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C 팸 장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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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보다 ‘살아가야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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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으르렁거리고 루시는 움찔한다. 그 목소리에, 뻗을 태세의 주먹처럼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제야 루시는 샘이 저녁 식사 때 했던 이야기가 진짜로 믿긴다. 카우보이이자 산 사람이자 광부인 샘을 볼 수 있다. 루시가 모르는 거칠고 단단한 남자. - P300

루시가 샘을 노려본다. 손을 진흙 속에 푹 담근다. 익숙한 냄새, 광산 지역 물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주위를 감싼다. 전에는 투덜거리며 그 물을 마셨다. 지금은 깊이 냄새를 들이마신다. 루시는 이 진흙을, 이 삶을 선택한다. 이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 P304

미모는 무기야. 마가 말했다. 신세 지지 마. 마가 말했다. 똑똑한 내 딸. 마가 말했다. 선택지가 많아야 해. 마가 말했다. 금을 나누고, 가족을 나눈 마. - P305

그동안 내내 루시는 마의 사랑을 힘든 일을 이겨 내는 주문 삼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게 이제는 짐이 되었다. 샘이 어떤 진실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게 당연하다. 루시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왜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걸까?
그때, 피가 귀로 쏠리고 머리가 무겁게 처질 때, 마의 트렁크가 떠오른다. 그 무거운 트렁크를 샘이 혼자 힘으로 넬리 위에 얹 었다. 샘은 바의 사랑이라는 짐도 져야 했다. 그런데 그날 루시는 그 짐을 나눠 지지 않았다. 그랬어야 했는데. 자기 자리를 지켰어야, 머물렀어야 하는데. 그날, 그리고 오 년 전 강둑에서의 그날, 그리고 오늘. 루시는 내내 샘 곁에 있었어야 했다. 루시는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강에 돌을 던져 물 위의 이미지를 조각낸다. 그냥 물일 뿐이다. - P306

루시는 두려워하면서 샘을 등지고 무릎을 꿇는다. 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렵다. 뻣뻣하던 머리카락이 몇 해 전부터 매끈해지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가 그럴 거라고 했던 대로. 자기도 마처럼 허영심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이기적 이면? - P307

루시는 바가 추구하던 세상과 마가 원하던 세상 사이의 공간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바의 세상은 사라진 세상, 현재와 미래를 상대적으로 칙칙해 보이게 만들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마의 세상은 너무 좁아서 한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루시와 샘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거의 새로운 땅. - P307

칠흑 같은 어둠. 재칼의 시간—미망의 시간은 지나갔다. 지금이 어떤 짐승의 시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P307

샘이 칼질을 멈추자 루시는 일어선다. 머리가 훨씬 가볍다. 머리채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루시는 기억해 낸다. 이 시간은 뱀의 시간이다. 루시의 머리카락이 땅바닥에서 힘없이 구불거린다. 루시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사소해 보인다. 루시가 머리카락을 발로 걷어찬다. 샘이 말린다.
샘이 땅을 파기 시작한다.
뭘 하는지 깨닫고 루시도 같이 판다. 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의 말이 옳지도 않았지만. 미모는 무기지만, 그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의 목을 조이는 무기다. 샘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고 루시에게도 그랬다. 마가 두 딸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무덤을 깊이 파고 묻는다. 흙을 넣고 다지기 전에 샘이 은 동전 하나를 떨어뜨린다. - P307

"이젠 상관없는 일이야." 샘이 땅 소리를 내며 팬을 내려놓는다. "멀리 갈 거니까.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내내 정착할 곳을 찾았는데 그럴 만한 곳이 없었어. 왜 그런지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이제 우리 땅을 가질 때가 됐어. 여기엔 등 뒤를 계속 돌아볼 필요가 없는 곳, 훔친 땅이 아닌 곳, 버펄로나 인디언들의 땅이 아니었던 곳, 다 고갈되어 버리지 않은 곳이 없어. 이번에는 우리가 땅을 사더라도 아무도 막지 않을 곳으로 갈 거야." - P310

