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으면서 ‘잔잔한 물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 제목처럼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에 대해 잔잔히, 그리고 차분히 알려주는 듯한 느낌…
* 하지만 책을 급하게 출판했는지 교열/교정이 덜 된 느낌도 받았다. 예를 들어, 95페이지의 ‘직관적이고 사랑의 지식’이라는 표현이나, 97페이지의 ‘관상한다면… 발견하는 데 있다’ 같은 표현은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여겨진다.
* 131페이지 이하에 나오는 예화는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수필집이 아닌 ‘논문’ 비슷한 성격의 책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 ‘식별’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에는 생각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다섯 중에 셋 정도?
* 영어(영적인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216 이하)은 유익했다. 이미 십자가의 요한이 쓴 [가르멜의 산길]을 읽었음에도, 그 부분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는 다른! 좋은 ‘설명’의 유익과 탁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 ‘영적 식별 연습’(326 이하)은 숨은 복병처럼 내 마음을 습격해 왔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식별하고 지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심!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여기서는 특별히 내적인 차원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내적인 삶을 모두 영성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루이 부이에(Louis Bouyer)는 ‘종교적인 삶’, ‘내면적인 삶’, ‘영성적인 삶’을 세분화하면서 내면적인 삶이 반드시 종교적인 삶과 영성적인 삶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8) - 복잡해 보이는 구분이지만, 오늘처럼 모든 것이 ‘혼잡’하게 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개념 저 개념, 이 단어 저 단어가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난삽하게 사용되고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상 위험하기까지 하다.
2. 내면적인 삶과 기도훈련을 위한 지침… 다섯 단계의 영성수련을 제시했다. 첫 단계는… 준비 단계… 두 번째로서 정화의 단계에… 세 번째는 조명의 단계로… 네 번째는 일치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관상함으로…(9-10) - 목차에 대한 소개만 보아도 상당히 균형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 ^^ 그런데 32페이지로 가면 이것이 저자 자신의 체계가 아니라 위디오니시우스의 체제를 빌려온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부분은 좀 밝혀주는 것이 필요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고안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 않을까…
3. 생기의 원의는 ‘살아있는 숨’이라는 뜻이고 생령은 ‘영혼’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희랍적인 사고로서의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숨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기와 생령은 서로 분리된 구성 요소라기보다는 생령은 영과 육의 살아있는 통합체이며, 생기는 생령이 되기 위한 필연적 요소이다.(18) -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풀어(?) 놓고 있을까? --;
4. 구약의 존재론적인 인간 영성을 언급할 때 영이 없는 자연인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도 인간을 언급할 때 중요한 개념이 영육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전체를 총칭하는 몸(σωμα)의 개념이다. … 그러므로 고전 2장 말씀의 ‘영적’이다 혹은 ‘육적’이다 라는 구분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성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구성이 조화롭게 작용을 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표현방법이다.(19~)
5.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엣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개인적이고 정의적인(affective)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열광주의자들과 정적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이러한 의미를 피한 대체적인 용어가 헌신(devotion)이라는 말이다. … 초대 감리주의자들은 ‘완덕’(perfection)을, 복음주의자들은 ‘경건’(pie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초기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에서 사라졌다. … 19세기에 들어서 ‘영성’이라는 말은 주로 제도권에 속한 교회에서보다는 자유로운 신앙그룹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나타났다.(23) - ‘영성’ 용어의 변천사.
6.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수덕적인 삶)과 비상한 삶(신비적인 삶) 사이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한 이해가 서로 상충되고 있다.(25) - ‘영성’을 바라보는데 통일되고 확정된 ‘틀’은 없다는 것.
7. 경험적인 차원을 다룬 ‘영성’과 이론적인 차원을 다루는 ‘신학’이 구분되어질 만큼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신학은 하나님의 경험의 반추임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신학은 신학적인 반성을 경험의 뿌리에 두지 않으려 했다. 칼빈 역시 [기독교 강요] 곳곳에서 스콜라 신학은 영적인 자양분을 줄 수 없는 사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0) - 오늘의 신학은 어떤가? 거기에서 ‘경험’의 위치는 어디일까?
