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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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도서 제공]

오래전에 귀금속 매장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이 금반지 같은 걸 팔러 오는데 그중에 가끔 도둑이 훔친 귀금속을 팔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 손님이 오전에 금목걸이를 팔고 갔는데, 얼마 안 되어 갑자기 경찰이 찾아왔다. 그 남자가 도둑이었고 훔친 목걸이를 팔고 간 것이었다.

경찰은 매니저와 나에게 남자 인상착의를 물었고 우리는 상황을 자세히 말해줬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매니저와 나의 말이 달랐다.

나는 그 남자가 분명히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은 걸로 기억하는데, 매니저의 기억은 달랐다. 내가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남자를 내가 응대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결과는 매니저와 나의 진술이 둘 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 남자의 의상은 전혀 다른 색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매니저는 평소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는데도. 나는 그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고, 그 이후로 나는 내 기억 자체를 잘 믿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그날 내 뇌리에 왜 하늘색 와이셔츠가 각인돼 있었는지 정말 의문이다. 그날 나는 남자를 응대하면서 한참 동안 바로 앞에서 봤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내용을 쓰기 위해 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내가 떠올린 이 기억 또한 전부 정확한 사실일까?

그런데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살인을 했다고 자백한 용의자의 기억이 완전히 틀린 기억이라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살인에 대한 기억이 뇌에서 떠올랐다면?

이런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다. 1906년에 시카고에서 한 여자가 강도 살인을 당했는데 그 시신을 발견한 백인 남성이 용의자로 몰렸다.

그는 아무런 폭력 전과도, 그가 범인이라는 아무 증거도 없었고 본인 역시 범행을 부인했지만 그는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서 한참 동안 심문을 받았다.

경찰에게 심문당하는 동안 계속해서 '살인 과정을 기억해 보라고,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 그는 두 번이나 범행을 자백했지만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가 범인일 수 없는 이유와 신빙성 있는 알리바이를 내놓았고, 재판에서 검사조차 그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여러 저명한 심리학자가 그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이븐스의 자백은 그의 머릿속에 주입된 암시의 비자발적인 합성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신경증에 걸린 사람이 가공의 기억을 만드는 경계선 영역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 인간 기억의 부정확성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하던 후고 뮌스터베르크의 편지 중에서. (그는 아이븐스의 무고를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자백을 철회하고 무죄를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에 의해 결국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점은, 자백을 철회하고 범행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는 범죄를 자백했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진술을 한 기억이 없고, 그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 나는 죽이지 않았다. (...) 하지만 경찰서에 있는 동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 무죄를 주장한 용의자 아이븐스의 말. 차란 란가나스 저 <기억한다는 착각> 중에서.

무고한 사람이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을 자백해 범인으로 몰리고 사형을 당한다니..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례가 이 사건 하나뿐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로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 기억을 갖고 있을까?

<기억한다는 착각>의 저자 차란 란가나스가 이것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재생과 녹화를 동시에 누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무슨 말일까?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기억을 더듬을 때, 재생만이 아니라 녹화까지 누른다는 것이다. 떠올릴 때 부정확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 그대로 녹화된 채 다음번에 다시 기억을 더듬을 때 녹화됐던 그 부정확한 기억을 재생한다.

"우리 기억은 돌에 단단히 새겨진 것이 아니라서, 우리가 방금 배우거나 경험한 것을 반영해 갱신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 기억 갱신의 촉매는 바로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 자체다."

즉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한번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 속에는 바로 지난번 그 기억을 떠올렸을 때의 잔여물이 가득 퍼져 있고, 이런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다.

친구들과 여럿이 동시에 경험한 일을 함께 되짚어볼 때 기억이 일치하지 않고 모두 제각각이었던 경험이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내가 알바했던 매장에서 매니저와 나의 기억이 전혀 달랐던 것처럼.

머릿속으로 과거를 다시 더듬어볼 때마다 현재의 정보가 함께 따라가서 기억의 내용을 미묘하게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위 사건의 사례처럼 아주 엄청나게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위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는 동안 엉뚱하게도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위안이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할까.

내가 기억하는 온갖 과거의 안 좋았던 사건들, 장면들, 대화들을 나의 뇌가 살짝 각색했을 가능성.. 온전히 완벽한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내 기억만큼 나쁜 일이, 안 좋은 대화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

이런 책이나 내용을 접할 때마다 인체의 신비 또한 느끼지만, 나 자신을 점점 믿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기록을 더욱더 생활화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내 기억은 계속해서 재생+녹화=갱신되기에.

차란 란가나스의 <기억한다는 착각>. 과학서를 자주 읽진 않다 보니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매 장마다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넘쳐난다.

과학서를 처음 본다면 에세이처럼 쭉쭉 읽히지는 않겠지만 차분히 읽다 보면 흥미로운 내용에 점점 몰입될 것이다. 기억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 궁금해했던 점들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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