샘이 움찔한다. 루시의 말이 주먹을 날리기라도 한 듯. 산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순간 샘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마처럼 보인다—강인함 아래 흐르는 슬픔, 땅 밑으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처럼. 질문으로 이미 충분히 상처를 주지 않았나? 루시는 혀를 깨문다. 지금 샘을 보니, 저렇게 자랐는데도 나약하게만 보인다. 부드러운 목을 감추는 반다나. 비밀 주머니가 있는 바지, 이 더위에도 단추를 다 채워야 하는 셔츠. 천 한 장에 감춰진 샘이 어찌나 위태해 보이는지. - P311

루시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출발할 무렵에는 샘의 손이 다시 차분해진다. 두 사람은 질문을 묻어 놓고 떠난다. 무덤 두개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어쨌거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멀리 가고 나면 이 땅이나 어떻게 이 땅을 떠났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낱 역사가 되고 말 터인데?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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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강둑에 갔을 때 이래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체취. 루시의 가슴 속에서 진실이 솟아오르며 흙탕물을 만들었다. - P266

루시는 전처럼 혼자 강물에 몸을 담근다. 피부가 쪼글 쪼글해진다. 그래도 루시는 계속 물에 떠다닌다. 땅에 있을 때도 물에 있을 때처럼 쪼글쪼글할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친구 옆에 앉아 웃음을 짓고 있을 미래. 다른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루시는 자기가 말한 대로 되었다. 고아. 아무도 없음. 돈도, 땅도, 말도, 가족도, 과거도, 집도, 미래도 없다. - P267

샘은 씹고 말하고 삼키고 허풍을 치고 루시의 배 속에는 허기가 감돈다. 거친 땅에 대한,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대한, 스위트워터에서 야생성과 함께 사라진 공포에 대한 굶주림. 간을 안 한 귀리죽과 차갑게 식은 콩이 특식이 되는 길, 몸을 달구어 깨어나게 하는 길에 대한 굶주림. 거리가 전부 지도로 기록되고 알려진 이 따분하고 평탄한 곳이 아니라. - P257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자 샘의 매력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게 보인다. 그 아래에 바를 죽인 것과 똑같은 과격함, 쓰라림, 희망이 있다. 루시가 스스로 고아가 되어 떨어져 나온 옛 역사가. - P277

주황색 불빛이 샘의 광대, 샘의 짙은 색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몇 해 뒤 샘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스테이크를 먹어 대서 몸집이 커지고 샘이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모습이 되겠지. 열한 살 때 이미 샘은 선언했다. 모험가. 카우보이. 무법자. 어른이 되면. 사라진 오 년, 잃어버린 오 년, 샘을 가둘 장소도 다잡을 사람도 없었던 오 년 뒤에 돌아온 샘이 오히려 더 익숙하게 보인다. 더욱 샘다워진 샘. - P281

루시는 거리가 텅 비기를, 샘이 으르렁거리고 난 뒤에 생겨나 아직도 멈추지 않은, 웃자란 풀로 뒤덮인 좁은 오솔길처럼 말로 할 수 없는 세계로 이어지는 떨림을 느끼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샘이 좋다고 대답한다. - P282

거기, 진흙탕 속을 헤집어 보면, 가장 밑바닥에 강철 이빨을 가진 질투가 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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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어.
"다시는 거짓말하지 마." 네 엄마가 나에게 경고했거든.
그때 네 엄마에게 나머지 진실은 절대 말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말했다가는 나를 떠날 테니. 나는 내 이야기, 진짜 이야기를 내 안 가장 깊은 곳에 감춰 두었어. 그곳에서는 내가 여전히 이 언덕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어린아이였지. 내가 어디 출신인지는 절대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 거짓말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어. - P231

사람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어떻게 알겠니? 그 순간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해 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자기 파트너 하고 무슨 내기라도 한 걸까? 담배가 지겨워져서 없애 버리려고 한 걸까? 덫 가장자리까지 와서 갑자기 움찔 경계하며 본능적으로 털을 곤두세우는 짐승의 행동 같은 것이었을까? 궁지에 몰리면 귀를 내리깔고 간사하게 사람 아기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재칼처럼 군 걸까? 외로웠던 걸까? 어리석었던 걸까? 친절했던 걸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훑어보며 재 볼 때 머릿속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 때문에 어떤 날에는 우리를 칭크라고 부르고 다른 날에는 그냥 내버려 두고 또 어떤 날에는 자선을 베푸는 걸까? 나는 모르겠다, 루시 걸. 아무래도 모르겠어. - P234

