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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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P15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 P25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망쳤어.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핑글 돌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지. 정말은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도망친 걸지도 모르고. - P62

나는 가끔 건우 선배가 반자본주의 요정 비슷한 게 아닐까 의심하는데, 건우 선배 같은 타입들이 부잣집에 태어나 집안의 재산을 조금씩 사회로 돌려보내며 축적의 고도화를 막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례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 P76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 거야." - P83

21세기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다 데이터가 될 거란 생각도 했다. - P139

이재에겐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흉내 낼 수 없이 탁월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 그런 사람을 놓치고 모든 걸 망쳐버리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밤마다의 생각은 이재보다 이재의 남편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친구라서 너무 후하게 생각하는 걸까?" - P209

어쩌면 다들 이재보다도 이재가 이끌고 다니는 공기 같은 것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심장이 약간 느리게 뛰게 되는 감미로운 공간 장악 능력 같은 것 말이다. 이재의 반경에선 모든 모서리와 테두리가 달라졌다. 둘러싼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떨어뜨리는 희한한 아이였다. 아영은 이재를 좋아했고, 이재와 함께 있는 자신을 좋아했다. 질투하진 않았다. 경윤을 질투하기 전에, 이재의 대학 친구들과 직장 친구들을 질투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 P211

스무살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나를 가장 완벽히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이해를 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유로웠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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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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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열망은 없었다. 영화감독을 꿈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땐 그냥 모든 게 성에 안 찼고 내가 살고 싶은 이유가 뭔지 찾고 싶었다. 적어도 ‘최선을 다해 찾아봤는데도 모르겠더라‘라는 답이라도 얻으면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 P116

실패를 해야 그만둘 명분이 있는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패배감을 가질 일이 다반사라서, 어디서부터가 실패인지도 본인이 정해야 한다.
어렵게 입봉하면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쓸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변함없는 생활고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선배 영화감독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불행한 자살만은 아니길 바랐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더 이상 만들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일만은 아니기를. 8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늘 긴장하고 있다. 내가 좇고 있는 목표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면 빨리 그만두겠다, 수시로 다짐한다. - P117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 악담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누군가의 글을 보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생이 있었는지를 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악담해도 된다. 그리고 나도 악담할 것이다. 물론 악담을 받으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그래서 나는 일단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 진짜 모든 악담을 일일이 찾아 읽고, 악담을 쓴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서 내가 그 악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기 위해 그의 앞뒤 글까지 다 찾아 읽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난 세 달 동안 여기저기 해외를 다니느라 오랜 시간 검색을 쉬었더니 흐름이 끊겼다. 이젠 살도 많이 쪘고 열정도 다했다. 누가 악담을 하든 말든.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든 말든. 행사인지 파티인지 아무튼, 나는 괴롭다.
괴롭다. 정말 괴롭다. - P145

엄마는 자기 전에 ‘편안히 잘 자라‘라는 문자를 지금도 자주 보낸다.
어둡고 긴 터널을 외롭게 지나던 시절이 있었다.
약도 안 듣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혼자 견뎠다.
입은 꼭 다문 채 점점 마르고 새까맣게 변해가는 나를 본 뒤로 엄마는 매일 밤 "편안히 잘 자라" 문자를 보내주었다.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저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 P211

자리가 어색하니 다들 입맛이 없었나 고기가 많이 남자 필수는 영어로 "도축한 고기는 남기면 안 돼. 먹기 위해 동물을 죽였기 때문이야" 하더니 책임감을 갖고 남은 고기를 전부 해치웠다. 너무 큰 사람이 너무 많이 먹는 그 모습이 엄마는 그렇게 불쌍하고 마음 아팠단다. - P236