8. 기독교 영성을 기독교 실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강조할 때 사실 이 경험이란 대단히 위험스러운 요소를 안고 있다. 경험은 언제나 통제와 식별적인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낳게 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통제 기능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성서요, 둘째는 교회적인 전통에 대한 이해이다. 말하자면 성육신적이고 기독론 중심적인 칼케돈의 전통 등의 이해를 의미한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믿을 만한 것(the authentic)과 믿을 수 있는 것(the inauthentic)을 증명해낸다. 세 번째는 이미 교회에서 검증된 과거의 성인들이나 신비가들의 경험이다. 그들은 이미 교회 안에서 검증된 증인들이다. 그들은 경험이라는 시련들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의 정화와 어두운 밤들을 통과하여 예수의 영에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낸 사람들이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이나 안셀름과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에게’ 말한다는 의미로 신학을 전개해 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만이 참 경건에 이르는 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38) - 매우,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통제와 식별의 기능!
9.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영성수련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숙고한다면 행위보다 존재적인 영성수련이 우선된다.(42) - 요즈음의 ‘행동’ 중심의, 심지어는 ‘결과’ 중심의(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영성수련을 행하는) 영성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원칙이다!
10.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영성수련은 또 다른 측면이 강조되어지고 있다. 영성수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말보다는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중세의 분위기에서 영성수련이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면 현대의 분위기는 채움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중세와 현대 사이에 인간을 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인간론이 인간의 타락에 더 초점을 두었다면, 현대는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가능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부정적인 인간관에서 보다 긍정적인 인간관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43) - 이러한 추세는 내가 보기엔 위험스럽다. 이것이 영성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심지어 신학에 있어서까지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 같은 사람은 “과거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한 신학은 더 이상 신학일 수가 없으며, 인간학일 따름이다. 기존의 신학이 인간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누구를 중심으로 잡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11. 미국의 윌리엄 아이버슨(William Iverson)은 미국 국민의 4분의 1이상이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하였다라는 보고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파운드의 고기는 4분의 1파운드의 소금으로 절일 수 있다. 만약 오늘날의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 곧 세상의 소금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효과는 어디에 있는가?”(45) - 예전에는 많이 이야기되었던 주제다. 오늘날에는 별로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12. 정신의학자 스코트 팩(M. Scott peck)은 그의 [그다지 다니지 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_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발전에 대한 비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를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훈련 없이 성도가 되는 지름길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46) - 싸구려 기독교! 싸구려 신앙! 그리고 그것을 조성하는 정신 나간 지도자들!!!
13. 버나드의 이러한 수련법들의 의도는 독서를 통해 신령한 젖을 빨고, 명상을 통하여 먹은 양식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기도를 통해서 소화해 냄으로써 전인적인 강건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65) - 옛것에 치우칠(수구주의)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내용은 얼마나 좋은가! 새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더 낫고 더 좋은 것은 아니다.
14. 일반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필요성으로부터 시작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칼빈)은 기도를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79) - 실용주의적 도구…
15. 고백자 맥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는 “인간의 본질이 신성화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이다. 그 성육신 사건은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하나님의 사건이다.”라고 했다. 기도를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여준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다.(81) -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과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성품에 아무리 많이 참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뿐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맥시무스의 언급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6. 정신분석학에서는 기도를 자기암시(auto-suggestion), 언어적 자기자극(verbal self-stimulation)이라고 한다. 기도가 순전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 실현에 머물러 있다면 그 기도는 심리적인 효과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88) - 기도의 심리학적 분석이라…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분석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으며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17. 명상과 관상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시킬 수 있다. 명상기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반면에 관상기도는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말한다.(90) - 아주 잘 된 정의이다! ^^*
18. 영성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종류의 관상기도를 말하고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의 관상의 특징으로는 일체의 영상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을 주장하는 전통이다. … 또 다른 전통은 상상력이나 갖가지의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전통이다. …
‘후자’의 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는 길을 긍정신학 혹은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라고 한다. ‘전자’의 비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는 방법을 부정신학 혹은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라고 한다. (96~) - 전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속한 전통이요, 후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게 속한 전통이다. 두 가지를 각각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의를 내려놓은 것을 보니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된다. (두 번째 단락의 ‘후자’와 ‘전자’는 내가 책의 순서와는 반대로 바꾸어 놓았다. 저자가 설명하는 과정에서 전자와 후자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19. 프란시스 자신이 직접 쓴 기도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그의 기도문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이 기도문이 프란시스의 삶과 사상과 전혀 모순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104) - ‘평화의 기도’에 대한 각주 설명 부분이다. 흠… 평화의 기도가 성 프란시스가 직접 쓴 기도문이 아니었군!
