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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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야말로 성장한 엄마의 친구들이 엄마만큼이나 결연한 얼굴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너를 위해 예쁜 옷을 입었어, 그런 느낌인 걸까. 볼륨을 넣은 머리와 진주 귀고리와 실크 스카프와 자개 브로치들이 식장 입구를 가득 채웠다. 수정이 아는 얼굴도 많았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도 많았다. 엄마는 그 가운데 서서 수정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가장한 장례식이었다. 근사한 장례식이었다. - P12

이런 남자들은 뚜껑 열린 맨홀처럼 인생에 잠복하여 어린 여자들을 삼킨다. 어리고 똑똑지 못한 여자들을 삼킨다. 물론 어릴 때 똑똑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 P26

아가야, 웃으렴. 겁내지 말고. 팔매질을 하렴. 운동회 날 박을 터뜨리려 애를 쓰는 아이들처럼. 싸우렴. 다치지 말고. 구멍에 빠지지 말고. - P40

"있잖아, 우리가 50년쯤 후에 다 같이 죽을 거라는 것보다 30년쯤 후에 다 같이 고아가 될 거라는 게 더 무섭지 않아?" - P79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가치 없게 취급되는 사회란 걸 알면서도 이 전공을 확고하게 선택했고, 그 선택의 자유를 자기보다 뒤에 오는 이들에게도 확보해주려고 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더이상 어려 보이지 않았따. - P108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 P118

"아빠, 어떤 일들은 너무 복잡하게 엉망이어서 벌어져요. 아빠가 바꿀 수 없었어요."
연보도 말했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진곤에 손등에 얹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어린 얼굴로. 그래도 진곤은 연모가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했다. 연모의 손이 계속 굳은살 없이 부드러웠으면 했다. 사과나 깎으면서, 엉망인 세계를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 P150

낙관이 아이작을 죽였다고 스티브는 생각했다.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세상이 점점 더 상식적으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가. - P206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나는 결혼 같은 거 하게 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예감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았다. 적정한 수입이 들어오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한나의 삶엔 완결성이 있었다. 결여된 것이 없었다. 어딘가 치우친 사람을 만나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 P213

서른아홉. 중년을 어떤 모습으로 맞을 것인가 고민이 많은 나이인데, 사람들을 겪으면서 많이 배웠다. - P241

다른 사람이 괜히 카트를 타고 갈 때 심심해서 이것저것 혜련에게 묻는 것도 중간에 끊어준다. 그러니까, 알고 있는 것이다. 혜련의 직업은 말하는 게 제일 피곤하다는 것을. 혜련은 평범하게 친절한 사람들이야 많이 만나봤지만 그런 종류의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 P242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 P248

하품이 옮는 것처럼 강인함도 옮는다. 지지 않는 마음, 꺾이지 않는 마음, 그런 태도가 해바라기의 튼튼한 줄기처럼 옮겨 심겼다. - P262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채 다친 동물처럼 실려온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그 일이 이제 지나갔다고 말해주면서 1년이 갈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할 테고, 거기에 끈질기게 대답하는 것도 1년 중 얼마 정도는 차지할 테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P266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 P305

재소자의 건강을 나라가 책임진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도 감옥 안에서 아프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 동열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도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고, 인권이 적어도 어떤 하한선에서는 실체를 가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 P327

"믹서기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건 나약한 게 아니에요." - P379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 P379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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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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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 P185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 P192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 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 P210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앞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 P233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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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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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이상 몇 가지 주의로 이혼은 내 본의가 아니요, 씨의 강청이었나이다. 나는 무저항적으로 양보한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해도 우리 처지로 우리 인격을 통일치 못하고 우리 생활을 통일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여든 노모의 여생을 편하게 하고, 네 아이의 양육을 중분히 주의해 주시고 나버지는 씨의 건강을 바라나이다. - P203

동기는 여하한 것이든지 훨씬 열어젖힌 세계는 이상히도 좋았고 더구나 무구속하고 엄숙하게 지켜 있는 마음에 어찌 자유스러운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되겠는가.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한[거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방향와 밀봉 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여하하든지 나의 진보 과정상 감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 P207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 P270

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 중에 공명할 자가 있는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이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 - P271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혜석이 말년에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여겼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행복의 기미를 찾아 그를 변호하고 싶었던 나는 잠시 낙담했다가, 바로 이것이 핵심임을 깨달았다. 나혜석의 삶이 결국 어떠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혜석밖에 없다는 것.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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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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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기와 분노하기는 내 특기였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반으로 가르면 한쪽에 자책이 있고 다른 한쪽에 분노가 있었다. 내 뇌를 반으로 갈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 P22

나는 내 딸이 까만 게 신기하고 좋다. 목소리가 굵고 뚜렷한 것도 좋다.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좋다. 토끼가 아프면 곰에게 문병을 가게 하면서 노는 것도 좋다. 버섯을 싫어하는 것도 좋고 날벌레는 보면 우는 것도 좋다. 바다를 그릴 때 갈매기를 같이 그리는 것도 좋고 저녁을 먹고 나면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다. 나는 내 아이가 안 좋을 때보다 좋을 때가 더 많다.
어떤 날, 나는 아이가 왜 좋은지를 계속 나열해본다. 그래야만 하는 날이 있다. - P39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 P56

윤 서방은 바람도 안 피우고 도박도 안 하며 술도 많이 안 먹고 나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런 남편한테 뭔가를 더 요구하면 나는 손쉽게 좋지 않은 여자가 될 수 있다. - P67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내 원가족한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안 보고 내 아빠의 형제들을 안 보기 위해선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내 남편과 아이에겐 처갓집과 외갓집이 있는 게 정상이 되리라는 걸, 정상이 아니기 위해선 정상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내 원가족과 더 철저히 묶이리라는 걸 몰랐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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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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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거주한 지 두 달이 지나자 그리 자주 사전을 참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외출해도 사전은 가방 안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결국 사전을 집에 두고 다니게 됐다. 그게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해방감을 맛본 동시에 상실감도 느꼈다. 적어도 조금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7

내 어휘는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늘어난다. 그렇게 단어들이 나타났다가 잠시 함께 있더니 종종 예고 없이 날 버리고 떠난다. - P48

나는 어려서부터 느꼈던 기쁨을 다시금 맛보았다. 누구도 읽지 않을 노트에 단어를 적어 넣는 기쁨 말이다. 나는 문장을 다듬지 않고 투박하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그리고 계속 불안한 상태다. 맹목적이지만 진실한 믿음과 함께 나 자신을 이해받고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 P54

나를 자극한 것, 날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하게 하는 것, 간단히 말해 나를 반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을 때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 글쓰기는 삶을 흡수하고 정리하는 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못하면 난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 글쓰기의 용광로에서 변형되지 못한 채 다시 말해 순화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계속 지속되는 말들만이 실제인 듯하다. 실제 하는 말들은 우리보다 높은 가치, 힘이 있다. - P75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 P75

자신의 언어와 떨어져 살면 자신은 텅 비어버린 듯한데 몸은 무겁게 느껴진다. - P104

삼각형은 복잡한 구조이고, 역동적인 형태다. 세 번째 꼭짓점이 다투기만 하던 오랜 짝인 벵골어와 영어의 역학 관계를 바꾸었다. 나는 싸워대던 그 불행한 커플의 산물이었지만 세 번째 꼭짓점은 그 관계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세 번째 꼭짓점은 내 갈망, 내 노력에서 생겨났다. 오롯이 나로부터 비롯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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