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푸른빛이었다 -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우주로 가는 길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지음, 김장호.릴리아 바키로바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1. 담담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우주로 떠나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드문드문 우주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을 위한 훈련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일면 우주여행에 대한 막연한 ‘낭만적인 환상’을 깨뜨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가린 자신은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우주여행에 성공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들이 책의 곳곳에 나타난다. 그의 강인함과 열정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도전 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나를 자극한다. 과연 그는 최초의 우주 비행사답다!

2.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40p). 변화! 정말 그렇다. 그 두려움을 깨치고 일어나는 사람만이 변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3. 한편으론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우주선에 대한 구상, 그것의 복잡한 건조 과정 등이…

4. 황정민 씨가 ‘밥상…’ 운운했던 것도 떠올랐다. 물론 최초의 우주비행사로서의 가가린의 노력도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그 뒤에서 그런 ‘밥상’을 차리기 위해 애썼던 이들에도 관심이 기울어진다. 기초적인 작업으로부터 고도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맡았던 사람들… 그들의 공로와 소중함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가가린이 “하늘에 올라가 봤더니 하나님은 없더라”고 했다는 말을 수차례 들어왔는데 이 책에는 그런 말은 물론이요 어떠한 종교적인 부분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부분 부분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절대적으로 따르는 모습들은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느 정도의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책을 보면서 가가린이라는 사람이 참 인간적이고 상당히 친밀하게 느껴졌다.

6. 오타. 85쪽 3째 줄에 ‘유라’은 ‘유리’가 맞는 듯.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1934년생인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쟁이었다.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 해 9월, 고향은 전쟁터가 되었다.(16) - 일곱 살 때 일어난 전쟁,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게 된 것이 전쟁이라니! 안타깝다는 생각, 그리고 가가린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한 첫 번째 내용.

2. 소위로 임관한 나는 북방지역 근무를 자원했다. 제일 힘들다는 곳에 가기로 한 것은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18) - 가가린의 도전 정신을 볼 수 있는(그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연출이리라는 생각도 없진 않지만…) 부분이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앓고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 우주를 동경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25) - 그가 온갖 어려운 과정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이러한 우주에의 동경, 병을 앓을 정도의 강렬한 동격이었으리라.

4. 우주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 민첩한 두뇌, 강인한 정신, 불굴의 의지, 지구력,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경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주비행사는 복잡한 상황 아래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상황변화에 시시각각 대처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27) - 우주비행사의 자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까다롭고도 완벽한 조건을 요구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5.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군의관은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동안 생체 조직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여러 요소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 첫 번째는 우주 공간 자체의 물리학적 특성과 관련된 요소이다. … 두 번째는 로켓 비행과 관련된 것이다. … 세 번째는 우주선 내의 인공대기, 제한된 선실 크기…(35) - 이런 세세한 소개는 우주비행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깨뜨려 주어 실제적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6.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40) - 가가린의 생애와 인류 역사를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7. “유리 알렉세예비치, 당신은 커다란 책임을 맡았습니다. 훌륭하지만 공산당원은 티끌 하나만 몸에 묻어도 모두들 쳐다보는 존재랍니다.”(58) - ‘공산당원’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았다. 정말 그렇다! 티끌 하나 가지고서도 쳐다보는 존재!

8. 완전한 고독에 접어들면 인간이란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고, 지난 인생을 다시 돌이켜보게 된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려 했고, 주변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우주로 날아가는 날만을 생각했다.(74) - 나는 여기서 가가린의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를 본다.

9. 인간을 로켓에 태우고 탄도궤도로 올려 보낸다는 미국의 발사계획은 실질적으로 우주비행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87~) - 우주 비행을 놓고 소련과 미국이 경쟁했기 때문에, 이런 신경전은 불가피하리라. 게다가 이런 분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가가린의 이 지적이 ‘사실’을 기술한 것인지, 반대 체제에 대한 ‘비판’을 기술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소련의 우주 비행 역시 처음에는 이와 같은 탄도궤도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미국은 소련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초보적인 부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것을 굳이 자신들의 형편에 비추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이런 ‘이념적’인 부분들이 책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10. 그들은 내가 우주비행을 마치고 지구 위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소비에트인, 콜호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친족처럼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154) - 이런 부분들이 가가린을 인간적인 존재로 보게 만든다.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소박한 모습과 태도…

11.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우주로 간 최초의 동물 라이카, 그리고 가가린이 이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 테레시코바, 최초의 우주유영,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본격적인 우주정거장 미르…(171) - 구소련의 우주 개발의 빛나는 성과들에 대한 역자의 소개이다. 역자의 지적처럼 동서냉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런 성과들이 가려지고, 왜곡되며, 진실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알려졌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비난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혼란되고 피폐한 가운데 어떻게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여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를 비난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조차 우주계획이 민생을 저버린 지나친 출혈이라는 비난이 나왔으니(190p)… 하지만 업적과 성과는 그것 자체로 인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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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2008-08-1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유라가 아니라 유리란 지적...러시아어는 이름과 성을 부를 때 남성, 여성에 따라 어미가 다르고 게다가 격변화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유리가 유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관심있게 보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역자

자유혼 2008-09-16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가린은 남자니까 유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요?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 고전시가로 만나는 조선의 풍경
김용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시에 대하여...

 

1) 제목도 서론(5, 13p)도 ‘시=노래’로 보고 시작한다. ‘시’라고 하면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데 ‘노래’라고 하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시를 시로만 보는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다. 노래로서의 시! 전혀 새로운 주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조금은 강조되어도 괜찮을 발상이다.

 

2) 저자는 시조(시)의 고루해 보이는(12p) 틀 안에서의 다양성(6p)을 잘 집어주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틀’을 부자유함, 부자연스러움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틀을 인식하면서도 그 안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고 하는 점이 오히려 더 흥미를 끈다.

 

3) 시조의 저자에 대한 관심(7p ‘문학은 언제나 작품만을 떼어내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어진 배경과 지은이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읽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에 대해서 동의한다. 하지만 작품이 항상 저자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text를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만든 저자(author), 그것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world),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reader)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그러한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35p ‘물론 작품 속의 상황을 반드시 그의 삶과 일치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또한 저자의 형편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38p ‘그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다 깊이 해석해 들어간다면, 그는 그 오동나무를 보면서 능력이 있으면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자신을 떠올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일반적인 시조와 대조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사설시조도 나의 관심을 끌었다. 파격적인 형태와 그것이 담고 있는 더 풍성한 내용들!

 

2. 글들을 읽으면서…

 

1) 일곱 번째 글(‘오백년 도읍지를…’)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망한 고려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친 고려와 친 조선)을 함께 제시해준 것이 도움도 되었고 흥미도 있었다.

 

2) 아홉 번째의 ‘술’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는 [책문]에 나오는 술의 폐해에 대해 논하라고 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함께 연결해서 읽으면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 더 도움이 될 듯…

 

3) 열두 번째의 슬픈 사랑 노래, 이별 노래를 읽으면서는 그것이 너무나 아련하고 마음을 아프게 해서 살짝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4) 중간 중간에 나오는 ‘왕(王)’에 대한 절대적인 태도를 보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애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쭈뼛한! 어쩌면 그렇게 ‘절대적’일 수 있을지… 오늘날에는 꿈꿀 수도, 취할 수도 없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절대자를 향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

 

5) 중간 중간에 삽입해 놓은 그림은, 글과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글들을 읽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더욱 생생한 현장 속으로 이끌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써 음악을 매우 중시했는데, 윤리와 음악이 결합된 표현인 ‘예악(禮樂)’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심신을 수양하는 데 있어 윤리 못지않게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29)

- 옛 음악의 용도! 음악에 대한 생각! 이러한 시각은 바른 이해, 그리고 폭넓은 이해를 돕는 좋은 지적이라 생각된다. 음악의 힘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

 

2. 문득 들었던 잠을 다시 깨운 것은 ‘문 앞에서 여러 가닥으로 들리는 어부들의 피리 소리’이다. 아마도 유성원이 꿈속에서 만나고자 했던 태평성세를 조그마한 어촌 마을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32)

- 일단 전문가의 해석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꺼림칙한 생각이 든다. 나는 앞에서 처음 이 시를 읽으면서 종장의 문구를 저자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평성대를 꿈꾸려 하는데 수성어적이 그 꿈을 깨워버렸다는… 혼자만의 생각. --;

 

3.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연에서의 생활을 추구했으며, 자연 속에서 심성을 닦으며 유유자적한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즐겨 지었다. 비록 빈한(貧寒)한 처지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연에서 지내며 올바른 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흔히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세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의 ‘도(道,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44~)

- 아!!! 딱 내가 원하는, 내가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다! 내는 선비적인 걸까?

