낸 포식자, 다른 모든 게 다 죽고 사라진 뒤에도 이 언덕을 지키는 짐승의 발톱 때문이었을까? 내 주머니 속의 비밀, 짤랑거리는 은에 대한 보복이 었을까? 호랑이의 얼굴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아? - P242

네가 더 크면, 루시 걸, 때로는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엄마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았어. 엄마가 뭘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다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무얼 느끼는지. 나를 아프게 할 지도 위의 정확한 지점을 알고 싶지 않았어. - P245

나는 부(富)를 찾아냈으나 그게 내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땅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든다. 너랑 샘을 만들었으니까. 너희는 잘 자랐잖아? 나는 너희를 강하게 가르쳤어. 단단해지라고 가르쳤어. 살아남으라고 가르쳤어. 지금 네가 샘을 돌보고 내 시신을 제대로 묻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그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 싶다.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이 가르치지 못한 게 아쉽다. 부족하나마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해 봐야 할 거야. 지금껏 평생 그래 온 것처럼.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이것만 기억해라. 가족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야. 팅워.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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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관한 교훈.
멀리에서 볼 때는 알 수가 없었다. 루시는 거리를 두고 광부의 아내들이 판잣집 사이를 오가며 빨래판, 골무, 요리법, 비누를 빌리는 것을 보았다. 자급자족이란 걸 몰라. 바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바는 루시에게 침묵이 수다보다 낫다고 가르쳤다. 바는 하늘의 벌린 입 아래에 서서 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쳤다. 열심히 들으면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 P153

지금 루시는 제빵사가 하는 정육점 주인 이야기, 짐의 상점에서 일하는 아가씨 이야기, 또 광부의 아내가 카우보이와 같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알록달록한 색실로 마을을 하나로 엮는다. 현관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처럼 화려하게. 선생님은 루시가 훔쳐 가려 하기라도 한 양 얼른 태피스트리를 치워 버렸다. 루시는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면 손을 대 보고, 몸에 걸쳐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유리창이 있고 사람들의 대화가 방 안을 따뜻하게 달구는 달콤한 일요일의 분위기처럼 몸에 걸쳐 봤을 텐데. - P153

말할 수 없는 말이 입에 침으로 고이고 루시는 몰래 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식탁 위에 떨어진 소금 가루를 찍는다. 혀끝에서 어찌나 짜릿하게 반짝이는지. 그 순간이 어찌나 짧은지. - P153

오늘 저녁도 감자, 골수, 연골을 푹 무를 때까지 끓인 죽이다. 아직 한 주의 중간이고 일요일은 아직 멀었는데 루시는 벌써 신물이 난다. 소금을 안 넣은 밍밍한 고기 맛, 발꿈치를 거칠게 만드는 흙바닥, 사방에서 금이 아우성을 치는데 아끼고 줄이는 생활.
"마? 그 땅 살 만큼 돈 모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려요?"
마는 루시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마는 비밀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에 대한 교훈. - P154

마는 손수건을 루시의 손에 올려놓는다. "당분간은 써도 돼, 뉘얼. 선생님이 정말 준 걸로 생각할게."
이번에는 마가 보는 앞에서 소금을 스튜에 넣는다. 마는 신세 지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고, 냄비 위로 몸을 숙인다. 루시는 마의 얼굴에서 자기가 느끼는 허기와 똑같은 것을 보고 흠칫 놀란다.
손이 미끄러진다. 하얀 덩이가 표면에 떨어져 녹는다. 너무 많이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저녁때 자기 몫을 허겁지겁 먹고 그릇을 싹싹 긁고 더 달라고, 또 달라고 한다. 마의 입가에 진한 스튜 국물 자국이 남는다. 너무 급히 먹느라 닦을 새도 없다.
루시는 두 입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혀가 아릿하다. 씁쓸하고 달갑지 않은 다른 맛이 소금과 같이 섞여 있다.
수치의 교훈. - P158