시나리오를 쓰면서 경계하는 점.
나를 무고하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습관.
어려운 장애물을 대충 피하고 싶은 습관.
인물을 통해 남 탓하고 싶은 습관.
2018.06.15.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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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넷페미史 - 우리에게도 빛과 그늘의 역사가 있다
권김현영 외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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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중의 지지는 언제 흩어질지 모릅니다. 대중의 지지를 추구하다 보면 도리어 그 지지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판을 기획하는 이들이 재미있어하면 대중들은 그걸 눈치채고 따라올 거예요. 영 페미니스트로서 되돌아보면 그때의 경험은 남들이 뭐라든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오히려 유희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돈이나 조직, 지속 가능성이 따라올 수도 있어요. 안 따라와도 어쩔 수 없지만요. (웃음) 최근 들어 텀블벅 등을 활용해서 활동 가능한 기본적인 경제적 조건이 마련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자마자 지속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그런 걸 고민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런 그들에게 입금을 합시다. (웃음) - P72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새로운 여성들은 모두 기존 질서의 효용을 다한 순간 등장합니다. 즉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등장하는 거예요. 신여성이 등장한 이후 세계대전이 벌어집니다. 영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한 이후 한국에서는 IMF가 터졌습니다. 이 여성들이 등장하면 세상이, 한국이 망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성들은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망했을 때 등장할 수 있거든요. 기존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집단이 등장한다는 건, 그만큼 기존 질서의 힘이 약해졌고 기존 질서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 P77

이 조짐을 읽어야 해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뉴 페미니스트가 등장한 이상 우리는 10년 이내에 망할 겁니다. (웃음)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에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망조의 조짐을 읽고서 이 시간을 세상을 바꿔보는 기회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여성들의 등장을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징후로 읽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기존 질서의 효용은 다했고, 우리는 망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 P77

사실 2005년을 기점으로 10여 년간 페미니즘은 대중운동으로서 말 걸기에 실패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2015년을 기점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그전의 페미니즘과 단절되어 뿌리 없이 등장했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지만 저는 광대한 네트에서 기억의 조각으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들이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영 페미니스트들은 실제로 트위터리안의 얼굴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도 했고요. 그건 제가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스트들과 네트워킹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기도 해요. - P126

그렇게 페미니즘이 힘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도 회자되었습니다. 이때의 돈은 끝없는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보주의적 자본이라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치이자 영향력으로서의 ‘파워‘와 동의어라고 봐요. - P130

"페미니즘에는 ‘휴덕‘은 있되 ‘탈덕‘은 없다." 페미니즘의 이름이 산화되어서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언어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든 지금처럼 되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이 망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거지요. - P132

월경은 여성의 삶을 조건 짓는 기본적인 현상인데, 국민안전처는 여성을 보편 시민으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서 국가기관이 생각하는 ‘활용도‘의 기준이 어떤 젠더인지도 분명하게 엿볼 수 있었지요. 국가는 여성의 삶에 무관심한 반면에 생리대 시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자본만이 월경에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게 생리대는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그러니 온갖 다양한 종류의 생리대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현실이 펼쳐집니다. 물론 생리대의 다양성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국가가 발기한 분야에 자본이 들어와 돈벌이를 하고 여성은 호구가 된 문제를 지적하는 거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한국은 생리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입니다. - P140

한 가지만 더 첨언하자면,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저는 세상을 바꾸려면 부수고 싶은 상뿐만 아니라 만들고 싶은 미래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부정적인 사례가 바로 ‘흙수저‘라는 말이에요. 여기에는 금수저에 대한 증오는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상이 없거든요. ‘개저씨‘나 ‘아재‘ 같은 말에는 어쨌든 이런 사람이 되지 말자는 내용이 내재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선 후자가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단어인 셈이지요. 물론 미래상이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되진 않겠지만요.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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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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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페미니즘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혹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려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 P13

프리켓은 이제부터 강간 이야기를 할 때 아예 프레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부터 강간 문화가 아니라 ‘성기를 소유하고 휘두르는 남자들이 느끼는 비이성적인 자신감‘인 ‘성기문화‘라고 불러 보자는 것이다. - P38