"넌 어디서 왔어? 저 사람들하고 같아?"
그날 밤 나는 반은 미친 상태였고 억눌러 놓은 진실이 배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어. 그러다 보니 말하게 됐지. "이 지역 출신이야. 여기서 멀지 않아."
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어.
나는 그의 파이프를 입에 넣었어. 그의 담배를 급히 빨았어. 파이프 불빛 너머 지평선에서 아직도 불이 타고 있었어. 동물들이 달아났고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겠지. 나는 파이프를 빨아 불빛을 내며 뭐가 웃기냐고 물을까 생각했지만, 그 사람을 비롯해 수천 명이 지난해 이곳에 와서 이 땅을 파괴하고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 한다는 게 떠올랐지. 저렇게 불타고 있는 게 원래는 내 땅이고 빌리의 땅이고 인디언들의 땅이고 호랑이와 버펄로의 땅인데—그때 네 엄마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의. - P235

불의 생각은 달랐어. 불은 그냥 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솟구쳤어. 거대한 짐승이 하늘로 솟아올랐어. 검은 연기 줄무늬가 있는 주황색 불꽃. 언덕에서 태어난 존재, 이 땅이 느끼는 분노에서 태어난 존재. 전혀 온순하지 않았지. 짐승을 궁지에 몰아 본 적이 있니? 생쥐조차도 최후의 순간이 오면 돌아서서 문단다. 죽을 게 확실하다 싶으면. 그 불꽃과 연기 속에서 루시 걸, 그 언덕이 정말로 호랑이를 낳았어. - P237

오랜 세월이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어.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할 수 있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그럴 거야. - P238

정말 그랬을까? 베인 상처가 깊지는 않았는데 힘줄을 깔끔하게 끊어 버려서 그 뒤로 다시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어. 피부는 아물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 어떤 본질이 베여 나갔어. 그 날카로운 상처가 우연히 생긴 걸까? 아니면 송곳니를 드러낸 포식자, 다른 모든 게 다 죽고 사라진 뒤에도 이 언덕을 지키는 짐승의 발톱 때문이었을까? 내 주머니 속의 비밀, 짤랑거리는 은에 대한 보복이 었을까? 호랑이의 얼굴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아? - P242

네가 더 크면, 루시 걸, 때로는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엄마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았어. 엄마가 뭘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다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무얼 느끼는지. 나를 아프게 할 지도 위의 정확한 지점을 알고 싶지 않았어. - P245

나는 부(富)를 찾아냈으나 그게 내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땅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든다. 너랑 샘을 만들었으니까. 너희는 잘 자랐잖아? 나는 너희를 강하게 가르쳤어. 단단해지라고 가르쳤어. 살아남으라고 가르쳤어. 지금 네가 샘을 돌보고 내 시신을 제대로 묻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그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 싶다.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이 가르치지 못한 게 아쉽다. 부족하나마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해 봐야 할 거야. 지금껏 평생 그래 온 것처럼.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이것만 기억해라. 가족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야. 팅워.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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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관한 교훈.
멀리에서 볼 때는 알 수가 없었다. 루시는 거리를 두고 광부의 아내들이 판잣집 사이를 오가며 빨래판, 골무, 요리법, 비누를 빌리는 것을 보았다. 자급자족이란 걸 몰라. 바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바는 루시에게 침묵이 수다보다 낫다고 가르쳤다. 바는 하늘의 벌린 입 아래에 서서 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쳤다. 열심히 들으면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 P153