이런 감정을 무어라고 부르나? 바싹 마르면서 동시에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 루시의 입이 마르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러나 몸 안이 출렁인다—마는 루시가 물이라고 했다—바가 말하는 세상이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재빨리 움직이면 세상의 얇은 막을 뚫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태고의 호수가 밀려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P162

루시는 그 쓰이지 않은 역사가 두렵다. 바의 이야기 전부를 허풍이라고 치부하는 편이 더 쉽다. 왜냐하면 믿는다면, 그 믿음이 어디로 가나? 호랑이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인디언들이 사냥을 당하고 죽어 간다는 것도 믿나? 사람만 한 크기의 물고기가 있었다는 걸 믿는다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낚은 물고기처럼 줄줄이 꿰어 끌고 간다는 것도 믿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런 역사에는 고개를 돌려 버리는 편이 더 쉽다. 마른풀이 쏴 우는 소리 말고는, 사라진 길의 흔적 말고는, 따분해하는 남자들과 야박한 여자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신소리 말고는, 버펄로 뼈의 갈라진 무늬 말고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 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역사책을 읽는 편이 훨씬 더 쉽다. 이름과 날짜가 벽돌처럼 질서 있게 쌓여 문명을 이루는 역사. - P162

루시는 그 다른 역사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야생의 역사.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어슬렁거린다. 야영지 모닥불이 만드는 빛의 테두리 바로 바깥쪽에 도사린 짐승처럼. 그 역사는 언어가 아니라 울부짖음과 장단과 피로 말한다. 그게 루시를 만들었다. 호수가 금을 만든 것처럼. 샘의 야생성, 바의 절름발, 큰 바다 이야기를 할 때 마의 목소리를 가득 채우는 갈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역사를 내려다보면 루시는 머리가 어질해진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봐서 바와 마가 자기보다 더 작아 보일 때처럼, 바와 마가 자기들의 바와 마 들과 함께, 사라진 호수보다도 더 큰 대양 너머까지 줄줄이 뻗어 있는 듯이. - P163

해가 타오른다. 물이 루시에게서 놀라운 속도로 빠져나간다. 사라진 물은 전부 어디로 가는 걸까? 호수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귀신이 되는 걸까? 어떤 장소가 기억하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 대상에 분노할 수 있을까? 루시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루시는 생각한다. 난 아니야. 난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았어. 나를 도와줘. - P164

마가 몸 안에 지니고 있던 이야기는 아기보다도 크고, 서부보다도 크고, 루시가 태어난 세상 전체보다 더 크다. 마의 몸 안에는 돌로 포장된 넓은 길, 야트막한 붉은 담, 안개와 바위가 있는 마당이 있다. 여주를 키우고 이 마른 땅에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매운 고추를 키우는 곳. 그곳이 집이다. 짙은 갈망으로 마의 억양이 더욱 억세어져 루시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집이라는 말은 마가 감춰 놓은 네 번째 책, 마의 감은 눈 뒤쪽에 쓰인 책에서 읽어 주는 동화 속 이야기 같다. 마는 별 모양 과일 이야기를 한다. 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귀한 녹색 돌. 마가 태어난 곳의 발음할 수 없는 산의 이름. - P169

루시는 마가 자기가 먹어 보지 못한 별 모양 과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핥는 게 싫다. 루시는 마가 어릴 적 살던 집의 기와지붕이야기를 하며 자기가 사는 집 지붕을 욕하는 게 싫다. 양철 지붕이나 캔버스 천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가 말하는 두 줄짜리 피들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릴 때도 있는데. 마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먼지가 언덕을 부드러운 금빛으로 덮을 때도 있는데. 루시는 마의 거리가 왜 더 예쁘다는 건지, 마의 비가 왜 더 좋다는 건지, 마의 음식이 왜 더 맛있다는 건지 말해 달라고 한다. 묻고 또 물으며 루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마는 베개 속으로 파고들어 아무 답도 들을 수가 없다. 마치 루시의 말이 폭력이기라도 한 것처럼. - P171