 

4. 흔히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일컫는 말로 ‘지음(知音)’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음이란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다’는 의미로…(137)

- 이것 역시 전문가인 저자의 말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지음’은 종자기가 백아가 연주하는 ‘음악(音)을 알아준다(知)’는 의미라고 알고 있었는데… ‘소리를 알아준다’와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다’는 차이가 있는 듯이 여겨져서…

 

5. 여러 의학서에 따르면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20세였다. 언뜻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도 대개는 40세 정도면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니…(220)

- 그 나이를 먹도록 살았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나를 생각하게 된다.…

 

6. ‘화기융농(和氣融濃)’이란 ‘조화로운 기운이 무르익는다’는 의미이니, 보록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모습이지만 비교적 절ㅈ된 흥취를 연출하는 자리였다.(321)

- 이 구절만은 아니고, ‘풍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계속 몇 년 전에 읽었던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에 나왔던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의 장면이 연상되었다.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삶의 멋! 아쉽고 그립다.

 

7. 아무리 어지럽게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보면 옥과 돌은 분명히 구분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 현실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 자기의 입장이 관철될 수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즉 자기의 이익을 좇아 진실을 애써 외면하곤 하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세태에 대한 비판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작품에서 그가 보기에 옥(玉)이 분명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돌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기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달픔을 느꼈다. … 초장은 세상 사람들은 옥석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박물군자(博物君子)’란 세상의 이치를 널리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니, 옥과 돌이 섞여 있다 한들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마저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현실이 자못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 자신이 보기에 너무나 분명한 사실마저도 왜곡되게 만들 수 있는 세태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331)

-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요즈음 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써놓은 듯하다. 참과 거짓이 섞여 있고, 그럼에도 바른 정신으로 본다면 그것을 구별할 수 있을 터인데도, 어떤 것도 참이라 할 수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자신에게만 옳다면 문제될 것 없다고 하는 주관주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실용주의… 이러한 사상에 물들고 빠져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비판하면 비판한다는 사실만으로 편협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몰리게 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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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성령님 - 성경적 성령론과 파워라이프
라준석 지음 / 두란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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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좋으신 성령님 ★★페이지 : 283

저 자 : 라준석

출판사 : 두란노독서 기간 : 2008.4.4-8

 

* 책을 읽으며 처음 든 생각… 추천의 글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걸까?

* 제목은 ‘좋으신 성령님’, 부제가 ‘성경적 성령론과 파워 라이프’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책은 전체적으로 ‘살려주시는 성령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성경적 성령론’을 전반적으로 다루어주고 있지 않다. ‘파워 라이프’라는 것도 그렇다. 추천사 중에서 이것을 극찬한 내용이 나오지만(18p), 실재로는 7가지 항목을 12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리 특별하고 새로운 것은 없다. 물론 성령론을 다룬 다른 책들에 비하면 그나마 실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차라리 책 제목을 ‘살려주시는 성령님’이라고 하면 가장 적당했을 듯…

* 저자는 성령의 사역을 ‘성령 세례’라는 용어로 통합시켜서 사용하는 듯 보인다. ‘내주(內住)’도 세례요, ‘충만’도 세례이며(그러면서도 신학계의 주요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인 ‘충만’과 ‘세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는다), ‘기름부음’도 세례다. 조직신학을 전공한 박사(몇 곳에서 이 부분이 소개/강조되고 있다)답지 않은 용어 사용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렇게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규명도 없고…

대신 그는 성령 세례를 ‘구분, 능력, 변화’라는 세 범주로 다시 설명한다. 구분은 구원과 관련되니 아마도 ‘내주’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요(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정작 본문에서는 구원이라는 신분과 사역을 위한 능력까지 포함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능력’은 ‘성령의 은사’와 로이드존스 목사가 주장하는 ‘충만’과 연결될 것이며, ‘변화’는 ‘성령의 열매’와 연결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 범주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책 전체가 이러한 구분에 따라 구성되었고 그렇게 설명되고 있다) 과연 ‘장점’으로 보아야하는 것일까? 이미 있는 용어들은 통합하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 ‘충만’을 ‘관계’라는 부분에 집어넣어서 ‘소멸’과 ‘훼방’과 함께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도 독특하다.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yes’하는 것은 ‘충만’, ‘no’하는 것은 ‘소멸’, 그리고 성령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이 ‘훼방’이란다. 새롭고 독특한, 독창적인 해석인 건가? 아니면 다른 이들이 이런 주장을 새롭게 하는 있기라도 하는 걸까? 이렇게 의문시 되는 부분들이 종종 나온다.

* 책을 다 읽고 든 생각… 이 책은 전에 읽었던 하용조 목사의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와 너무도 흡사하다. 말/글의 투조차도 비슷하다. 뭔가를 확신 있게 주장하는 것 같은데, 막상 중요한 것들은 슬금슬금 피해가 버리고… 짧은 문장(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장점이다)과 강한 확신(이것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끝에 느껴지는 ‘가벼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령론을 다루는데도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다’! 이것이 나의 ‘선입견’ 내지는 ‘부정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터무니없는 ‘악평’인 걸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부흥을 위한 부흥은 없었다.(38) - 좋은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작년에는 ‘극성’ 수준이었던) ‘부흥’이라는 말, 그리고 그 말의 사용…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가 ‘부흥을 위한 부흥’을 추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2. 아이스크림 하나가 사람을 살리다(63-) - ‘살리는 영’의 끝 부분에 거의 결론처럼 제시되고 있는 내용(예화)이다. 성경공부 모임에 아이스크림을 돌렸는데 어떤 사람은 울면서 먹고, 공부가 끝난 뒤 임신하고 입덧 때문에 며칠 동안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다며 눈물 흘리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아이스크림이 사람을 살린 이야기는 어디에? 나는 누가 죽으려다가 아이스크림 때문에 살았다든가 하는 내용을 기대했는데, 그게 지나친 기대였던가? 이야기 끝에 내려진 ‘결론’, “성령님은 살리는 영이시다.” 뭐 아이스크림 먹은 이야기에서 살리는 영이신 성령님을 발견하면 잘못된 거라고 할 순 없지만… 왠지 과대 포장한 선물을 풀어본 후에 느끼는 배신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3. 성령님을 ‘거룩한 영’이라고 할 때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67) - 1부 살리는 영의 chapter 3의 제목이 ‘거룩한 영’이다. 거기 할애된 페이지는 67-68페이지. 거룩에 대한 단어(‘카다쉬’ 하나) 설명, 그 다음에 생명과 관련된 구절 세 개, 마지막으로 생명의 약속과 보장, 결론은 “거룩한 영인 성령님은 살리시는 영이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이 ‘생명’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정의는 또 뭔가! 어찌 성령님이 생명 부분에서만 구별되신단 말인가! ‘살려주는 영’을 강조하기 위한 편법이다. 살려준다는 것을 그렇게도 강조하고 싶다면 굳이 성령님의 그 거룩하신 ‘거룩’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4. 성령 세례란 ‘성령께서 함께하시므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뜻한다.(82) - 난 어디서도 이런 ‘독창적’인 정의를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주장이요 정의인 걸까? 저자의 독특한 정의가 아닌가 싶은데…

