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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누네즈의 문체는 뭔가 은밀하면서도 세련되고, 엉뚱하면서도 현명하다. 필멸을 사색하는 중에도 눈을 찡긋한다. 삶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심각하면서도, 부조리하고 코믹한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다정한가. 《 오프라 매거진 》 인상 깊은 추천사다. 부조리하고 필멸의 존재라고 믿는 인간은 그 필멸조차도 증명하지 못한다. 필멸의 이유를 알려면 인간의 설계 원리부터 알아야 하는데, 게놈지도를 완성한다고 해도 원인이 아닌 복사에 불가할 것이다.
언젠가 뉴스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스위스로 가서 목숨을 끊은 두 명의 한국인이 생각났다. 안락사는 의료진이 처방해 준 약물을 환자가 복용해 목숨을 끊는 방법을 말한다. 기타 약물이나 의료진의 도움 없이 목숨을 끊는 행위는 자살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로 인식되어있다. 그와 더불어 수천, 수만 년간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과학, 철학, 종교 그러나 그 누구도 답을 얻지 못했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프로그래밍하면 주어진 조건대로 움직인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취하고 강제적으로 삶에 집착하도록 설계되었다. 과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암 진단을 받은 후 친구의 처음 생각은 어떤 치료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생긴 암의 유형이 자신과 같은 단계에서 발견되었을 경우의 생존율을 알게 된 친구는….” 암에 관해서는 책 한 권을 써낼 만큼 공부했고, 많은 사례를 찾았었다. 바로 옆에서도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4기 수술 후 고통에 스스로 연명을 포기한 분도 계셨고, 오랜 항암 치료로 온몸이 부어오르고 걸을 수 없이 폐인처럼 된 분도 있다. 반면에 항암 치료를 마친 순간에도 억척같이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으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경우도 봤다. 느낀 것은 숭고함도 의지도 아니라, 자기애 왜 사는지는 모르지만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있어야 암과 함께 공존 가능하다는 거다.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티벳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걱정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을 하겠네.’ 세상은 80억이 넘는 인간이 살고, 그것보다 더 많은 생명이 산다. 나 혼자의 의지로 어디까지 이룰 수 있겠는가? 무엇을 이룰 것이고?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과거의 경험이라고 한다. 지금 내 의식 속에서 행복을 내쫓고 고민과 욕망만 한가득히 아닐까?

인류는 유전자에 종말이 새겨진 채 태어나는 동물이다. 수만 년 전에는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종말을 믿었을 것이고, 푸른 눈동자의 나라에 검은 눈동자의 몽골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종말을 보았고 악마를 보았다. 페스트가 그러했으며, 많은 일이 종말이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팬데믹을 겪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는 바이러스로 인한 재앙은 50년~100년 주기로 항상 있었다. 지금 많은 사람과 미디어가 떠들어대는 종말론은 수천 년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지금 겪는 팬데믹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처음 겪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팬데믹 때문인가 아니면 종말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인가? 종말과 고통에서 당신은 어떻게 지내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