그렇지만 루시와 샘은 아이다. 아홉 살과 여덟 살. 장난감이고 무릎이고 팔꿈치고 성하게 간수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루시와 샘은 자기들을 부르는 이름을 자는 도중에 마룻바닥 틈새로 떨구어 버린다. 다음 날이면 또 있을 거라고 어린애답게 믿으면서. 더 많은 사랑이, 더 많은 말이, 더 많은 시간이, 짐마차를 타고 마차 좌석에 앉은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며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리듬에 따라 잠에 빠지면서 갈 수 있는 더 많은 곳이 있을 거라고. - P172

비가 내리며 땅을 무르게 녹이고 개울을 붇게 하고 공기를 차갑게 식히는 소리를 듣다가 루시는 급작스러운 공포를 느낀다. 마가 양동이에 든 더러운 구정물을 쏟아 버릴 때처럼 그들 가족이 내버려지는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언덕에 그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뭐 하나라도 남을까? - P179

선생님이 한 걸음 다가온다. 눈빛이 열렬하다. 마는 눈을 돌린다.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집 안을 둘러본다. 금이 감춰진 데가 아니라 비가 들이치는 창문에, 검게 변색한 양철에, 씻다 만 그릇에 눈이 머문다. 루시는 마가 어디를 볼지 안다. 루시가 깨끗한 학교나 햇빛이 가득한 응접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저절로 보게 되는 곳들. 그들 집의 어둡고 더러운 곳들. 그들의 수치. - P184

루시의 피투성이 입이 바싹 마른다. 루시는 목마름을 느낀다. 무언가 부족함을. 축축한 집 안에 고인 갈증. - P184

너희 선생님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 선택지도 버리지는 말아야지. 니즈다오, 루시 걸, 진짜 부가 뭔지 아니?" 루시가 마의 옷 속에 숨겨진 주머니를 가리킨다. "부두이(아니야), 뉘얼. 내일이라도 내가 이 금을 써 버리면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아냐—우리는 선택지를 많이 가져야 해. 그건 아무도 뺏을 수 없는 거야." 마가 길고 낮게 한숨을 쉰다. 나중에 루시는 바람이 너무 좁은 틈을 통과하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의 그 한숨을 떠올릴 것이다. "메이관시, 나이 들면 너도 알 거야." - P186

루시는 참을 수 없다. 불어나는 개울처럼, 몇 주 동안 몇 달 동안 고인 것을. 눈물이 점점 격해진다. 루시는 거울로 핏자국을 닦아 낸 턱이 다시 축축이 젖은 걸 본다. 한 방울이 마의 손으로 떨어진다. 루시는 마를 닮지 않았다. 마의 미모를 물려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그러진 거울 속에 닮은 데가 있다. 거울에 비친 마의 모습에는 눈물 한 방울 없어도 루시의 것에 상응하는 슬픔이 있다. 마는 손에 떨어진 루시의 소금을 입으로 가져가 깨끗이 빨아들인다. - P187

여러 해 전 짐마차가 공격받았을 때 어떻게 살아남았나?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다친 노새를 남겨 두었고 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때는 마도 은이나 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안 했다.
"볘칸(보지 마)." 도망치면서 마가 말했다. 그래도 루시는 돌아보았다. 재칼 무리가 다가오면서 어둠 속에서 여남은 개의 바늘구멍 눈이 빛났다. 살아 있는 노새가 미끼였다. 희생물이었다. 루시는 그건 견딜 수 있었다. 죽은 동물은 무수히 봤으니까. 루시가 몸서리친 것은 마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충직한 노새를 돌아보았지만 마만은 자기가 내린 지시를 따랐다. 마는 입술을 깨물었고 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아마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마는 아픈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199

마는 망가진 문, 그리고 그 너머를 가리킨다. 집집마다, 불 켜진 창문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언덕을. 마의 증오는 그 모두에게 미치고 남을 만큼 크다. - P202