20.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들을 사용하면서 말들과 씨름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에 자기를 침묵으로 이끄시는 침묵이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나의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처럼 되는 것을 보았다.”(116) -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고 적어놓으며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모두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을까?…
21. 일반적으로 상상력(imagination)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러나 상상과 환상(illusion) 혹은 공상(fantasy)은 분명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이렇게 주장한다. “상상이란 사실과의 별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조명한다.”(124~) - 이 부분은 전에 보았던 개럿 그린의 [하나님 상상하기]에 나오는 설명과 유사하다. 그는 거기(100-102pp)에서 상상력을 1)허구적인 사용과 2)실재적인 사용으로 나누고, 다시 허구적인 사용을 ①환상적인(fantastic) 것과 ②기만적인(deceitful) 것으로 나눈다.
22. ‘신앙상담’이나 ‘영적상담’ 혹은 ‘영적충고’라는 용어로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지도’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용어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그 용어가 일반적으로 풍겨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용어는 상담이라는 말보다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적인 체제종교 안에서 사용되는 엄격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 그러나 영성지도는 결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영성지도자는 수련자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면서 올바른 식별과 판단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수련자가 영성지도자의 권위에 필요 이상 수동적으로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동시에 수련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144~)
23. 존 카시안(360-435)은 아직도 공식적인 고해성사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끊임없는 회개와 양심성찰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유혹들을 수도원의 장상(senior monk)들에게 쏟아 놓을 것을 권고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55) - 고해성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 기원은 꽤 영성적이고 건전하다. 분별력!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24. 필로테우스(Philotheus)는 반복된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흩어진 자아를 모으고 마음의 등불로 인도되며,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와 빛으로 가슴을 채운다고 믿었다. 이 세 시나이 수도자들(존 클리마쿠스, 헤지키우스, 필로테우스)은 예수의 기도를 호흡과 관련을 시킨다.(157) - 저자는 일반적으로 ‘예수 기도’로 알려져 있는 것을 ‘예수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예수의 기도라고 하면 주기도와도 혼동될 수 있고, 원래의 이름에도 소유격이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예수 기도’가 오히려 더 정확하다.
25. 프란시스 역시 다른 영성지도자들처럼 순종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외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의 요구가 아니고, 복음서에 입각한 자유로운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지도자와 수련자 사이는 권위로 묶어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163) -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도원 전통에서 ‘순종’은 이런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요구였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지나치게 엄격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26. 카더린(St. Catherine of Siena)은 영성지도의 유의 사항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 … 둘째, 지도자는 수련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수련자들의 마음 상태와 느낌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 셋째는 모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각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길로 인도받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167) - 꽤 괜찮아 보이는 지침이다.
27. 그(칼빈)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을 의식하여 개인기도와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귀중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영적 권고나 상담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우리 자신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상호관계적인 영성지도의 필요성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201) - 로마 가톨릭에 대한 지나친 반발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것들까지 다 발로 차버릴 필요는 없다. ‘죄를 서로 고하며’와 같은 성도 상호간의 영성지도는 우리가 물려받아야 하는 좋은 전통이다. 지도자를 찾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도 상호간의 도움도 절실하다. 게리 콜린스의 [훌륭한 상담자]는 이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
28. 종교체험은 주관적인 것만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만도 아닌, 주관과 객관의 혼합이다. 위니캇(D. W. Winnicott)은 주관과 객관의 혼합영역을 ‘인간 삶의 제삼의 영역’인 ‘중간영역’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대상과 신앙체험의 연결고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206) - 주관과 객관 모두!
29. 하나님은 세 가지 종류의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상승하는 단계로서 연속적 영어(successive locution), 형상적 영어(formal locution), 실체적 영어(substantial locution)가 있다.