5. 지난 5월 8일과 9일 이틀간,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1층에서 ‘내 생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주제로 전도 집회가 있었다. 디너쇼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자녀들이 부모님을 초청해 마련한 자리였다. … 그런데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청중이 평소 나를 잘 알고 있는 교회 어르신들이 아니라,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호텔에서 진행하는 디너쇼인 줄로만 알고 오신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 디너쇼인 줄로만 알고 오셨는데, 설교한다고 화내지 않게 해주십시오. … 사실 어찌 보면 가장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한 모임은 전도 집회이다. …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성령 충만해야 한다.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85-) - 전도 집회인가? 디너쇼인가? 왜 거기 오신 어르신들은 그 모임을 단순한 ‘디너쇼’로만 알고 계셨을까? 왜 설교자는 청중이 화낼 것을 두려워하여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을까? 성령에 민감하고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전도 집회를 준비하면서, 실수로 그것이 ‘디너쇼 형식의 전도 집회’가 아닌 ‘디너쇼’라고 광고했던 것일까? 부모님이 구원 받기를 원한 자녀들이 ‘전도 집회’인 것을 알면서도 ‘디너쇼’라고 말했기 때문일까? 저자는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알고 ‘디너쇼인 줄로만 알고 오셨는데, 설교한다고 화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 이런 ‘오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닐까? 왜 처음부터 ‘디너쇼 형식의 전도 집회’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오시지 않을까 봐? 오시게 하기 위해서 ‘디너쇼’라고 하고, 화내실까봐 간절히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서는 성령께서도 의도적인 속임을 용인하시거나 적극적으로 그렇게 추진하라고 인도해 주시는 걸까?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성령님께서도? 이런 과정을 ‘속임’이라고 보고 못마땅하게 느끼는 게 오히려 잘못인 걸까?

6. 감동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신이 삼손 안에서 움직이고 계시며, 또한 삼손에게 움직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후 삼손은 우여곡절을 겪는 인생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분된 인생을 살게 된다.(90) - 정말? 삼손의 인생이 정말로 ‘항상’ ‘구분된 인생’이었다고? 내가 알고 있는 삼손과 다른 삼손이 또 있었나? 아, 그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다. …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므로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았고, 모든 사람이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뚜렷이 구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이방 여인을 사랑해서 가까이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91)고 저자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왜 그가 “구분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거지? 직분적으로 구분되었지만, 삶은 구분되지 못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자의 결론. “삼손에게 일어났던 모든 긍정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까지도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했다.(92)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라고?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여전히 구분되었다고? 하!~

7. 이처럼 성령님은 ‘구분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분하신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분하신다.(97) - 저자는 이 부분에서 용어를 혼용/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구분된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이 같은 부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가? 그 근거는? 게다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신분)과 사역 사이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신분과 사역 둘 다 성령님의 사역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둘은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8. 한글 성경에서 ‘심판’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두 가지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구분을 짓는 심판을 말할 때는 ‘크리시스’라는 단어를, ‘어떤 상을 받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심판을 말할 때는 ‘베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베마’는 상을 주기 위해서 구분하는 ‘시상대’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99) - 음… 이렇게 구분되는군. 크리시스와 베마라…

9. 은사란 ‘살리는 일을 잘 하라고 주시는 능력’이다.(108) - 은사의 목적이 살리는 것?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주신 것 아니었나? ‘그게 그거’라고? 정확성은? 114-115페이지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는 유익하다는 것이다. 은사를 받은 개인에게도 유익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유익하다.” 그러면서 고전 14:12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도 인용한다. 그런데 몇 줄만 더 내려오면 “그 은사를 잘 사용하면 개인도 살아나고 공동체도 살아나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은사는 사람을 살리라고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락가락…

10. 성령의 은사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은사를 받는 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님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 관심이 먼저이든 사건이 먼저이든 순서에 관계없이 공통적인 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과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성령의 은사와 성령님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기대해도 좋다. 성령님은 어떤 사건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생각에 관심을 불어넣어 주신다.(115-) - 후자는 accept. 전자는? 관심만 가지면 다 받나? 성령님이 주셔야지! 물론 관심도 없는 사람은 관심을 가진 사람만 못하긴 하겠지. 그렇다고 ‘틀렸다’고 하기도 좀 그런… 어쨌든, 설교에 써먹기는 참 좋은, 귀에 착 달라붙는 표현이다.

11. 이러한 능력이 바로 ‘능력 행함의 은사’다.(133) - 사도행전 5:1-10에 나온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사건을 다루면서 그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은력 행함의 은사라고 말하는데, 조금 적절하지 않은 듯한 느낌. 오히려 이적을 행하는 것이 그에 더 가깝지 않을까? 베드로의 경우는 ‘영분별’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그 이후에 제시하는 바울과 엘루마 사건(행 13:6-12)이나,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행 16) 등은 옳다. 그런데 그 끝에 또 “능력 행함의 은사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은사이다.(134)라고 한마디 한다. 왜 그렇게 이 ‘살리는 일’에 집착하는 걸까? 책 제목이 ‘살리는 영이신 성령’도 아닌데…

12. 예언을 듣게 되면 숨은 죄에 대해 책망을 듣게 되며, 그 결과 사람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137) - 고전 14:24-25에 대한 설명이다. 이 구절을 여러 번 봤을 텐데도 이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놓치고 있던 부분…

13. 어떤 소리로 들리든지 간에 방언과 관련하여 알아 두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동일한 음이 반복해 계속 나올지라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내용은 다양한 것이다. 둘째, 단순한 음으로 들리는 방언과 유창하게 들리는 방언은 결코 수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 셋째, 방언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147) - 둘째, 셋째는 통과, 첫째는… 글쎄… 이 글을 보면서 ‘빵상’ 아줌마가 생각났다. 외계어로 노래한다고 같은 단어만 줄줄 말하다가는, 해석해보라니까 상당히 길게 다양한 내용을 말했던… ‘이 짧은 말에 이렇게 긴 내용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던… 여기서 제시되는 대로라면 ‘빵빵빵’ 세 마디만 했어도 두 세 문장이 포함될 수 있다는 이야긴데… 어디서 나온 기준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14.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탁월성’이다.(168) - Amen!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이라고 하고 싶다.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충성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충성했느냐가!

15. 교파와 교단, 선교단체에 따라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서로 상이하게 사용한다.(201) - 라고 하면서 ‘구분, 능력, 변화’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그렇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단지 ‘강조점의 차이’일 뿐일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듯… 오랜 시간 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무게 있는 문제를 너무 가볍게 풀어버리는 것 아닌가? 정말 문제가 이렇게 단순한 것일까?

16. 성령 세례는 우리가 이행해야 할 것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사건에 대한 약속의 선포이다.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이 명령법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성령 세례와 관계된 모든 성경 구절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령 세례가 우리의 상태에 따라서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또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이라는 의미이다.(203) - 정말 그럴까? 하긴 저자의 정의처럼 성령 세례가 ‘성령께서 함께하시므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뜻한다(82)면야… 일단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뜻풀이’가 전혀 다르니 뭐라 할 수도…

17. “성령과 불로”라는 표현은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불같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절에서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207) - 이건 해석이 크게 두 가지다. 저자처럼 ‘성령 세례 = 불세례’로 보는 경우, 그리고 그 둘을 별개의 것으로 보되 불세례는 사실상 ‘심판’을 가리킨다는 보는 경우.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전자를 주장하는 경우 ‘불의 혀’를 많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정작 본문은 ‘급하고 강한 바람’에 대한 묘사인데다가 ‘불의 혀’가 아니라 ‘불의 혀 같이’라고 되어 있다. 표현이 비슷하다고 무조건 들이대면 곤란하다.