지금 루시는 제빵사가 하는 정육점 주인 이야기, 짐의 상점에서 일하는 아가씨 이야기, 또 광부의 아내가 카우보이와 같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알록달록한 색실로 마을을 하나로 엮는다. 현관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처럼 화려하게. 선생님은 루시가 훔쳐 가려 하기라도 한 양 얼른 태피스트리를 치워 버렸다. 루시는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면 손을 대 보고, 몸에 걸쳐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유리창이 있고 사람들의 대화가 방 안을 따뜻하게 달구는 달콤한 일요일의 분위기처럼 몸에 걸쳐 봤을 텐데. - P153

말할 수 없는 말이 입에 침으로 고이고 루시는 몰래 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식탁 위에 떨어진 소금 가루를 찍는다. 혀끝에서 어찌나 짜릿하게 반짝이는지. 그 순간이 어찌나 짧은지. - P153

오늘 저녁도 감자, 골수, 연골을 푹 무를 때까지 끓인 죽이다. 아직 한 주의 중간이고 일요일은 아직 멀었는데 루시는 벌써 신물이 난다. 소금을 안 넣은 밍밍한 고기 맛, 발꿈치를 거칠게 만드는 흙바닥, 사방에서 금이 아우성을 치는데 아끼고 줄이는 생활.
"마? 그 땅 살 만큼 돈 모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려요?"
마는 루시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마는 비밀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에 대한 교훈. - P154

마는 손수건을 루시의 손에 올려놓는다. "당분간은 써도 돼, 뉘얼. 선생님이 정말 준 걸로 생각할게."
이번에는 마가 보는 앞에서 소금을 스튜에 넣는다. 마는 신세 지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고, 냄비 위로 몸을 숙인다. 루시는 마의 얼굴에서 자기가 느끼는 허기와 똑같은 것을 보고 흠칫 놀란다.
손이 미끄러진다. 하얀 덩이가 표면에 떨어져 녹는다. 너무 많이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저녁때 자기 몫을 허겁지겁 먹고 그릇을 싹싹 긁고 더 달라고, 또 달라고 한다. 마의 입가에 진한 스튜 국물 자국이 남는다. 너무 급히 먹느라 닦을 새도 없다.
루시는 두 입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혀가 아릿하다. 씁쓸하고 달갑지 않은 다른 맛이 소금과 같이 섞여 있다.
수치의 교훈. - P158

이런 감정을 무어라고 부르나? 바싹 마르면서 동시에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 루시의 입이 마르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러나 몸 안이 출렁인다—마는 루시가 물이라고 했다—바가 말하는 세상이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재빨리 움직이면 세상의 얇은 막을 뚫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태고의 호수가 밀려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P162

루시는 그 쓰이지 않은 역사가 두렵다. 바의 이야기 전부를 허풍이라고 치부하는 편이 더 쉽다. 왜냐하면 믿는다면, 그 믿음이 어디로 가나? 호랑이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인디언들이 사냥을 당하고 죽어 간다는 것도 믿나? 사람만 한 크기의 물고기가 있었다는 걸 믿는다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낚은 물고기처럼 줄줄이 꿰어 끌고 간다는 것도 믿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런 역사에는 고개를 돌려 버리는 편이 더 쉽다. 마른풀이 쏴 우는 소리 말고는, 사라진 길의 흔적 말고는, 따분해하는 남자들과 야박한 여자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신소리 말고는, 버펄로 뼈의 갈라진 무늬 말고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 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역사책을 읽는 편이 훨씬 더 쉽다. 이름과 날짜가 벽돌처럼 질서 있게 쌓여 문명을 이루는 역사. - P162

루시는 그 다른 역사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야생의 역사.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어슬렁거린다. 야영지 모닥불이 만드는 빛의 테두리 바로 바깥쪽에 도사린 짐승처럼. 그 역사는 언어가 아니라 울부짖음과 장단과 피로 말한다. 그게 루시를 만들었다. 호수가 금을 만든 것처럼. 샘의 야생성, 바의 절름발, 큰 바다 이야기를 할 때 마의 목소리를 가득 채우는 갈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역사를 내려다보면 루시는 머리가 어질해진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봐서 바와 마가 자기보다 더 작아 보일 때처럼, 바와 마가 자기들의 바와 마 들과 함께, 사라진 호수보다도 더 큰 대양 너머까지 줄줄이 뻗어 있는 듯이. - P163