번개가 번쩍인다. 한 번, 두 번 연달아. 번개가 지나간 다음 루시는 빛에 얼얼해진 눈을 깜박인다. 방은 더 어둑해지고 마의 얼굴도 어둑하다. 분노는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마의 미모를 늘 쫓아다니는 슬픔이다. 마의 아픔.
"너를 사로잡았구나." 마가 말한다. 마의 손가락이 루시의 손으로 파고든다. "이 땅이 너랑 네 동생 둘 다 제 것으로 삼아 버렸어.스마(그렇지)?"
그건 바가 하는 말이다. 재칼과 그들의 법은 다른 말을 한다. 루시는 다른 곳에는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대답할 수가 없다. - P203

"니지더(기억나), 우리가 너희 선생 만나러 갔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마가 루시의 손을 놓는다. 마는 드레스 안에 있는 주머니를 움켜쥔다. 이제는 비어 있을 텐데도, 재칼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못 찾았는데도, 마는 그 주머니에서 위안을 얻는 듯하다. "혼자 가고 싶다고 했지. 네가 말했어. 엄마 도움 필요 없다고—" 마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마가 루시의 뺨을 쓰다듬는다. 너무나 익숙해서 루시가 앞으로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떠올릴 수 있을 손길. 마는 루시를 한참 붙잡고 있다가 놓아준다. - P204

그래, 루시 걸. 나도 너처럼, 나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게 아니야. 그렇다고 그걸 핑계로 삼지는 마라. 나한테 아빠가 있다면 평소에는 나를 따스하게 감싸 주고 가끔은 땀이 나도록 때린 해가 아빠겠지. 나한테 엄마가 있다면 내가 드러누워 잘 때 나를 폭 안아 준 풀이 엄마겠지. 나는 이 언덕에서 자랐고 언덕이 나를 키웠어. 시내와 바위, 키 작은 참나무가 한 덩이처럼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덮었는데도 나는 들여보내 주던 골짜기. 나는 마르고 날래서 나무 틈새로 빠져나가고, 가지가 얽힌 녹색 천장 아래 공간을 뚫을 수 있었어. 나한테 민족이 있다면, 빛을 반사하는 못에서 볼 수 있었지. 물이 어찌나 맑은지 이 세상하고 정확히 똑같은 세상이 거기 비쳤어. 언덕과 하늘, 나하고 똑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 나는 내가 이 땅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자랐어, 루시 걸. 너하고 샘도 마찬가지지. 네 외양이 어떻든 간에. 어느 누구든 역사책을 들고 너한테 다른 소리를 하게 하지 마라. - P212

네가 어릴 때는 예쁜 이야기들만 들려줬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 너 내가 모질다고 생각했니? 이제 너도 진실을 알지. 세상은 훨씬 더 모질다는 것 말이야. 불공평하지만, 너와 샘은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어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어쩌면 오늘 밤 동안에,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 P213

너는 그걸 교훈으로 삼아라. 항상 왜냐고 물어. 너의 어떤 부분을 원하는지 꼭 물어보라고. - P215

"네 할 일을 해. 돈값을 하라고." 그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들었어. 질문을 꿀떡 삼켰지. 내가 이 백 명이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그 비밀은 깊이, 저 깊이, 내가 어릴 때 너무 어리석어서 내 손에서 금을 놓아 버렸던 때의 그 여린 구석과 같이 숨겨 놓았어. - P219