18.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을 받는다’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211-) -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행 19:1-7)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 또한 생전 처음 본다. 게다가 ‘자연스럽게’까지? 색다른 해석이 많이 나온다. 그게 다 틀렸다고 하기도 그렇고 다 맞다고 하기도 그런…

19. 230페이지에서 사울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을 소개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제까지 유사한 경우에는 꼭 등장했던 ‘구분, 능력, 변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저자의 이제까지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으니 그건 ‘성령 세례’여야 한다.

20. 역시 주도권은 성령님께 있다. 조작해서도 안 되고, 인간적인 술수를 써서도 안 된다.(235) - Amen!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 같지가 않아서…

21. 성령님과 우리의 관계에는 성령 충만, 성령 소멸, 성령 훼방이 있다. 성령 세례가 약속 선포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은 명령으로 되어 있으며, 성령 훼방은 설명으로 되어 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련님의 음성에 “예”라고 대답하며 순종하는 상태이고, ‘성령 소멸’이란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상태이며, ‘성령 훼방’이란 성령님의 존재 자체를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236) - 글쎄…내가 과문(寡聞)한 탓일까? 이런 설명들이 너무나 생소하게 보이니…

성령 충만은 명령형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태도가 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은혜다. 그러나 태도가 된다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다.(239-) - 성령 세례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반면 성령 충만은 선별적이라고? 어째 구도가 내 것과는 정반대인 듯… 명령형이라는 것이 선별적이라는 것의 근거로 사용(252p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될 수 있는 것일까?

22. 내가 성령님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님 안에 들어가서 성령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다.(240) - 호! 또 생소한 표현! 내가 성령님 안에 들어간다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분명히 있다. ‘성령이 내 안에’도! 그런데 ‘내가 성령 안에’라는 말은 보지 못했던 거 같은데? “성령님이나 예수님이나!”라고 말하면…

23. 그때에 우리가 거부하지 않고 “예”라고 대답하며 순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 쉽게 말하면 성령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240) - 응? 성령 충만은 수동태(239)라며? 어째 능동태로 표현하는 건가?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순종’이다.(244) - 이 표현과 ‘성령 충만 = yes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분명 그 뉘앙스가 다르다! 전자는 수용 가능하나(순종) 후자(yes)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24.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19절에서는 감사하지 않는 삶을 ‘성령 소멸’과 연결시킨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이다. 성령 충만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라면, 성령 소멸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이다.(247-) - 감사(18절)와 소멸(19절)을 연결시키는 식의 해석이 정당한가? 소멸에 대한 내용은 앞 절(18절)이 아니라 뒷절(20절)에 걸치는 것이 아닌가? 256페이지에 다시금 소멸을 다루지만 거기서는 ‘감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25. 성령 훼방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 훼방죄를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258)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의 직접적인 의미는 성령님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모독죄를 말한다.(259) 31절에 언급된 ‘훼방한다’는 말은 32절에 쓰인 ‘거역한다’는 의미와 동일한 뜻인데, 그것은 존재 자체를 믿지 않고 모독한다는 뜻이다. 즉, ‘성령을 훼방한다’ 또는 ‘성령을 거역한다’는 말은 성령님 자체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성령님을 모독한다는 것이다.(262) 성령훼방이란 바리새인들이 성령님의 존재와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귀신의 역사로 돌리면서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성령님의 존재 자체와 역사를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263)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264)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동일한 죄이다(265)- 그러면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령 훼방죄를 짓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영(靈)이 죽어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님을 감지할 것이며, 감지하지 못하는 성령님을 훼방까지 할 수 있을까? 성령 훼방죄를 바리새인과 연결한 것은 옳았다. Hermann Reddelbos가 그의 마태복음에 대한 짤막한 책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 성령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라고 몰아붙인 것이지, 성령님의 존재와 역사(役事)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행해진 성령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그것이 성령 훼방죄라고 리델보스가 말한다. 사두개인이라면 몰라도 바리새인이 성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불신이 성령 훼방죄라는 것도…

26. 파워 라이프 3. 성령님을 언급하라. 성령님에 대해 말을 많이 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274) - 신기한 주장. 말하면 된다고? 그 성경적 근거는? 그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주 중요한 비밀”(275)이라면 왜 성경은 그 사실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27. 성령님의 역사는 점염성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려면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 있는 것이 좋다. 활활 타는 불이 다른 곳으로 자꾸 옮겨 붙듯이 불같은 성령님은 자꾸만 옆으로 옮겨 붇는다.(278) - 정말 조직신학 박사님이 한 말이 맞는 건지? 성령을 덤으로라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불이 옮겨 붙는 것처럼 ‘불같은’ 성령님도 옮겨 붙는다고?

28. 그렇다. 태도였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 불순종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 낙심하지 않고 도전하는 태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성령님을 드러내는 태도,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약속을 믿는 태도! 성령님은 태도를 보신다. 성령님은 태도가 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282) -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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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노 레슨 - 지혜로운 스승에게 배우는 명쾌하고 탁월한 인생레슨
조엘 박 지음 / 박스북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 흡인력이 있다. 이것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요즈음 유행하는 심리학적인 가르침들이나, 기독교 안의 가르침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곳곳에 섞어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소개되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요즘 유행하는 종류로서의) ‘교과서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말하고 목회를 말하지만 거기에는 성경적인 기준들이 아니라(성경 구절들이 인용되고 해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대부분은 주관적인 해석들로 보인다!) 일반적이고 비즈니스적인 원리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점점 배제되는 듯한 느낌!

* 자꾸 생각하게 된다. 목회란... 사람을 중심으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만 하는가? “사람들은 목회라고 하면 하나님만 생각하지만 목회란 사람을 놓고 하는 것이라네.”(165p)라는 말은 나로 하여금 벤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

* 아쉬운 점! 글씨 크기와 행간이 너무 크다. 책을 읽다보면 글씨 크기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데, 지나치게 넓은 행간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마치 text 파일을 조잡한 프로그램으로 읽어 들여서 보는 듯한 느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학생이 준비되면 스승은 나타난다.’는 플라톤의 말처럼…(9) - 저자는 자신과 벤의 만남을 하나님의 역사로 이야기하면서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다. 이 표현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면서 정민 교수의 [책 읽는 소리]를 보면서 느꼈던 감화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거기서 저자는 “뭇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천번 백번 찾았네(衆裏尋他千百度)”(172p)라는 시구를 소개하면서 자신도 이 글씨의 전각을 표구해서 연구실에 붙여 놓았다고 말한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만남을 기다리면서…

2. 성숙한 삶을 위해 하루에 한 두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네. 성숙한 사람들은 언제나 바쁜 와중에도 개인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지.(25-27) - 벤의 말이다. 이것은 QT에 대한 가르침처럼 보인다.