해가 타오른다. 물이 루시에게서 놀라운 속도로 빠져나간다. 사라진 물은 전부 어디로 가는 걸까? 호수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귀신이 되는 걸까? 어떤 장소가 기억하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 대상에 분노할 수 있을까? 루시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루시는 생각한다. 난 아니야. 난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았어. 나를 도와줘. - P164

마가 몸 안에 지니고 있던 이야기는 아기보다도 크고, 서부보다도 크고, 루시가 태어난 세상 전체보다 더 크다. 마의 몸 안에는 돌로 포장된 넓은 길, 야트막한 붉은 담, 안개와 바위가 있는 마당이 있다. 여주를 키우고 이 마른 땅에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매운 고추를 키우는 곳. 그곳이 집이다. 짙은 갈망으로 마의 억양이 더욱 억세어져 루시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집이라는 말은 마가 감춰 놓은 네 번째 책, 마의 감은 눈 뒤쪽에 쓰인 책에서 읽어 주는 동화 속 이야기 같다. 마는 별 모양 과일 이야기를 한다. 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귀한 녹색 돌. 마가 태어난 곳의 발음할 수 없는 산의 이름. - P169

루시는 마가 자기가 먹어 보지 못한 별 모양 과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핥는 게 싫다. 루시는 마가 어릴 적 살던 집의 기와지붕이야기를 하며 자기가 사는 집 지붕을 욕하는 게 싫다. 양철 지붕이나 캔버스 천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가 말하는 두 줄짜리 피들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릴 때도 있는데. 마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먼지가 언덕을 부드러운 금빛으로 덮을 때도 있는데. 루시는 마의 거리가 왜 더 예쁘다는 건지, 마의 비가 왜 더 좋다는 건지, 마의 음식이 왜 더 맛있다는 건지 말해 달라고 한다. 묻고 또 물으며 루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마는 베개 속으로 파고들어 아무 답도 들을 수가 없다. 마치 루시의 말이 폭력이기라도 한 것처럼. - P171

그렇지만 루시와 샘은 아이다. 아홉 살과 여덟 살. 장난감이고 무릎이고 팔꿈치고 성하게 간수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루시와 샘은 자기들을 부르는 이름을 자는 도중에 마룻바닥 틈새로 떨구어 버린다. 다음 날이면 또 있을 거라고 어린애답게 믿으면서. 더 많은 사랑이, 더 많은 말이, 더 많은 시간이, 짐마차를 타고 마차 좌석에 앉은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며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리듬에 따라 잠에 빠지면서 갈 수 있는 더 많은 곳이 있을 거라고. - P172

비가 내리며 땅을 무르게 녹이고 개울을 붇게 하고 공기를 차갑게 식히는 소리를 듣다가 루시는 급작스러운 공포를 느낀다. 마가 양동이에 든 더러운 구정물을 쏟아 버릴 때처럼 그들 가족이 내버려지는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언덕에 그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뭐 하나라도 남을까? - P179

선생님이 한 걸음 다가온다. 눈빛이 열렬하다. 마는 눈을 돌린다.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집 안을 둘러본다. 금이 감춰진 데가 아니라 비가 들이치는 창문에, 검게 변색한 양철에, 씻다 만 그릇에 눈이 머문다. 루시는 마가 어디를 볼지 안다. 루시가 깨끗한 학교나 햇빛이 가득한 응접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저절로 보게 되는 곳들. 그들 집의 어둡고 더러운 곳들. 그들의 수치. - P184

루시의 피투성이 입이 바싹 마른다. 루시는 목마름을 느낀다. 무언가 부족함을. 축축한 집 안에 고인 갈증. - P184

너희 선생님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 선택지도 버리지는 말아야지. 니즈다오, 루시 걸, 진짜 부가 뭔지 아니?" 루시가 마의 옷 속에 숨겨진 주머니를 가리킨다. "부두이(아니야), 뉘얼. 내일이라도 내가 이 금을 써 버리면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아냐—우리는 선택지를 많이 가져야 해. 그건 아무도 뺏을 수 없는 거야." 마가 길고 낮게 한숨을 쉰다. 나중에 루시는 바람이 너무 좁은 틈을 통과하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의 그 한숨을 떠올릴 것이다. "메이관시, 나이 들면 너도 알 거야." - P186