살면서 많은 걸 잊어버렸어. 빌리의 얼굴, 양귀비꽃 색깔, 이미 어깨가 쑤시는 상태로 주먹을 꽉 쥐고 잠에서 깨지 않도록 푹 자는 법, 비 내린 뒤 흙냄새를 가리키는 단어, 깨끗한 물 맛. 죽고 나니 또 잊히는 것들이 있다. 주먹을 휘둘렀을 때 손가락 뼈마디가 갈라지는 느낌, 내 발가락 사이에서 질척거리던 진흙, 손가락과 발가락과 굶주림이 있을 때는 어땠던가 하는 것들. 언젠가는 나 자신에 관한 모든 걸 잊는 날이 오겠지. […] 내 육신뿐 아니라 네 피와 네 말 속에 있는 미미한 내 흔적까지도 묻어 버린 다음에. 하지만. 내가 언덕 위를 떠도는 바람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바람은 여전히 한 가지만은 기억하고 풀잎 하나하나에 대고 그 기억을 속삭일 거라고 생각한다. 네 엄마가 나만 쳐다봤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어찌나 눈이 부신지, 나약한 인간이라면 두려워했겠지. - P226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덜컹 움직였어. 어릴 때 나는 뼈가 흔들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곤 했어. 빌리는 그걸 호랑이 울음이라고 불렀어.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그날 호수 옆에서 내 가슴이 으르렁 울었어. 배가 도착한 날부터 나를 슬금슬금 쫓아왔던 것, 밤에 네 엄마를 안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던 것이 그날 밤 나를 확 덮쳤어. 내 심장에 발톱을 꽂았어. 몇 주 동안 네 엄마의 언어를 규칙으로 금지해 놓고는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언어를 입에 담았다.
이백 명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욕을 가장 먼저 배웠지. 하지만 연인들이 하는 말도 들었어.
친아이더, 나는 네 엄마한테 말했어. 그냥 짐작이었지. 그게 진짜 무슨 뜻인지는, 네 엄마 눈에서 그걸 보기 전에는 몰랐어. - P227

맞는 말이라고 해서 사실이 되지는 않을 때가 많아, 루시 걸. 말하는 사람,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이 사실을 정할 때가 있지. 하수인 들한테 총이 있으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는 수밖에. - P230

그 사람들이 내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어. 배도 철도도 내 것이 아니라고 했어. 철도를 놓는 일은 힘들고 끔찍할 거고 부자로 만들어 주지도 않을 거라고 했어. 어렸을 때 나는 새끼 새 솜털을 뜯어 분홍색 속살이 다 드러나게 한 적이 있었어. 그래놓고 풀밭에 토했지. 사실을 말하니까 그때처럼 토할 것 같아졌어. - P230

때로는 대가를 돈으로 치르지. 때로는 대가를 존엄으로 치러야 해.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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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물과 아늑한 방, 새 옷과 목욕이 간절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물건일 뿐이다. 그것 이상은, 루시도 모른다. 몸 안에 생긴 텅 빈 자리에 전에 담고 있던 것들을 담을 수가 없다. 무덤을 파낸 자리에 원래 흙을 다 다시 넣지 못했던 것처럼. 너무 깊이 파면,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파내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광부들은 안다. 바의 시신, 마의 트렁크, 판잣집과 개울과 언덕—이 모든 걸 루시는 기꺼이 두고 왔다. 샘만은 곁에 남아서 함께 미래로 건너갈 거라 기대하면서. - P92

가족이 우선이야. 바가 말했고, 마도 그렇게 말했다. 바가 때리고 화를 내기는 했으나 그래도 루시는 마지막까지 바의 그 신념은 존중했다. 그 신념이 루시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 P94

샘은 이제 다가오지 않는다. 루시는 뒤로 물러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다. 루시가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서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기쁨이 솟는다. 몸의 일부는 이미 스위트워터에 가 있고 자기가 고아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연습하고 있다. 마음속 아주 작은 부분, 맺히고 꼬인 부분은 샘하고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 샘의 기이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란 것에 안도한다. - P96

샘이 공포에 질리자 도로 어려 보인다. 루시가 새로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으로 루시는 동생을 보면서 자기 몸에서 피와 함께 연민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아까와 다른 무엇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다. - P97

바가 흔들의자를 가져오라고 한다. 샘이 얼른 의자를 들고 문턱을 넘는데 의자 위에 쌓인 널빤지들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루시가 달려들어 널빤지를 잡는다. 그러다가 발끝으로 호랑이의 마지막 획을 건드린다.
루시는 말할까 말까 생각한다. 그러면 마는 그 의식을 처음 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바는 루시에게 화를 내며 다쭈이 (수다쟁이)라고 하며 아무 때나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 할 것이다.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냄새가 나는 집, 오래된 닭똥 얼룩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않듯이. 그렇게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운다. - P103