3. 공장을 비롯하여 아무리 좋은 요소들을 다 갖추었다 하더라고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부족하면 포도는 열리지 않게 되네. 물이 생명이기 때문이지. 목회도 마찬가지라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설교를 잘하고, 업무를 잘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가지에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목회는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네. … 겨우라니? 자네는 관계를 겨우 정도라고생각하나? 관계는 겨우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고 시작과 끝이라네. 관계는 모든 공동체의 생명이고 시작과 끝이라네.(44) - 벤은 ‘관계’가 인생에 있어서도 목회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자리에 서서 벤의 말(“목회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네.”)을 듣고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고 나름대로의 답변도 해보았다(내 답변은 ‘진리의 성령’이었다). 그리고 벤의 답변을 읽어가면서 ‘당혹감’을 느꼈다. 과연 그럴까? 인생에 있어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목회에서도? 그것이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면 단지 사람과의 관계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벤은 요한복음 15:5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가지고 ‘관계’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4.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그 어떤 업무보다도 관계를 우선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목회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네. 목회를 기도나 설교, 또는 조직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피곤함을 느끼고 있더군. … 목회에서 관계는 제일 중요한 것이라네. 관계는 목회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도 똑같이 중요하지. 카네기 기술 연구소의 조사결과 엔지니어링과 같은 기술 분야에서도 재정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 15퍼센트는 자신의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고, 85퍼센트 정도는 인간관계, 즉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통계에 나타나고 있네. 목회에서 설교나 기도보다도 관계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네.(47~) - 목회를 편하게, 어려움이 없이 하려고 한다면 ‘관계’를 최우선순위에 놓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목회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씀도 전해야 하고, 그래서 관계가 나빠지기도 한다. ‘관계’를 최우선시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만한 설교는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벤은 목회에서 설교나 기도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 엔지니어링 분야에서의 성공 퍼센테이지를 제시한다. 하지만 과연 엔지니어들의 성공 퍼센테이지가 ‘성공’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목회’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가? 목회의 목표는 과연 엔지니어들의 성공과 같은 종류의 ‘성공’인가? 현대 비즈니스 이론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목회에 적용시키는 방식!…

5.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그동안 목회의 성공을 위해 설교준비, 기도, 독서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왔다. 그 외의 것은 목회자에게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관계 역시 설교나 기도보다 우선순위에 둔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설교준비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만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계를 감소시키려 노력했다. 목회자의 능력과 결과는 설교와 기도로 나타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0) - 조엘의 생각이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물론 설교, 기도, 독서 외의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그것들이 ‘핵심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엘은 ‘너무 쉽게’ 설득되어진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성공’이나 ‘능력’에 대한 개념도 저자와 좀 다르기도 하지만… 관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관계가 말씀과 기도보다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자칫하면 목회에 있어서 ‘신적인 부분’은 전혀 배제된 채 일반 기업의 경영과 똑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목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6. 연합이 어려운 것은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이 연합을 맺어야 하기 때문이라네. 리더는 1:1로 연합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제나 1:2, 1:10, 1:100으로 연합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네. 연합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관계라고 한다네. 중요한 것은 연합이 되고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네. 우리 주위에서 열매가 없는 이유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60) - ‘관계’의 중요성이 다시금 요한복음 15;5로 설명되어진다. 이번에는 ‘열매’라는 개념도 함께. 그런데… 연합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것 하나가 간과되고 있다. 성경 본문에서는 분명 예수님 자신이 포도나무로 제시되고 있는데, 설명에서는 어느 사이에 포도나무가 목회자로 둔갑해버렸다. 결국 성도가 목회자와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주장까지… 그것이 사실인가? 성도가 목회자와 관계가 현성되면 열매를 맺게 된다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과연 요한복음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7. 포도나무의 목적은 가지들에게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네. 그것은 바로 인정과 격려라네.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의 역할을 맡은 구성원들을 인정하고 격려해야만 하네. 그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이지.(63-) - 이제 포도나무의 역할은 수분과 영양 공급으로 한정되었고, 그것은 다시금 인정과 격려라고 못 박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록펠러의 이야기와 실용주의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 소개된다. 벤은 과연 요한복음 15:5를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해석과 적용은 정당한가? 물론, 목회에 있어서 인정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요한복음 15:5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메시지란 말인가? 예수님은 포도나무로서 우리에게 인정과 격려를 주어서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란 말인가? 본문은 결국 구색 맞추기에 불과해 보인다. 성경 본문이 소개되지만 결국은 심리학적, 비즈니스적인 가르침이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8. 책상의 위치는 업무의 내용과 일치되어야 하네. 예를 들면 상담을 위한 사무실이라면 책상을 전면을 바라보게 둘 필요가 있네. 하지만 독서와 설교준비를 위한 것이라면 책상을 벽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유리하지.(90) -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상당히 지혜로운 조언처럼 들린다. 하긴, 이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새롭게 들리겠지만…

9. 갈등을 기도나 예배보다도 먼저 해결하라는 말씀이네. 사람들은 갈등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만 열심히 하려고 한다네. 그러나 기도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네. 누누이 말하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다네. 갈등을 풀고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지.(100) - 이번에는 마태복음 5:23-24의 제물을 드리려다가도 화해할 사람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라는 말씀이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기도만 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갈등을 풀고 해결하는 것은 과연 사람의 일일 뿐일까? 갈등 해소를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시는 것일까? 마태복음과 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잠언 16:7을 보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건 어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찾아가서 화해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다. 어떤 종류의 갈등은 하나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는 점점 이상하게 흘러간다. 목회에서 말씀과 기도를 제치고 ‘관계’가 1등 자리로 나섰고, 사람과의 갈등 해소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분이 되어버렸다.(하나님이 하실 일과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는데, 갈등 해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니까!)

10. 링컨은 뛰어난 관계의 기술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네. … 링컨은 이렇게 말을 했네. ‘누군가와 논쟁을 준비할 때 나는 시간의 3분의 1은 나 자신과 내가 말할 내용을 준비한다. 나머지 3분의 2는 상대와 그가 말할 내용을 생각하는데 할애한다.’고 했다네. 초점이 상대에게 있다는 말이라네. 쉽게 얘기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라는 말이라네. …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물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준비한다네. 내가 치즈와 커피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물고기의 미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 앞에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네. 그것은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네.(103~) - 이것은 실제적이고 동감이 가는 이야기다. 관계가 최고라는 주장을 보고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관계를 위한 기술과 원리.

11.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을 250명을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소중함은 정말 크게 다가올 것은 분명하네. 250명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118) -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250명 법칙에 대한 설명 끝에 나온 결론이다. 비즈니스에 적용한다고 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목회에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옳은 것일까? 목사가 교인을 바라보면서, 그를 통해서 교회에 등록하게 될 250명을 생각하면서 그 소중함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이미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한 영혼과 천하의 비교는 비실제적인 듯이 보여서 무시되고, 한 사람 뒤에 250명이 있다는 주장은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보여서 열렬히 환영받아야 하는 것일까? 교인은 목사의 고객인가?

12.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이웃과의 관계는 소원해지지. 이런 논리의 주입으로 크리스천들은 성서와 믿음, 그리고 은혜를 자기위안의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한다네. 결국 가짜 크리스천들을 양산하는 셈이라네. 성서를 읽어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위한 믿음,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은혜로 이해하게 된다네. 결국 자기도취나 자기자랑 같은 이기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사회 속에서 지탄을 받는 이유가 된다네. 이런 크리스천들에게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을 기대할 수 있겠나?(129) - 오직 사람, 오직 관계, 오직 성공만을 생각하면 사람을 섬기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해지지. 이런 논리의 주입으로 크리스천들은 사람과 관계, 그리고 성공을 자기위안의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한다네. 결국 가짜 크리스천들을 양산하는 셈이라네. 성서를 읽어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위한 관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사람으로 이해하게 된다네. 결국 자기도취나 자기자랑 같은 이기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탄을 받는 이유가 된다네. 이런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을 기대할 수 있겠나?

13. 세 가지 기준을 설명할 수 있네. 첫째, 인생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둘째, 헌신하고 있는가? 셋째, 재능을 사용하고 있는가? …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다네. 그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라네.(133) - 이것은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의 복제판으로 보인다.

14.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처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다. 세 번째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기 싫어했다. 네 번째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나의 신봉자가 되어 버렸다.’ 확실히 히틀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네. 그는 군중들에게 반복을 통해 바넘 효과(Barnum Effect)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네.(135-) - 진리는 계속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도 이렇게 계속 이야기되어지면 진짜인 듯 여겨지기도 한다. 바넘 효과는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주의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15. ‘세 가지 좋은 이유를 대기 전에 말인데, 자신의 사업을 아직 더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든가, 가족이 아직 건실하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든가, 자신의 부인이 아직 수표에 사인을 할 줄 모른다든가, 자식들이 사회현실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든가 하는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길 바랍니다. 나의 관심사는 바로 당신이니까요.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 좀 더 놔둘 필요가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143) - 리아 루프트(Lya Luft)의 [Perdas & Ganhos]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출근 준비하는 한 남자에게 죽음의 천사가 찾아왔고, 죽지 않아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대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 나온 내용들을 제외한 것을 제시하라는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당신은?