루시는 참을 수 없다. 불어나는 개울처럼, 몇 주 동안 몇 달 동안 고인 것을. 눈물이 점점 격해진다. 루시는 거울로 핏자국을 닦아 낸 턱이 다시 축축이 젖은 걸 본다. 한 방울이 마의 손으로 떨어진다. 루시는 마를 닮지 않았다. 마의 미모를 물려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그러진 거울 속에 닮은 데가 있다. 거울에 비친 마의 모습에는 눈물 한 방울 없어도 루시의 것에 상응하는 슬픔이 있다. 마는 손에 떨어진 루시의 소금을 입으로 가져가 깨끗이 빨아들인다. - P187

여러 해 전 짐마차가 공격받았을 때 어떻게 살아남았나?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다친 노새를 남겨 두었고 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때는 마도 은이나 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안 했다.
"볘칸(보지 마)." 도망치면서 마가 말했다. 그래도 루시는 돌아보았다. 재칼 무리가 다가오면서 어둠 속에서 여남은 개의 바늘구멍 눈이 빛났다. 살아 있는 노새가 미끼였다. 희생물이었다. 루시는 그건 견딜 수 있었다. 죽은 동물은 무수히 봤으니까. 루시가 몸서리친 것은 마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충직한 노새를 돌아보았지만 마만은 자기가 내린 지시를 따랐다. 마는 입술을 깨물었고 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아마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마는 아픈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199

마는 망가진 문, 그리고 그 너머를 가리킨다. 집집마다, 불 켜진 창문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언덕을. 마의 증오는 그 모두에게 미치고 남을 만큼 크다. - P202

번개가 번쩍인다. 한 번, 두 번 연달아. 번개가 지나간 다음 루시는 빛에 얼얼해진 눈을 깜박인다. 방은 더 어둑해지고 마의 얼굴도 어둑하다. 분노는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마의 미모를 늘 쫓아다니는 슬픔이다. 마의 아픔.
"너를 사로잡았구나." 마가 말한다. 마의 손가락이 루시의 손으로 파고든다. "이 땅이 너랑 네 동생 둘 다 제 것으로 삼아 버렸어.스마(그렇지)?"
그건 바가 하는 말이다. 재칼과 그들의 법은 다른 말을 한다. 루시는 다른 곳에는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대답할 수가 없다. - P203

"니지더(기억나), 우리가 너희 선생 만나러 갔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마가 루시의 손을 놓는다. 마는 드레스 안에 있는 주머니를 움켜쥔다. 이제는 비어 있을 텐데도, 재칼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못 찾았는데도, 마는 그 주머니에서 위안을 얻는 듯하다. "혼자 가고 싶다고 했지. 네가 말했어. 엄마 도움 필요 없다고—" 마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마가 루시의 뺨을 쓰다듬는다. 너무나 익숙해서 루시가 앞으로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떠올릴 수 있을 손길. 마는 루시를 한참 붙잡고 있다가 놓아준다. - P204

그래, 루시 걸. 나도 너처럼, 나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게 아니야. 그렇다고 그걸 핑계로 삼지는 마라. 나한테 아빠가 있다면 평소에는 나를 따스하게 감싸 주고 가끔은 땀이 나도록 때린 해가 아빠겠지. 나한테 엄마가 있다면 내가 드러누워 잘 때 나를 폭 안아 준 풀이 엄마겠지. 나는 이 언덕에서 자랐고 언덕이 나를 키웠어. 시내와 바위, 키 작은 참나무가 한 덩이처럼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덮었는데도 나는 들여보내 주던 골짜기. 나는 마르고 날래서 나무 틈새로 빠져나가고, 가지가 얽힌 녹색 천장 아래 공간을 뚫을 수 있었어. 나한테 민족이 있다면, 빛을 반사하는 못에서 볼 수 있었지. 물이 어찌나 맑은지 이 세상하고 정확히 똑같은 세상이 거기 비쳤어. 언덕과 하늘, 나하고 똑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 나는 내가 이 땅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자랐어, 루시 걸. 너하고 샘도 마찬가지지. 네 외양이 어떻든 간에. 어느 누구든 역사책을 들고 너한테 다른 소리를 하게 하지 마라. - P212