탁월한 여성 작가들이 많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더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출간해야 한다. 여성들이 당신의 출판사나 언론에 글을 잘 기고하거나 발표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묻고 혹 불편하더라도 답을 구하려고 애써라. 여성 작가들에게 더 손을 뻗어라. 그 여성이 당신의 청탁이나 부응에 응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성들을 찾아라. 계속 그렇게 하라. 남성 작가들의 책과 여성 작가들의 책이 같은 비율로 리뷰를 받는지 확인하라. 재능 있는 여성들을 수상 후보에 올려라. 당신의 분노를 잘 처리하라. 편견을 잘 다루어라. 젠더 문제를 무시하려 드는 이들에게 저항하라. 노력하고 노력하고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우리가 더 이상 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노력하라. - P49

남성 독자층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탁월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만약 남성과 기득권이 탁월함을 인정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면(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 과실을 떠안지 말고 그 기준을 떠나보내야 한다. 남성 독자층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 P52

책의 선택 기준이 그렇게 편협하고 깊이가 없다면 그 사람이 무지한 것뿐이다. 우리 여성 작가들이 어떤 종류의 책을 쓰건, 우리 책이 어떤 식으로 마케팅이 되건 그런 독자들의 무지까지 뜯어 고쳐줄 수는 없다. - P53

책 읽기가 내 첫사랑이었고 앞으로도 나의 영원한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책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싸우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걱정하느라 독서의 순수한 기쁨을 잃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P54

작가는 독자들이 껍질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게 만들어 줄 수가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 P75

나는 안전한 세상을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나는 용감하지 않지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될지는 안다. 나는 앞으로도 모든 걸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 안에도 자유가 있다. 그 자유 덕분에 나는 두려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할 것이다. 나는 과거에 철저하게 무너졌었으나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할 수는 있다. 가끔은 나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야.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인고의 시간들은 내 글에서 울림이 된다. 나는 ‘꿋꿋하게 견디기‘라는 주제에 어쩌면 심할 정도로 매혹된다. 삶이란 산다기보다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 P75

작가 리본이 이 캐릭터에게 부여한 인간적인 단점들을 끝까지 끌고갔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세상의 기준에 영합하지 않은 작가는 스미지가 죽어 간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의 순간을 갖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우리에게 스미지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더 문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 - P91

우리가 몸에 집착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이 몸이 인생을 헤쳐 간다. 몸은 고통과 쾌락을 가져온다. 우리를 보좌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기도 한다. 몸이 우리를 배신하기도 하고 우리의 몸이 다른 이들에게 배신당하기도 한다. (...) 나는 자기의 몸과 자기 자신을 아주 약간이라도 싫어하지 않는 여성을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 P103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 P130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이룬 성공을 축하하고 특권도 인정한다. 다만 이쯤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잊지 않고 싶을 뿐이다. 여전히 권리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여성들을 모른 척하고 지금 갖고 있는 것에 위안을 찾고 싶지 않을 뿐이다. - P136

우리는 그저 어떤 소재를 똑바로 쓰고 재미있게 쓰고 웃기게 쓰는 데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P143

여성들은 이전에도 피임이나 낙태 제한에 반대하기 위해 지하 조직을 만들었으나 이제 다시 한 번 그 지하 조직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정치가들이 이렇게 여성을 무시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여성의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 P209

여성이 어떤 식으로건 "나는 남자랑 하고 싶어서 피임약 먹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 여성이 피임약을 이용하는 이유가 피임약이 원래 발명된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니 설명하라고 요구하다니 이보다 더 퇴행적인 일도 없다. 피임약은 임신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P217

"전 세계에서 오로지 미국에서만 사망한 흑인 청년이 자기 살인 사건에 피고로 설 것이다." - P251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 P262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지 않고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그 특권을 더 큰 사회적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 P284

어떤 이십 대 초반의 흑인 청년들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 안 되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 P343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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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마음 - 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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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열심히 해봐야 아이고 소용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잘하고 싶다(열심히와는 다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반가워진다.