16. 사람들은 목회라고 하면 하나님만 생각하지만 목회란 사람을 놓고 하는 것이라네.(165) - 물론 목회는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목회가 ‘하나님’과 무관한 일일까? 하나님과 무관한 목회가 목회일까?

17. 리더들의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아나? 그것은 입을 열고 귀를 닫는 것이라네.(168) - 듣기의 중요성!

18. 여기서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사람의 구체적인 표현일세.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네.(177) - 벤의 해석은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주장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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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공주 2008-04-1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표지와 제목보고 구입했는데 내용은 뭐 별로 신선한 새로움은 없네요...요즘 흔히 많이 하는 이야기들..책사이즈와 행간간격도 좀 그렇고. 한시간만에 다 읽었나? 내용이 너무 진부해요..너무 주관적인거 같기도 하고..별다른 색다른 대안도 없고 종교적이지도, 그렇다고 일반적이지도, 않은..그저 그런 책!!

jayuhon@hanmail.net 2008-04-1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니까요... 다른 곳에 올렸더니 비판적인 시각으로 썼다며 큰 일 난 것처럼 떠들더군요. 책 내용 메모한 것이 저작권에 걸리느니 뭐니 해가면서... 책을 읽고 느낀 것을 쓰는 것이 서평이고, 책이 일단 나왔으면 그것이 좋다 나쁘다는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근거 없는 악평은 거절해야겠지만...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유해룡 지음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 책을 읽으면서 ‘잔잔한 물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 제목처럼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에 대해 잔잔히, 그리고 차분히 알려주는 듯한 느낌…

* 하지만 책을 급하게 출판했는지 교열/교정이 덜 된 느낌도 받았다. 예를 들어, 95페이지의 ‘직관적이고 사랑의 지식’이라는 표현이나, 97페이지의 ‘관상한다면… 발견하는 데 있다’ 같은 표현은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여겨진다.

* 131페이지 이하에 나오는 예화는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수필집이 아닌 ‘논문’ 비슷한 성격의 책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 ‘식별’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에는 생각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다섯 중에 셋 정도?

* 영어(영적인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216 이하)은 유익했다. 이미 십자가의 요한이 쓴 [가르멜의 산길]을 읽었음에도, 그 부분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는 다른! 좋은 ‘설명’의 유익과 탁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 ‘영적 식별 연습’(326 이하)은 숨은 복병처럼 내 마음을 습격해 왔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식별하고 지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심!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여기서는 특별히 내적인 차원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내적인 삶을 모두 영성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루이 부이에(Louis Bouyer)는 ‘종교적인 삶’, ‘내면적인 삶’, ‘영성적인 삶’을 세분화하면서 내면적인 삶이 반드시 종교적인 삶과 영성적인 삶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8) - 복잡해 보이는 구분이지만, 오늘처럼 모든 것이 ‘혼잡’하게 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개념 저 개념, 이 단어 저 단어가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난삽하게 사용되고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상 위험하기까지 하다.

2. 내면적인 삶과 기도훈련을 위한 지침… 다섯 단계의 영성수련을 제시했다. 첫 단계는… 준비 단계… 두 번째로서 정화의 단계에… 세 번째는 조명의 단계로… 네 번째는 일치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관상함으로…(9-10) - 목차에 대한 소개만 보아도 상당히 균형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 ^^ 그런데 32페이지로 가면 이것이 저자 자신의 체계가 아니라 위디오니시우스의 체제를 빌려온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부분은 좀 밝혀주는 것이 필요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고안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 않을까…

3. 생기의 원의는 ‘살아있는 숨’이라는 뜻이고 생령은 ‘영혼’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희랍적인 사고로서의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숨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기와 생령은 서로 분리된 구성 요소라기보다는 생령은 영과 육의 살아있는 통합체이며, 생기는 생령이 되기 위한 필연적 요소이다.(18) -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풀어(?) 놓고 있을까? --;

4. 구약의 존재론적인 인간 영성을 언급할 때 영이 없는 자연인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도 인간을 언급할 때 중요한 개념이 영육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전체를 총칭하는 몸(σωμα)의 개념이다. … 그러므로 고전 2장 말씀의 ‘영적’이다 혹은 ‘육적’이다 라는 구분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성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구성이 조화롭게 작용을 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표현방법이다.(19~)

5.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엣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개인적이고 정의적인(affective)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열광주의자들과 정적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이러한 의미를 피한 대체적인 용어가 헌신(devotion)이라는 말이다. … 초대 감리주의자들은 ‘완덕’(perfection)을, 복음주의자들은 ‘경건’(pie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초기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에서 사라졌다. … 19세기에 들어서 ‘영성’이라는 말은 주로 제도권에 속한 교회에서보다는 자유로운 신앙그룹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나타났다.(23) - ‘영성’ 용어의 변천사.

6.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수덕적인 삶)과 비상한 삶(신비적인 삶) 사이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한 이해가 서로 상충되고 있다.(25) - ‘영성’을 바라보는데 통일되고 확정된 ‘틀’은 없다는 것.

7. 경험적인 차원을 다룬 ‘영성’과 이론적인 차원을 다루는 ‘신학’이 구분되어질 만큼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신학은 하나님의 경험의 반추임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신학은 신학적인 반성을 경험의 뿌리에 두지 않으려 했다. 칼빈 역시 [기독교 강요] 곳곳에서 스콜라 신학은 영적인 자양분을 줄 수 없는 사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0) - 오늘의 신학은 어떤가? 거기에서 ‘경험’의 위치는 어디일까?

8. 기독교 영성을 기독교 실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강조할 때 사실 이 경험이란 대단히 위험스러운 요소를 안고 있다. 경험은 언제나 통제와 식별적인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낳게 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통제 기능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성서요, 둘째는 교회적인 전통에 대한 이해이다. 말하자면 성육신적이고 기독론 중심적인 칼케돈의 전통 등의 이해를 의미한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믿을 만한 것(the authentic)과 믿을 수 있는 것(the inauthentic)을 증명해낸다. 세 번째는 이미 교회에서 검증된 과거의 성인들이나 신비가들의 경험이다. 그들은 이미 교회 안에서 검증된 증인들이다. 그들은 경험이라는 시련들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의 정화와 어두운 밤들을 통과하여 예수의 영에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낸 사람들이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이나 안셀름과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에게’ 말한다는 의미로 신학을 전개해 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만이 참 경건에 이르는 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38) - 매우,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통제와 식별의 기능!

9.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영성수련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숙고한다면 행위보다 존재적인 영성수련이 우선된다.(42) - 요즈음의 ‘행동’ 중심의, 심지어는 ‘결과’ 중심의(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영성수련을 행하는) 영성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원칙이다!

10.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영성수련은 또 다른 측면이 강조되어지고 있다. 영성수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말보다는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중세의 분위기에서 영성수련이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면 현대의 분위기는 채움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중세와 현대 사이에 인간을 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인간론이 인간의 타락에 더 초점을 두었다면, 현대는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가능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부정적인 인간관에서 보다 긍정적인 인간관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43) - 이러한 추세는 내가 보기엔 위험스럽다. 이것이 영성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심지어 신학에 있어서까지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 같은 사람은 “과거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한 신학은 더 이상 신학일 수가 없으며, 인간학일 따름이다. 기존의 신학이 인간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누구를 중심으로 잡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11. 미국의 윌리엄 아이버슨(William Iverson)은 미국 국민의 4분의 1이상이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하였다라는 보고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파운드의 고기는 4분의 1파운드의 소금으로 절일 수 있다. 만약 오늘날의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 곧 세상의 소금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효과는 어디에 있는가?”(45) - 예전에는 많이 이야기되었던 주제다. 오늘날에는 별로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12. 정신의학자 스코트 팩(M. Scott peck)은 그의 [그다지 다니지 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_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발전에 대한 비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를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훈련 없이 성도가 되는 지름길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46) - 싸구려 기독교! 싸구려 신앙! 그리고 그것을 조성하는 정신 나간 지도자들!!!