첫 번째의 연속적 영어란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을 대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이다. 어떤 깨달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명상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 성령님은 그의 개념과 판단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어떤 다른 사람이 그를 돕는 것처럼 매우 분명하고 편안하게 느낀다. … 연속적인 영어란 보통 일상 대화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동안 일어난다. … 이 점에서 바로 영성식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으로 말을 걸어오실지라도 그는 모든 한계성과 선입견, 편견, 오류 등을 지닌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첫 번째의 연속적 영어가 기도하는 동안에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의 형상적 언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을 수반하지만, 후자는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영어를 받는다. 일하고 있든지, 대화를 하고 있든지, 쉬고 있든지, 기도하고 있든지,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영어를 받을 수 있다. … 이 영어는 분명히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온 것이며 … 그것이 하나님일 수도 있고 마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영성식별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실체적 영어이다. 그것은 단순히 실존에 대한 지성적인 표상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을 지닌다. … 실체적인 영어는 단순히 관념적이고 보조적인 깨달은이 아니고 영혼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인 능력이다.(216~) -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에서 말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저자가 그것을 잘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30.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성식별(discretion spiritum)이란 보통 미래의 일어날 일을 인지하고 마음 속의 비밀들을 읽어낼 수 있는 비상한 은사라고 간주했다. 그는 거의 단순한 분별(discretio)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신중한 사려분별(prudence)의 한 부분으로 영성식별을 다루었다. 존 휴츠렐(John Futrell)은 영성식별이란 내적인 경험들 중에서 그 경험들의 기원을 결정하고 어떤 경험들이 빛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걸러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에드워드 오코너(Edward O'Conner)는 영성식별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감들이나 충동들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인가, 혹은 사단으로부터인가 혹은 우리 자신으로부터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220) - 영성식별 또는 영적식별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다.
31. 기도생활이 영적 성장에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식별적인 통찰력이 필연적이다. 식별작업이 없는 기도는 감상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성숙한 영성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기가 어렵다. 통념적인 식별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영성식별에 있어서 구분하고 평가해야 할 대상은 단순한 사고 작용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각에서 비롯되는 느낌과 직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와 직관, 느낌이 적절한 영성식별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시의 말씀이 성서가 식별의 객관적인 규범이 되어야 한다.(222) - 영성식별의 중요성! 분별해야 한다!
32.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해주기를 원하시지만 식별 없이 그 뜻이 명백히 저절로 알려지지는 않는다. 때로 그 목소리는 매우 모호하고 신비적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목소리와 더불어 다른 영의 목소리도 함께 섞여 들려지도록 허락하시는 듯하다. 다른 영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더불어 경쟁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 사단의 목소리 역시 하나님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모호하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온실’로부터 벗어나 ‘시장’이라는 어두움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거기에 하나님을 닮은 경쟁적인 목소리가 많이 나타난다. 길렛(Guillet)은 식별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어려움이란 인간이 삼중적인 어두움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채 명령한다. 둘째, 사단은 자기 자신을 숨긴 채 하나님이 확인한 것 이상을 제시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소리와 사단의 목소리를 혼란케 하는 어두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 자신 안에 드리워진 어두움이다.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는 어두움, 자신의 행동과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진지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어두움이다.(225~) - 식별에 대한 중요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어두움과 식별…
33. 예레미야와 같은 참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과의 투쟁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과 거짓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 첫째, 불행에 대한 예언은 행운에 대한 예언들보다 더 믿을 만하다. … 둘째, 신빙성 있는 예언이란 앞으로 지나가게 될 징조(표지, signs)에 대한 예측으로부터 확인된다. … 셋째, 위의 기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의 신조’에 충실하고 있느냐이다. … 악마도 기적을 통하여 유사한 징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 예언자의 신앙고백이 보편적인 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 넷째, 예언자의 삶의 증언은 교리의 건전성만큼 중요하다. 흠잡을 데 없는 예언자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반면에 거짓 예언자는 그 죄악된 삶에 의해서 그 자신 스스로가 순수한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 다섯째, 예언자의 내적인 성향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예언자의 예언이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백성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려놓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식별한 후에 그 예언의 신빙성을 가늠할 수 있다. … 여섯째,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개인의 경험이 중요한 식별의 기준이다. … 예언자의 예언의 본질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227~230) -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르는 기준들. 중요하다.
