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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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기와 분노하기는 내 특기였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반으로 가르면 한쪽에 자책이 있고 다른 한쪽에 분노가 있었다. 내 뇌를 반으로 갈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 P22

나는 내 딸이 까만 게 신기하고 좋다. 목소리가 굵고 뚜렷한 것도 좋다.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좋다. 토끼가 아프면 곰에게 문병을 가게 하면서 노는 것도 좋다. 버섯을 싫어하는 것도 좋고 날벌레는 보면 우는 것도 좋다. 바다를 그릴 때 갈매기를 같이 그리는 것도 좋고 저녁을 먹고 나면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다. 나는 내 아이가 안 좋을 때보다 좋을 때가 더 많다.
어떤 날, 나는 아이가 왜 좋은지를 계속 나열해본다. 그래야만 하는 날이 있다. - P39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 P56

윤 서방은 바람도 안 피우고 도박도 안 하며 술도 많이 안 먹고 나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런 남편한테 뭔가를 더 요구하면 나는 손쉽게 좋지 않은 여자가 될 수 있다. - P67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내 원가족한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안 보고 내 아빠의 형제들을 안 보기 위해선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내 남편과 아이에겐 처갓집과 외갓집이 있는 게 정상이 되리라는 걸, 정상이 아니기 위해선 정상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내 원가족과 더 철저히 묶이리라는 걸 몰랐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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