13. 버나드의 이러한 수련법들의 의도는 독서를 통해 신령한 젖을 빨고, 명상을 통하여 먹은 양식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기도를 통해서 소화해 냄으로써 전인적인 강건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65) - 옛것에 치우칠(수구주의)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내용은 얼마나 좋은가! 새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더 낫고 더 좋은 것은 아니다.

14. 일반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필요성으로부터 시작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칼빈)은 기도를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79) - 실용주의적 도구…

15. 고백자 맥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는 “인간의 본질이 신성화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이다. 그 성육신 사건은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하나님의 사건이다.”라고 했다. 기도를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여준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다.(81) -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과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성품에 아무리 많이 참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뿐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맥시무스의 언급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6. 정신분석학에서는 기도를 자기암시(auto-suggestion), 언어적 자기자극(verbal self-stimulation)이라고 한다. 기도가 순전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 실현에 머물러 있다면 그 기도는 심리적인 효과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88) - 기도의 심리학적 분석이라…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분석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으며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17. 명상과 관상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시킬 수 있다. 명상기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반면에 관상기도는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말한다.(90) - 아주 잘 된 정의이다! ^^*

18. 영성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종류의 관상기도를 말하고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의 관상의 특징으로는 일체의 영상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을 주장하는 전통이다. … 또 다른 전통은 상상력이나 갖가지의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전통이다. …

‘후자’의 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는 길을 긍정신학 혹은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라고 한다. ‘전자’의 비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는 방법을 부정신학 혹은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라고 한다. (96~) - 전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속한 전통이요, 후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게 속한 전통이다. 두 가지를 각각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의를 내려놓은 것을 보니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된다. (두 번째 단락의 ‘후자’와 ‘전자’는 내가 책의 순서와는 반대로 바꾸어 놓았다. 저자가 설명하는 과정에서 전자와 후자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19. 프란시스 자신이 직접 쓴 기도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그의 기도문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이 기도문이 프란시스의 삶과 사상과 전혀 모순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104) - ‘평화의 기도’에 대한 각주 설명 부분이다. 흠… 평화의 기도가 성 프란시스가 직접 쓴 기도문이 아니었군!

20.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들을 사용하면서 말들과 씨름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에 자기를 침묵으로 이끄시는 침묵이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나의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처럼 되는 것을 보았다.”(116) -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고 적어놓으며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모두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을까?…

21. 일반적으로 상상력(imagination)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러나 상상과 환상(illusion) 혹은 공상(fantasy)은 분명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이렇게 주장한다. “상상이란 사실과의 별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조명한다.”(124~) - 이 부분은 전에 보았던 개럿 그린의 [하나님 상상하기]에 나오는 설명과 유사하다. 그는 거기(100-102pp)에서 상상력을 1)허구적인 사용과 2)실재적인 사용으로 나누고, 다시 허구적인 사용을 ①환상적인(fantastic) 것과 ②기만적인(deceitful) 것으로 나눈다.

22. ‘신앙상담’이나 ‘영적상담’ 혹은 ‘영적충고’라는 용어로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지도’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용어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그 용어가 일반적으로 풍겨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용어는 상담이라는 말보다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적인 체제종교 안에서 사용되는 엄격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 그러나 영성지도는 결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영성지도자는 수련자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면서 올바른 식별과 판단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수련자가 영성지도자의 권위에 필요 이상 수동적으로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동시에 수련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144~)

23. 존 카시안(360-435)은 아직도 공식적인 고해성사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끊임없는 회개와 양심성찰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유혹들을 수도원의 장상(senior monk)들에게 쏟아 놓을 것을 권고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55) - 고해성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 기원은 꽤 영성적이고 건전하다. 분별력!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24. 필로테우스(Philotheus)는 반복된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흩어진 자아를 모으고 마음의 등불로 인도되며,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와 빛으로 가슴을 채운다고 믿었다. 이 세 시나이 수도자들(존 클리마쿠스, 헤지키우스, 필로테우스)은 예수의 기도를 호흡과 관련을 시킨다.(157) - 저자는 일반적으로 ‘예수 기도’로 알려져 있는 것을 ‘예수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예수의 기도라고 하면 주기도와도 혼동될 수 있고, 원래의 이름에도 소유격이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예수 기도’가 오히려 더 정확하다.

25. 프란시스 역시 다른 영성지도자들처럼 순종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외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의 요구가 아니고, 복음서에 입각한 자유로운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지도자와 수련자 사이는 권위로 묶어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163) -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도원 전통에서 ‘순종’은 이런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요구였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지나치게 엄격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26. 카더린(St. Catherine of Siena)은 영성지도의 유의 사항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 … 둘째, 지도자는 수련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수련자들의 마음 상태와 느낌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 셋째는 모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각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길로 인도받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167) - 꽤 괜찮아 보이는 지침이다.

27.(칼빈)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을 의식하여 개인기도와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귀중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영적 권고나 상담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우리 자신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상호관계적인 영성지도의 필요성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201) - 로마 가톨릭에 대한 지나친 반발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것들까지 다 발로 차버릴 필요는 없다. ‘죄를 서로 고하며’와 같은 성도 상호간의 영성지도는 우리가 물려받아야 하는 좋은 전통이다. 지도자를 찾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도 상호간의 도움도 절실하다. 게리 콜린스의 [훌륭한 상담자]는 이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

28. 종교체험은 주관적인 것만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만도 아닌, 주관과 객관의 혼합이다. 위니캇(D. W. Winnicott)은 주관과 객관의 혼합영역을 ‘인간 삶의 제삼의 영역’인 ‘중간영역’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대상과 신앙체험의 연결고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206) - 주관과 객관 모두!

29. 하나님은 세 가지 종류의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상승하는 단계로서 연속적 영어(successive locution), 형상적 영어(formal locution), 실체적 영어(substantial locution)가 있다.

첫 번째의 연속적 영어란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을 대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이다. 어떤 깨달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명상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 성령님은 그의 개념과 판단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어떤 다른 사람이 그를 돕는 것처럼 매우 분명하고 편안하게 느낀다. … 연속적인 영어란 보통 일상 대화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동안 일어난다. … 이 점에서 바로 영성식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으로 말을 걸어오실지라도 그는 모든 한계성과 선입견, 편견, 오류 등을 지닌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첫 번째의 연속적 영어가 기도하는 동안에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의 형상적 언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을 수반하지만, 후자는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영어를 받는다. 일하고 있든지, 대화를 하고 있든지, 쉬고 있든지, 기도하고 있든지,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영어를 받을 수 있다. … 이 영어는 분명히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온 것이며 … 그것이 하나님일 수도 있고 마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영성식별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실체적 영어이다. 그것은 단순히 실존에 대한 지성적인 표상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을 지닌다. … 실체적인 영어는 단순히 관념적이고 보조적인 깨달은이 아니고 영혼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인 능력이다.(216~) -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에서 말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저자가 그것을 잘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30.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성식별(discretion spiritum)이란 보통 미래의 일어날 일을 인지하고 마음 속의 비밀들을 읽어낼 수 있는 비상한 은사라고 간주했다. 그는 거의 단순한 분별(discretio)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신중한 사려분별(prudence)의 한 부분으로 영성식별을 다루었다. 존 휴츠렐(John Futrell)은 영성식별이란 내적인 경험들 중에서 그 경험들의 기원을 결정하고 어떤 경험들이 빛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걸러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에드워드 오코너(Edward O'Conner)는 영성식별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감들이나 충동들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인가, 혹은 사단으로부터인가 혹은 우리 자신으로부터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220) - 영성식별 또는 영적식별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다.

