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강화 창비교양문고 10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199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글쓰기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전반적’으로 잘 다루어주고 있다. 어렵지 않게, 그러면서도 실제적이고 친절하게 잘 다루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설명과 함께 제시되는 적절한 예문은 설명을 더욱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많은 이들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던 말이 ‘정말 그렇구나!’ 싶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뿐 아니라, 나와 같이 목사로서 ‘설교문’을 작성해야 하는 이들에게도 꼭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글은 곧 말이다.”(12) - 글쓰기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다. ‘말이 곧 글’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글 쓰는 일에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듯...

2. “명필 완당 김정희는 ‘난초를 그림에 법이 있어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또한 안 된다’;라 하였다. 문장에도 마찬가지이다.”(16) - 매우 절묘하면서도 적절한 원칙이라고 생각된다. 법이 있어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

3. “활판술이 유치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히 한 사람이 읽되 소리를 내어 읽어 여러 사람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자니 문장이 먼저 낭독조로 써지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문장 곧 말’만이 아니라 음악적인 일면이 더 한 가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용은 아무리 진실한 문장이라도 소리 내어 읽기에 거북하거나 멋이 없는 문장은 널리 읽히지 못하였을 것이니, 쓰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문장에 난조투어(亂調套語)를 대구체로 많이 넣어 노래조가 나오든, 연설조가 나오든, 아무튼 낭독자의 목청에 흥이 나도록 하기에 주의하였을 것이다.”(20) - 옛 글들이 ‘읽기’보다는 ‘듣기’ 위주였다는 것을 찬찬히,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성경을 보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구전(口傳)’과 또한 ‘소리 내어 읽기’라는 점이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

4. “이제부터의 문장작법은 글을 죽이더라도 먼저 말을 살려, 감정을 살려놓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22) - 문어체 보다는 구어체가 좋다는 지적인 듯... 가능하면 글을 말하듯 쓴다면, 읽거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쉽지 않을까... 지나친 문어체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현학적인 표현은 사양해야 할 것.

5. “그 단어가 들지 않고는 자연스럽고 적확(的確)한 표현이 불가능할 경우엔 그 말들은 이미 여깃말로 여겨 안심하고 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신어의 남용으로, 넉넉히 표현할 수 있는 말에까지 버릇처럼 외국어를 꺼낼 필요는 없다.”(28) - 외국어나 새로 들어온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적확성’이다. 우리말로 써도 충분한 것을 구태여 한문이나 영어, 그 외의 언어들로 쓰는 것은 글을 쓰는 바른 자세는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 우리말로는 그 적확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에만 외국어를 사용할 것!

6. “어느 언어든 표현 가능성의 일면과 아울러 표현 불가능성의 일면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이 표현 불가능성은 언어마다 불일(不一)해서 완전한 번역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사실쯤은 알아야 하겠다.”(29)

7. “더구나 우리 문화의 저류(底流)에는 우리의 사유와 감정에는 아직도 한문학의 난류(暖流)와 혈맥(血脈)이 통하여 있느니만치 우리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통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도저히 한문학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자문화(自文化)의 수립 선양(宣揚)을 위하는 나머지 성급하게 한문학을 거부함이 무모한 태도임을 안다. 하물며 이 전통적인 저류를 모르고 극히 피상적인 서문학(西文學)에만 심취하여 한문학을 경시하는 태도는 성급과 천려(淺慮)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67) - 예문으로 제시하고 있는 양주동 선생의 글 가운에 한 부분이다. 예문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 한문이 이왕 우리 문화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한은 한문을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외국어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한문체 표현을 쓰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할 것이다.

8.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플로베르).”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 찾는 곤란을 피하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대용(代用)함으로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추어 버린다든지,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 된다(모빠상).” (75, 76) - 유일어(唯一語)를 찾으라는 설명 가운데 나오는 문장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A. W. Tozer의 지론과 상통한다. 정확한 표현,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말을 많이 알아야 할 것.”(78) 그리고 그와 함께 제시되는 글 쓰는 이의 양심의 문제! “정도 문제지만 남의 발견을 써선 안 된다. 문장에 있어서야말로 특허권 도덕을 지켜야 한다.”(81) 남이 고심해서 발견한 ‘단어, 표현, 문장’을 제 것인 양 표절하지 말 것!

9. “문장은 대체로 음향을 주로 하는 것과 뜻을 주로 하는 것으로 갈리게 된다.” “운문은 리듬이 주(主)요 뜻이 종(從)이다.” “운문은 노래하듯 쓰는 것이라면 산문은 말하듯 쓰는 편이다.”(84, 86, 88) - 운문과 산문의 차이에 대한 설명.

10. “감정을 상하지 않게 쓸 것, 마주 대해서 말로 할 때는 얼굴의 표정이 있어 말은 비록 날카롭더라도 표정으로 중화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글에는 표정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 이쪽에선 심한 말이 아닐 줄로 쓴 것도 저편에선 오해하는 수가 있다. 그러기에 중대한 일에는 편지로 하지 말고 만나러 가는 것이 그런 때문이다.”(110) - 편지글에 대한 친절한 설명!! 실제로 그렇다. 편지나 이메일의 경우에도, 심지어는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도 ‘표정’이 없이 글만 오가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많다. 글로 의사소통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부분!!!