"당분간만이야." 하루의 시작일 수도 있는 하루의 끝이 되면 바가 약속한다. 밖은 다시 어두워져 있다. 이맘때면 늘 슬픔이 저 멀리 언덕 위로 사라지는 햇빛 줄기처럼 루시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른 광부들은 너덧씩 무리를 지어 서로 등을 치고 인사를 하고 불평을 나누지만, 바와 루시는 따로 걷는다. 바가 루시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팅워. 계획이 있어. 원한다면 곧 학교에 갈 수 있어, 뉘얼(딸)."
루시는 바의 말을 믿는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믿음이 고통을 더 쓰라리게 한다. 땅굴 안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랜턴 불빛이 눈을 시리게 하듯이. - P107

루시는 마가 욕을 하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날 밤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마가 그 뼈와 함께 얼마나 많은 해를, 얼마나 많은 세기를 삼켰을까? 오늘 밤 무언가 다른 것이 마의 목구멍으로 기어 나오고도 남을 만큼은 될 것이다. 무언가 거대하고 거친 것이. 역사, 루시는 갑자기 그 말을 떠올린다. 이곳에 오기 전의 전 마을에서 술 취한 사람이 그들의 짐마차에 침을 뱉었던 일이 생각난다. 바와 마는 앞쪽 만 보고 있었지만 술꾼은 땅이 어쩌고 주인이 어쩌고 법적으로 누가 주인이고 뭐를 묻어야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루시는 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마가 내뱉는 격앙된 소리에서 똑같은 사나운 짐승을 알아보았다. 그게 역사임이 분명했다. - P112

마가 고개를 흔든다. 마의 뺨에 그림자가 생긴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인다. 바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루시에게는 잘 들리지 않지만 오래된 약속들을 읊는 걸 알 수 있다. 마는 도중에 웃음을 짓더니, 다시 표정이 바뀐다. 얼굴이 굳는다. 여러 해 뒤에 루시는 그 단단함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결심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냉담함이었는지 판단하려 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도 그걸 끌어내려고 애쓰면서. - P113

마는 침대에 누워, 잔을 쥔 너무 마른 손을 바르르 떨면서 그걸 마신다. 목구멍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몇 시간 동안의 바의 노동, 수 세기의 생명이 아기 안으로 사라진다.
역사, 루시는 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떤다. - P114

아기는 그렇지 않다. 아기는 입이 없으므로 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아기는 바를 입 다물게 만들고 루시의 질문을 막고 샘을 뚱하게 만든다. 아기는 원하는 것은 뭐든 얻는다. - P118

마는 냄비 바닥에 깔린 국물에 달려든다. 마의 숟가락이 바닥을 긁어 대는 소리에 루시의 신경이 곤두선다. 마는 예전처럼 샘이나 루시에게 한 입 먹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루시는 아기가 이기적이지 않냐고 묻는다. 자기나 샘은 마를 아프게 한 적이 없는데. 마는 그 질문에 웃고 또 웃는다. 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원래 남자들은 그렇게 법석을 떠는 거라고 말한다. - P119

바는 예상하지 않은 방향에서 온다. 집 뒤쪽에서 쩔렁거리고 덜그럭거리며 나타난다. 바가 식탁 위에 뚱뚱한 주머니를 던진다.
"어디서—"마가 말한다.
"급여일이잖아. 일찍 받았어." 돈주머니 솔기처럼 바의 목소리도 뿌듯함으로 터질 듯하다. "내가 약속했잖아, 친아이더?" - P119

샘의 매력은 뭘까? 루시는 오랫동안 샘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샘한테서 무얼 보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사방으로 돌아가는 대담한 시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팔다리. 샘은 야생 동물처럼 움직임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저 샘이 풀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보고 싶어 즐거이 샘을 쳐다본다. - P121

적막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탄광에서는 적막이 진동이나 화재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치명적인 가스에 앞서 적막이 찾아온다.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유일한 전조가 적막이다. - P127

