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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용기 - 나를 지키는 현명한 선택
와다 히데키 지음, 심지애 옮김 / 한가한오후 / 2025년 5월
평점 :
몇 년 전에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몇 년 동안 엄마는 우리 집에 계셨고 언니와 내가 간병을 했다. 나는 원체 건강이 안 좋아서 간병하는 동안 지병이 심해졌고 마음까지 병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간병을 잘 했다면 엄마가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계속 우울증과 무기력 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서서히 좋아지고 있는 시기라 이렇게 내 스스로 우울증이란 단어도 사용하지만, 처음에는 내가 우울증일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나는 낙천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엄마의 간병과 여러가지 원인이 쌓여서 마음의 병이 된 것 같았다.
그동안 무기력과 우울증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리고 내 마음 상태에 대해 스스로 알기 위해서 계속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일본 정신 건강 의학과 전문의인 와다 히데키의 신간 <도망칠 용기>를 이웃 분의 도서 블로그에서 보게 되었는데 제목을 보고 꼭 읽고 싶었다.
특히 목차 [제3장. 도망치는 기술] 에 보면 '그 자리에 머무르며 도망치는 방법'이 7가지나 나온다.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 방법이 뭘까.
이제 한계야,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정신건강 전문의로서 오랜 기간 이렇게 말해 왔다고 한다. "도망가세요. 그래야 삽니다."
부모님, 회사, 상사, 친구, 배우자, 병간호, 지병, 지금 하고 있는 일 등등.. 여러가지 각자의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를, 내 의식 속의 또 하나의 자아가 도망치면 안 된다고 억누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살아가면서 생긴 자기만의 규칙, 가치관, 도덕관 등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기도 하지만, 버티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 '도망'가는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망'이라는 말 자체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도 흔히 나오는 "쫄았냐? 도망가냐?" 라는 대사만 봐도 '도망친다'는 말에는 비겁함, 겁쟁이, 근성 부족, 유리 멘탈, 책임 회피 등등 부정적이고 당당하지 못한 무책임한 느낌이 든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는 게 승자"라고.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살아있어야 책임을 지든지, 다시 싸우든 뭐든 할 수 있다.
'후퇴'는 어떤 나라에선 쓸데없는 승부에서 굳이 맞서지 않고 피하는 것으로, 용기 있는 위대한 선택이라고 평가받는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걸 무시하면서 '난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하고 지금의 상태를 외면하면 결국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병이 찾아오고 결국 '나'라는 배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만다.
도망치는 것은 {긍정적인 선택이며, 위험을 피하는 행위}이다. 저자는 전문의로서 강력하게 도망치라고 권고한다.
도망치는 것이란 ㅡ
1. 내게 맞는 환경으로 옮겨가는 것
2. 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3. 내 몸을 싫은 상대로부터 보호하는 것
4. 싫은 상대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
5.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상대와 거리를 두는 것
6. 전략을 다시 짜기 위해 용기를 내어 한발 물러서는 것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나는 지금 전략을 다시 짜기 위해 한발 물러서 있는 중이야. 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는 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조금 덜 괴로웠을 것 같다.
지금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도망친다는 게 말이 쉽지, 직장이나 가정을 그렇게 쉽게 팽개치고 도망칠 수 있는 환경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봤음 좋겠다. 저자가 소개하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도 도망칠 수 있는 방법들도 있으니.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지만, 그저 그것만이 아닌 도망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미래를 바꾸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고 이 책은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