11. “누가에게나 있는 것이니 글로 쓰기까지 할 감상이면 평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발하고, 참신해서 읽는 사람이 무엇으로나 놀랍고, 무엇으로나 새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떤 대상이고 무심히 보거나 쉽사리 생각해선 안 된다. 감각과 사고가 예민해서 어떤 대상 어떤 사태에나 투시하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감상은 발견의 노력이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육안(肉眼) 이상으로 정관(靜觀), 응시(凝視), 명상(瞑想)하지 않으면 안 된다.”(113) - 감상문에 대한 설명. 참으로 이치에 딱딱 맞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12. “대상에겐 냉정하면서도 독자에겐 친절해야 할 것. 자기의 기사가 명쾌히 읽히도록 할 것이다. 같은 토를 중복해서 어수선스럽게 하지 말 것이요, 기사가 좀 길어질 듯한 것이면 첫머리엔 대체 윤곽만 쓰고 다음에 자세히 써야 바쁜 사람은 윤곽만 알고 고만두고, 더 잘 알고 싶은 사람만 아래까지 보게 하는 것도 훌륭한 친절일 것이다.”(128) - 기사문 작성 요령이다. ‘읽는 이에 대한 친절’은 글 쓰는 이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이왕 읽히려는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면 읽는 이들에게 친절하라!!

13. “글은 사상인 것이나, 감정인 것이나 자기 마음속엣 것을 꺼내어 남에게 전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원만히 전달하였으면 목적을 성취한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글은 심중엣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에 아주 이상적인 도구냐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188) - 글을 쓰는 목적을 잊지 말 것! 그와 함께 ‘글’이 가지는 한계도 기억할 것! 그래서 ‘퇴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14. “명문이나 명화치고 일필휘지(一筆揮之)해서 되는 것은 자고로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고칠수록 좋아지는 것은 문장의 진리다. 이 진리를 버리거나 숨기는 것은 어리석다.” “백번이라도 고치되 끝까지 구기지 말고 지녀나가야 할 것은 이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신선’이다.” “앉은자리에서 자꾸 고치지 말 것, 글은 실처럼 급할수록 옥친다. 피곤해지는 머리로는 ‘신선’을 살려나가지 못한다. 여러 날 만에, 남의 글처럼 낯설어진 때에 고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189, 191, 198, 199) - 퇴고에 있어서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말씀’(!)이다! 운문은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李泰俊)이라 하더니 정말로 그렇다! 비록 오래 되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한 이처럼 똑 부러지고, 마음에 와 닿는 안내서는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이 ‘퇴고’를 멀리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15.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관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문장에 있어선 미덕이 된다.”(197) - 신경질과 미덕... 글 쓰는 이에게는 이 정도의 신경질, 예민함은 있어야... 글 읽는 이가 편히 읽을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

16. “화가 고호는, 화포(畵布) 위에 ‘무엇’이 깃들기 전에는 채필(彩筆)을 들지 않는다 하였다. 종이 위에 쓰려는 것이 확실히 깃들기 전에는 붓을 들지 말 것이다. 쓰려는 요령만 눈에 보인다고 덥석 쓰기 시작하면 중요한 부분이 첫 몇 줄에서 다 없어져버린다. 용두사미가 된다. 능히 문제(文題)부터 써놓을 수 있도록 글의 전경(全景)을 빈 종이 위에 느끼고 그리고 첫머리를 찾을 것이다. 마음속에 그 글의 전경을 느끼기 전에 붓을 들면 머리가 안 나오고 중간부터 불거지기 쉽다.”(204) - 실제적인 가이드!

17. “글은 들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고, 이 세 가지를 한다. 들려주는 것은 운문의 일이요 알려주고 보여주고 하는 것이 산문의 일인데 알리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은 몇 배의 구체적인 전달이다.”(213)

18. “묘사의 요점으로는 ①객관적일 것. 언제든지 냉정한 관찰을 거쳐야 할 것이니까, ②정연할 것. 시간상으로, 공간상으로 순서가 있어야 전폭(全幅)의 인상이 선명해질 것이니까, ③사진기와는 달라야 할 것. 대상의 요점과 특색을 가려 거두는 반면에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한다.”(214)

19. “개념으로나 지식으로만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눈이 희다거나 불이 뜨겁다는 개념, 지식은 다 내어버려도 좋다. 눈이 한 벌판 가득이 덮였으니 보기에 어떠한가. 흴 것은 무론이다. 눈이 희다 검다가 문제가 아니다. 흰 눈이 그렇게 온 벌판을 덮어놓았으니 보기에 어떠하냐, 어떠한 정서가 일어나느냐 즉 눈 덮인 벌판에 대한 감각이 어떠하냐, 그 감각되는 바를 적을 것이다.”(220)

20. “뜻은 번역할 수 있되. 성향미, 성향적인 표현 효과는 세계 어느 말을 가져와도 도저히 번역해놓지 못할 것들이다. 표현이란 뜻만으로 전부는 아니다. 언어와 문자로 뜻만을 전달시키는 것은 언어와 문자의 선이용법(善利用法)이 아니다. 언어마다 문자마다 의(意) 이외에 감정과 체격과 신원이 있다. 뜻 이외에 그 언어, 문자가 발산하는 체취, 분위기, 그것을 선이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25) - 한글이 가지는 특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언어와 문자만이 가지는 특징을 살려서 글을 쓰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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