루시는 까칠까칠한 것을 삼키는 법을 익힌다. 흙가루, 운동장의 욕설, 얼굴을 타고 흘러 입으로 들어가는 침, 리 선생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타나는 바의 까칠한 태도. 루시는 큰 입으로 뭐든 삼킨다. - P129

나중에 루시는 운동장에서 일어난 일이 고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고기가 샘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더 반짝거리게 한다. 흙 먼지에도 가려지지 않는 윤기가 흐른다. 루시는 고기 탓을 할 것이고 더 나중에는 고기를 사느라 들어간 돈, 그 돈을 치르기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나날들, 고깃값을 정한 사람들, 탄광을 세우고 그토록 적은 임금을 준 사람들, 땅속을 비우고 강물을 말려 날씨를 건조하게 만들어 버린 사람들, 누구는 땅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먼지가 떠도는 허공만 움키게 만든 세상을 탓할 테지만 그러나 너무 오래 생각하면 사방이 트인 언덕 위에서 햇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어질어질해진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이 단단한 금빛 땅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 P129

마의 고운 외모하고 엇박자를 일으키는 낮은 목소리. 움찔거리는 토끼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마, 웅덩이에 빠진 노새를 끌 어 올리는 마. 루시의 생각에 답하듯 마는 말을 천천히 한다. 꿀단지 속에서 움직이는 칼날처럼. - P138

"징징대지 마." 마가 손끝을 닦는다. "니장다러(다 컸잖아). 어떤 게 거짓말이고 어떤 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건지 알 만큼은 됐잖아. 너한테 땅에 묻는 법 가르쳐 준 거 기억해? 진실을 묻어야 할 때도 있어." - P140

루시는 묻고 싶었다.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더 큰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그러나 마는 다시 웃는다. 빛으로 가득한 응접실에는 걸맞지 않아 리 선생님은 절대 볼 수 없을 미소다. 그러나 마를 특히 아름답게 만드는 게 바로 이런 자기모순이란 걸, 루시는 다시 떠올린다. 매끈한 피부에 거친 목소리. 슬픔 위로 번지는 미소. 마의 눈이 한없이 멀고먼 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기이한 아픔. 큰 바다만큼의 물이 차서 넘친다. - P141

"니즈다오, 루시 걸, 불 속에서 사람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루시가 마를 일으키자 마가 말한다. 둘은 다른 광부들 집을 지나쳐 계속 간다. 집 안에 등이 켜져 있다. 문이 열려 있어 밤도 아닌데 어둑해진 바깥세상으로 노란빛을 쏜다. "난 알아." 여자들이 문 앞에 서서 구름을 본다. "불은 묻을 걸 하나도 안 남겨." 루시는 겁에 질린 노새를 달랠 때처럼 음음거리는 소리를 낸다. "귀신이 이베이쯔(평생) 따라와. 절대 놓아주지 않아." 재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조각은 마가 싫어하는 나방 같다. 마는 나방은 죽은 자가 찾아온 거라고 했다. - P141

일요일마다 바와 샘이 나간 직후에 루시도 집에서 나온다. 마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리 선생님 집으로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간다.
예의범절의 교훈. 차만 마시고 배부른 척하는 법. 쿠키, 케이크, 가장자리를 잘라 낸 샌드위치 등의 음식을 사양하는 법. 은으로 된 통에 담겨 나오는 소금을 빤히 보지 않는 법. 소복하게 쌓여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 혀끝에서 짜릿하게 타는 그 느낌을 갈망하지 않는 법.
질문에 대답하는 법.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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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를 타고 달리면서 보면 언덕이 물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마가 늘 말하던 큰 바다가 누런 풀로 일렁인다. 멀리 보이던 산이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어느 날 루시는 산이 파란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녹색 수풀과 회색 바위, 능선 깊이 새겨진 보라색 그림자가 있다.
땅에도 색이 생긴다. 물줄기가 넓어진다. 부들, 쇠비름, 야생 마늘과 당근. 산은 험준해지고 골짜기는 깊어진다. 이따금 그늘진 수풀 아래에서 선연한 녹색으로 풀이 자란다.
여기가 아빠가 그렇게 찾던 야생의 땅인가? 작은 몸뚱이가 땅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듯한 이 느낌—땅이 그들을 보이지 않게, 용서처럼 묻어 버릴 것 같은 느낌. 루시의 몸이 줄어들며 루시 안의 텅 빈 자리도 줄어든다. 거대한 산 아래에서, 우뚝 솟은 참나무 사이로 걸러지며 녹색이 되는 금빛 빛살 아래에서 하찮디하찮은 존재가 된다. 먼지 맛보다 생명의 맛이 더 많이 나는 바람 속에서는 샘조차도 유순해진다. - P63