네가 어릴 때는 예쁜 이야기들만 들려줬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 너 내가 모질다고 생각했니? 이제 너도 진실을 알지. 세상은 훨씬 더 모질다는 것 말이야. 불공평하지만, 너와 샘은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어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어쩌면 오늘 밤 동안에,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 P213

너는 그걸 교훈으로 삼아라. 항상 왜냐고 물어. 너의 어떤 부분을 원하는지 꼭 물어보라고. - P215

"네 할 일을 해. 돈값을 하라고." 그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들었어. 질문을 꿀떡 삼켰지. 내가 이 백 명이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그 비밀은 깊이, 저 깊이, 내가 어릴 때 너무 어리석어서 내 손에서 금을 놓아 버렸던 때의 그 여린 구석과 같이 숨겨 놓았어. - P219

살면서 많은 걸 잊어버렸어. 빌리의 얼굴, 양귀비꽃 색깔, 이미 어깨가 쑤시는 상태로 주먹을 꽉 쥐고 잠에서 깨지 않도록 푹 자는 법, 비 내린 뒤 흙냄새를 가리키는 단어, 깨끗한 물 맛. 죽고 나니 또 잊히는 것들이 있다. 주먹을 휘둘렀을 때 손가락 뼈마디가 갈라지는 느낌, 내 발가락 사이에서 질척거리던 진흙, 손가락과 발가락과 굶주림이 있을 때는 어땠던가 하는 것들. 언젠가는 나 자신에 관한 모든 걸 잊는 날이 오겠지. […] 내 육신뿐 아니라 네 피와 네 말 속에 있는 미미한 내 흔적까지도 묻어 버린 다음에. 하지만. 내가 언덕 위를 떠도는 바람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바람은 여전히 한 가지만은 기억하고 풀잎 하나하나에 대고 그 기억을 속삭일 거라고 생각한다. 네 엄마가 나만 쳐다봤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어찌나 눈이 부신지, 나약한 인간이라면 두려워했겠지. - P226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덜컹 움직였어. 어릴 때 나는 뼈가 흔들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곤 했어. 빌리는 그걸 호랑이 울음이라고 불렀어.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그날 호수 옆에서 내 가슴이 으르렁 울었어. 배가 도착한 날부터 나를 슬금슬금 쫓아왔던 것, 밤에 네 엄마를 안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던 것이 그날 밤 나를 확 덮쳤어. 내 심장에 발톱을 꽂았어. 몇 주 동안 네 엄마의 언어를 규칙으로 금지해 놓고는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언어를 입에 담았다.
이백 명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욕을 가장 먼저 배웠지. 하지만 연인들이 하는 말도 들었어.
친아이더, 나는 네 엄마한테 말했어. 그냥 짐작이었지. 그게 진짜 무슨 뜻인지는, 네 엄마 눈에서 그걸 보기 전에는 몰랐어. - P227

맞는 말이라고 해서 사실이 되지는 않을 때가 많아, 루시 걸. 말하는 사람,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이 사실을 정할 때가 있지. 하수인 들한테 총이 있으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는 수밖에. - P230

그 사람들이 내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어. 배도 철도도 내 것이 아니라고 했어. 철도를 놓는 일은 힘들고 끔찍할 거고 부자로 만들어 주지도 않을 거라고 했어. 어렸을 때 나는 새끼 새 솜털을 뜯어 분홍색 속살이 다 드러나게 한 적이 있었어. 그래놓고 풀밭에 토했지. 사실을 말하니까 그때처럼 토할 것 같아졌어. - P230

때로는 대가를 돈으로 치르지. 때로는 대가를 존엄으로 치러야 해.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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