31. 기도생활이 영적 성장에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식별적인 통찰력이 필연적이다. 식별작업이 없는 기도는 감상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성숙한 영성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기가 어렵다. 통념적인 식별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영성식별에 있어서 구분하고 평가해야 할 대상은 단순한 사고 작용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각에서 비롯되는 느낌과 직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와 직관, 느낌이 적절한 영성식별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시의 말씀이 성서가 식별의 객관적인 규범이 되어야 한다.(222) - 영성식별의 중요성! 분별해야 한다!

32.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해주기를 원하시지만 식별 없이 그 뜻이 명백히 저절로 알려지지는 않는다. 때로 그 목소리는 매우 모호하고 신비적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목소리와 더불어 다른 영의 목소리도 함께 섞여 들려지도록 허락하시는 듯하다. 다른 영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더불어 경쟁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 사단의 목소리 역시 하나님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모호하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온실’로부터 벗어나 ‘시장’이라는 어두움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거기에 하나님을 닮은 경쟁적인 목소리가 많이 나타난다. 길렛(Guillet)은 식별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어려움이란 인간이 삼중적인 어두움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채 명령한다. 둘째, 사단은 자기 자신을 숨긴 채 하나님이 확인한 것 이상을 제시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소리와 사단의 목소리를 혼란케 하는 어두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 자신 안에 드리워진 어두움이다.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는 어두움, 자신의 행동과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진지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어두움이다.(225~) - 식별에 대한 중요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어두움과 식별…

33. 예레미야와 같은 참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과의 투쟁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과 거짓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 첫째, 불행에 대한 예언은 행운에 대한 예언들보다 더 믿을 만하다. … 둘째, 신빙성 있는 예언이란 앞으로 지나가게 될 징조(표지, signs)에 대한 예측으로부터 확인된다. … 셋째, 위의 기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의 신조’에 충실하고 있느냐이다. … 악마도 기적을 통하여 유사한 징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 예언자의 신앙고백이 보편적인 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 넷째, 예언자의 삶의 증언은 교리의 건전성만큼 중요하다. 흠잡을 데 없는 예언자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반면에 거짓 예언자는 그 죄악된 삶에 의해서 그 자신 스스로가 순수한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 다섯째, 예언자의 내적인 성향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예언자의 예언이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백성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려놓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식별한 후에 그 예언의 신빙성을 가늠할 수 있다. … 여섯째,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개인의 경험이 중요한 식별의 기준이다. … 예언자의 예언의 본질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227~230) -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르는 기준들. 중요하다.

34.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동시에 당신의 자녀들이 영원히 미성숙한 채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의 의지를 강제로 강압하시지는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그 목소리를 판단하고 식별하기를 원하신다. …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시계 제작자이거나 꼭두가 아니라 성숙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라는 의미에서 식별적인 삶은 필연적이다. … 영성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매우 다양하고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이 완전하게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231) - 식별의 필요성, 식별의 근거, 식별의 가능성…

35.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과 자신의 야망적인 성향이 동시에 섞여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충실한 식별적인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235)

36. 복음서에서 가장 탁월한 식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수태에고에서 보여준 마리아의 반응이다(눅 1:26-38).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소리를 듣고 ‘놀랐고,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여기서 ‘놀랐다’는 헬라어 원어 디에타락스네(διεταραχθνη)는 ‘혼돈하고 당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하였다’라는 말의 원어 디에로기제토(διελογθζετο)라는 말은 그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셈을 하려고 했다는 의미이다.(236) - 수태고지 기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37. 성서는 이렇게 곳곳에서 영의 식별의 필요성이나 대략의 원칙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명백한 규범이나 공식같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서로부터 받은 어떤 원칙과 더불어 성령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 은사를 통해서 식별의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요한일서 4:1은 ‘영의 식별’의 신중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는 말씀에서 ‘시험하라’는 헬라어의 도키마제인(δοκιμαζειν)은 ‘시험하다’라는 의미 외에 ‘인정하다, 익히다,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들을 분별한다는 의미로 쓰여진 용어로서 디아크리시스(διακρισις, 고전 12:10)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의 의미 역시 ‘구분하기, 나누기, 판단하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실 영의 식별은 매우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문제이기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영성식별에 대해서 매우 낙관적이다.(238~) - 정말로 낙관적일까?…

38. 영성식별에서 가장 적합한 환경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내면적인 임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방식에 적응할 준비를 시켜준다. 영성식별에는 이중적인 과정이 요구된다.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환경에 대한 감성적인 경험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해석하느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선택적인 일에 대하여 어떻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느냐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선택과 식별에 동원되는 핵심적인 두 요소는 감성(affectivity)적 경험과 이성(reason)적 판단이다.

인간이 감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할 때 느낌이나 충동 등이 하나님 체험을 식별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나 추리적 과정 또한 하나님의 경험을 식별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별개의 작용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만약 감성적인 경험을 억누르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느낌과 충동 등의 감성적인 요소에만 의존한다면 주관적인 열정주의에 사로잡혀 냉철한 식별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식별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구호는 “당신의 머리를 사용하고 당신의 느낌들을 신뢰하라”는 말이다.(242) - 감성과 이성의 쌍두마차... 이하는 로욜라의 기준들이다.

39. 포티체의 디아도쿠스는 … ‘두 가지 위로’를 제시하고 있다. 성령이 주는 위로와 사탄이 주는 위로이다. 전자는 그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자마자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에 헌신하도록 초대를 하고, 후자는 영혼을 환상의 바람으로 뒤흔드는 것과 같은 위로이며, 위로의 체험 속에서 얻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지성으로부터 감추게 하려고 노력한다.(252)

40. 여러 영들의 움직임들은 스폰지나 돌 위에 떨어지는 물과 같다. 이 영혼의 성향이 영들의 성향과 정반대의 상태라면 물이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소란하고 요란하다. 그 성향이 비슷하다면 물이 스폰지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하다.(253~)

41. 상상력을 사용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 1) 상상력을 조절하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2)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가지거나 상상력의 힘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조절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3) 너무 많은 잡념이 초점을 맞추는데 방해를 하고 있다. 말씀과 더불어 상상력을 사용할 때 잡념을 억누르지 말고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두라. 4) ‘상상한다’는 의미는 그림을 그리듯이 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영상을 영화 제작자처럼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데 문제가 있거나, 예수님이 역사 속에 현존했던 실존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상태이다.(268)

42. ‘영성적 위안’이나 ‘영성적 고독’이란 기도 중에 경험되는 감성적인 경험을 말한다. 이때 ‘영성적 위안’이란 유쾌한 느낌이나 편안한 느낌을 말하고, ‘영성적 고독’이란 불유쾌하고 불안한 느낌을 말한다고 단순화시킬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말하는 위안과 고독이란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순간에 경험되는 기분이나 느낌이 영성적 위안인지 영성적 고독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느낌 자체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느낌이 일어난 전후 사정을 잘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 느낌들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나는지 혹은 이기적 자아에로 점점 더 집착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심리적인 느낌이 불유쾌하더라도 그 결과가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나면 이는 ‘영성적 위안’이 될 수 있고, 반대로 기도 중에 감성적인 경험이 유쾌하고 편안한 느낌이라 하더라도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게 되면 ‘영성적 고독’이라 할 수 있다.

영성적 고독이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대해서 저항할 때 일어나는 경험이다. 한편으로 그 저항은 의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저항에 대해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저항일 수도 있다. …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영성적 위안은 따르고, 영성적 고독은 대항하라.”(319, 322, 324) -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괜찮은 개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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