34.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동시에 당신의 자녀들이 영원히 미성숙한 채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의 의지를 강제로 강압하시지는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그 목소리를 판단하고 식별하기를 원하신다. …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시계 제작자이거나 꼭두가 아니라 성숙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라는 의미에서 식별적인 삶은 필연적이다. … 영성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매우 다양하고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이 완전하게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231) - 식별의 필요성, 식별의 근거, 식별의 가능성…
35.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과 자신의 야망적인 성향이 동시에 섞여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충실한 식별적인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235)
36. 복음서에서 가장 탁월한 식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수태에고에서 보여준 마리아의 반응이다(눅 1:26-38).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소리를 듣고 ‘놀랐고,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여기서 ‘놀랐다’는 헬라어 원어 디에타락스네(διεταραχθνη)는 ‘혼돈하고 당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하였다’라는 말의 원어 디에로기제토(διελογθζετο)라는 말은 그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셈을 하려고 했다는 의미이다.(236) - 수태고지 기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37. 성서는 이렇게 곳곳에서 영의 식별의 필요성이나 대략의 원칙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명백한 규범이나 공식같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서로부터 받은 어떤 원칙과 더불어 성령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 은사를 통해서 식별의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요한일서 4:1은 ‘영의 식별’의 신중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는 말씀에서 ‘시험하라’는 헬라어의 도키마제인(δοκιμαζειν)은 ‘시험하다’라는 의미 외에 ‘인정하다, 익히다,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들을 분별한다는 의미로 쓰여진 용어로서 디아크리시스(διακρισις, 고전 12:10)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의 의미 역시 ‘구분하기, 나누기, 판단하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실 영의 식별은 매우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문제이기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영성식별에 대해서 매우 낙관적이다.(238~) - 정말로 낙관적일까?…
38. 영성식별에서 가장 적합한 환경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내면적인 임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방식에 적응할 준비를 시켜준다. 영성식별에는 이중적인 과정이 요구된다.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환경에 대한 감성적인 경험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해석하느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선택적인 일에 대하여 어떻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느냐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선택과 식별에 동원되는 핵심적인 두 요소는 감성(affectivity)적 경험과 이성(reason)적 판단이다.
인간이 감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할 때 느낌이나 충동 등이 하나님 체험을 식별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나 추리적 과정 또한 하나님의 경험을 식별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별개의 작용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만약 감성적인 경험을 억누르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느낌과 충동 등의 감성적인 요소에만 의존한다면 주관적인 열정주의에 사로잡혀 냉철한 식별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식별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구호는 “당신의 머리를 사용하고 당신의 느낌들을 신뢰하라”는 말이다.(242) - 감성과 이성의 쌍두마차... 이하는 로욜라의 기준들이다.
39. 포티체의 디아도쿠스는 … ‘두 가지 위로’를 제시하고 있다. 성령이 주는 위로와 사탄이 주는 위로이다. 전자는 그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자마자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에 헌신하도록 초대를 하고, 후자는 영혼을 환상의 바람으로 뒤흔드는 것과 같은 위로이며, 위로의 체험 속에서 얻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지성으로부터 감추게 하려고 노력한다.(252)
40. 여러 영들의 움직임들은 스폰지나 돌 위에 떨어지는 물과 같다. 이 영혼의 성향이 영들의 성향과 정반대의 상태라면 물이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소란하고 요란하다. 그 성향이 비슷하다면 물이 스폰지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하다.(253~)
41. 상상력을 사용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 1) 상상력을 조절하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2)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가지거나 상상력의 힘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조절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3) 너무 많은 잡념이 초점을 맞추는데 방해를 하고 있다. 말씀과 더불어 상상력을 사용할 때 잡념을 억누르지 말고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두라. 4) ‘상상한다’는 의미는 그림을 그리듯이 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영상을 영화 제작자처럼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데 문제가 있거나, 예수님이 역사 속에 현존했던 실존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상태이다.(268)
42. ‘영성적 위안’이나 ‘영성적 고독’이란 기도 중에 경험되는 감성적인 경험을 말한다. 이때 ‘영성적 위안’이란 유쾌한 느낌이나 편안한 느낌을 말하고, ‘영성적 고독’이란 불유쾌하고 불안한 느낌을 말한다고 단순화시킬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말하는 위안과 고독이란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순간에 경험되는 기분이나 느낌이 영성적 위안인지 영성적 고독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느낌 자체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느낌이 일어난 전후 사정을 잘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 느낌들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나는지 혹은 이기적 자아에로 점점 더 집착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심리적인 느낌이 불유쾌하더라도 그 결과가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나면 이는 ‘영성적 위안’이 될 수 있고, 반대로 기도 중에 감성적인 경험이 유쾌하고 편안한 느낌이라 하더라도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게 되면 ‘영성적 고독’이라 할 수 있다.
영성적 고독이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대해서 저항할 때 일어나는 경험이다. 한편으로 그 저항은 의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저항에 대해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저항일 수도 있다. …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영성적 위안은 따르고, 영성적 고독은 대항하라.”(319, 322, 324) -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괜찮은 개념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