네, 저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더 큰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는 좀 다른데, 두려운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편안하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P10

한때는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한다고 착각했고,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도 무의미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일의 바깥에 내 좌표를 놓고 나서야, 그 일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을 만큼의 의미와 무게로, 어떤 과장이나 비하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주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으며, 어떤 구석은 재미있고 좋으며, 어떤 구석은 짜증스럽고 부끄럽기도 한 그런 일로. - P28

‘경험이 적은 여성‘ 컨설턴트였던 나에게 ‘제 선생‘이라는 호칭과 함께 날아온 그 질문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격려나 칭찬보다도 임파워링empowering한 것이기도 했다(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나에게 이 질문은 ‘네게 이 질문에 답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는 메시지였다). - P32

내 이야기에 대한 편집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을 위한 배려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필요하다. "차별받은 적 없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내가 겪은 차별뿐 아니라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는 차별까지 지워버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 P36

성장은 과정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이고, 잘 수행된 과정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정의하는 결과를 담보하지는 못해도 성장만을 가져다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행의 과정에 지적으로 집중하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서 나아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거기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 P41

과거에는 그럴 법했던 이야기가 더는 통하지 않는 그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왕이면 더 좋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계속 고쳐 쓸 수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P84

줄어든 선택지에도, 그 선택지 앞에서 단기적 최적화를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것에도 구조적 압력이 작동한다. 어쩌면 그 선택들이 지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선택들과 선택의 결과들을 서사화하는 방식만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온전한 선택이며, 그게 곧 삶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과거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개인의 상상력을 결정짓는다. - P87

사적인서점이라는 현재는 정지혜 님이 자신을 ‘북 디렉터‘라고 칭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임대료 얼마인 공간에서라면 한 달에 몇 권은 팔아야 먹고살 수 있다는 불가피한 셈법과 책을 향한 자신의 셈 없는 애호를 타협시킬 방법을 찾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P92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건 곧 자기 자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굳이 ‘기특‘이나 ‘불쌍‘ 같은 우회로를 선택할 이유는 없지요. - P98

나는 애호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겹겹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그리고 나의 그 우주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 P107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시간을 셀프착취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크건 작건 스스로 목표를 정하면, 고용주와 나 사이의 제로섬 게임 바깥에 내 일의 또 다른 층위가 생겨난다.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은 고용주에게 필요 이상의 노동력을 갖다 바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삶에서 개인적 충만함을 위한 기울기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가파른 기울기의 짜릿함을 맛본 사람은 다른 경험에 직면해서도 그런 기울기를 추구한다. 가파른 기울기는 즐거움의 총량을 늘린다. 즐거움은 탁월함의 다른 이름이다. 무엇이 즐거운지는 나만이 정할 수 있고, 탁월함 또한 그렇다. - P173

일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대상인데, 일을 잘하는 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것과 별개의 문제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당장 눈앞의 사람을 친구로 만들려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잘한다는 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그냥 무던한 사람, 좋은 친구가 아니라 정확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 P186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을 만인의 만인을 향한 아레나로 보느냐, 혹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커다란 학교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성장하거나, 성장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더 장기적인 계획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내가 넘어질 때 당신이 기다려주고, 당신이 넘어질 때 내가 기다려주겠다는, 장기적인 신뢰와 환대를 주고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학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 P222

나에게 ‘책임‘은 나를 앞으로 나가게 밀어붙여주는, 너무 달콤하고도 강력한 기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일으킨 동기가 사그라질 때, 나를 끝까지 길 위에서 버티게 해줄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힘 중 가장 좋은 것이 내게는 책임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깨우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자발적 동기는 믿지 못하지만 나의 책임감은 믿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기 위해 책임을 맡는 방식을 취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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