광부 아내들 중 땅 안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던 이들이 있었다. 문명 세계. 산지 너머 비옥한 평야 지대에 살다가 광부 남편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온 여자들이었다. 남편이 보낸 편지에는 탄가루 이야기는 없었다. 이 여자들은 밝은색 드레스를 입고 왔지만 서부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드레스 색은 그들의 희망만큼이나 빠르게 바래 버렸다. - P64

루시의 가장 간절한 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은 용이나 호랑이를 물리치는 꿈이 아니다. 황금을 찾는 꿈도 아니다. 루시는 먼 땅에서 기적을 본다. 군중 속에서 자기 얼굴이 튀지 않는 곳. 집으로 가는 긴 도로를 따라 걸어갈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 - P65

루시는 속으로 말한다. 기억해? 바가 탐광하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바 손목의 기름 화상 자국. 기억해? 바가 들려주던 이야기. 기억해? 생살이 나오도록 물어뜯은 손톱. 기억해? 술 마시면 코를 골던 것. 기억해? 바의 흰머리. 기억해? 바의 허풍. 기억해? 돼지고기에 후추를 친 걸 좋아하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
기억해? 말 타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벗어 놓은 바의 부츠가 바의 발 모양을 하고 있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씻지 않게 된 이후 말고, 술을 마시게 된 이후 말고, 그 전의 냄새. - P69

이제 샘은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평선 위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회색 구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집이 제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 호랑이 두개골이 제아무리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 봤자 귀리가 떨어지고 총알도 떨어진 지금 굶주림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집으로 이겨 내겠다는 듯이. 루시는 앞날에 대해 말하려고 애쓴다. 샘이 하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죽은 과거에 관한 것뿐이다. - P77

풀밭이 평평하고 푸르게 펼쳐져 있다. 아픈 발을 쉴 수 있게 부드러운 벨벳 천을 펴 놓은 것 같다. 멀리 길게 이어진 강이 있고 그 옆에 작은 얼룩이 하나 보인다. 스위트워터가 틀림없다. 루시는 새로운 세계를 깊이 들이마신다. 냄새가 혀끝에 축축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루시는 앞으로 나가는데—
바람이 어깨를 건드린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며칠간처럼 매섭고 거센 바람이 아니라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다정하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슬픔 때문에 루시는 뒤를 돌아본다. - P89

강에 닿자—
지금껏 루시에게 물은 탄광에서부터 시작해 목이 졸린 듯 얕게 졸졸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이 강은 드넓다. 살아 있는 생명체다. 강둑에 부딪히며 사납게 날뛴다. 마가 바도 물이라고 했는데, 오늘 이전에는 물이 어떻게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 P90

샘은 팔꿈치를 대고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가 싫다고 하면 떠나면 되지. 우리도 싫으니까."
루시는 놀라서 샘을 쳐다본다. 샘은 어처구니없게도 씩 웃는다.
석 달 동안 두려워하며 숨어 다녔는데, 샘은 그걸 마치 게임처럼 여긴 거다. 어디에 있든 제집처럼 여기는 샘, 힘들수록 반짝이는 샘. 샘이 그렸던 지도, 샘이 가겠다고 한 경로가 단지 몇 달이나 몇 년의 여정이 아니었음을 루시는 깨닫는다. 그것은 한평생의 시작이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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