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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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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고통은 공유할 수 없다. 특히 신체에 국한한 고통은 그 신체를 가진 사람만이 그 고통을 느낀다. 심리적으로 어떤 점을 공감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 고통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없다. 고통이 내밀할 수록, 말로 표현되지 않고, 소통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반면 소음은 공동으로 들을 수 있다. 소리이기 때문에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듣는 사람 대다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그가 '소음'을 말하는 건, 시대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한 시대의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신체의 고통과도 같이, 다른 시대와 소통불가능하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고통을 보낸다. 한 시대의 고통을 다른 시대에서 말한다는 것은, 당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 그 시대의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이 다른 시대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은, 그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 이해하고 나면, 조금은 그 고통이 완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것이 조금 견딜만한 것이 되는 걸까, 

화자도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이 다친 맥락을 찾아 헤맨다. 그가 왜 길가다가 총상을 입었는가? 그의 옆에 있던 리카르도는 왜 죽었는가? 그는 초반부에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길가면서 쉽게 암살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그런 시대적 불안 속에서 살다가, 자신도 우연히 총에 맞은 것이다. 그런 불안 속에 자신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게된 사람이 나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p16 

총에 맞기 전과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총에 맞기 이전, 그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총을 맞은 이후 그의 모든 삶은 상처에 집중되어 있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나며,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 짜증이 난다.  그의 상처와는 무관한 걱정으로 느껴진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면, 선생으로서 그 지위에 머물러야 하는데, 학생들의 말에 선생으로서 반응하지 못한다. 그는 그의 주변 누구도 그의 상처를 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신도 이유를 모르지만, 리카르의 흔적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것을 찾으면 그의 고통도 견딜만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결국 그는 리카르도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리카르도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에 관한 역사를 알고 이해하고 나서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일과는 무관한 기억들을 더듬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다시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환상으로 돌아온다. 작가의 어조에 따르면, ‘환상’에 가까운 행동을 하려고 다시 노력한다. 사실 그게 환상일지라도, 그 노력을 그의 가족은 필요하다 여겼고, 그 역시도 그의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져서 그 노력이 의미없는 일이 될 때까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의 노력은, 그의 세계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나이 자체가 자아 통제에 대한 유해한 화상을 심어주고, 흔히 그 환상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인데, 그런 망상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자율성과 연관시키고, 어른이 되자마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주권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각성의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인데, 각성은 온다는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는다. 각성이 올 때 우리는 썩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충분히 오래 산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애가, 자신의 결정이 조금 개입하거나 전혀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타 사안들에 의해, 타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을 거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과 마주치게 될 그 기나긴 과정들은 지하의 수맥처럼, 판구조들의 신중한 이동처럼 늘 숨겨져 있고 — 때로는 삶이 필요로 하는 강한 추동력을 삶에 부여하기 위해, 때로는 우리의 가장 화려한 계획을 산산조각내버리기 위해 —, 결국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가 배워온 ‘사고’, ‘우연’, 가끔은 ‘운명’이라는 단어 등을 사용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p289-290


이 소설은, 고통을 겪은 한 사람이 그와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사람의 비극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 가면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비교적 지금 시대가 규정하는 선과 악의 규정점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리카르도가 살던 그 시기엔, 평화봉사단 단원이 마약을 재배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시기이고, 리카르도가 비행술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하여 마약 운반책을 맡는 시기이고… 영웅이 있었던 시기에 영웅으로서 생을 누리던 사람의 손자가, 영웅이 쇠락한 시대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시기였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면서 그 영광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추락’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는 크다. 화자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하면서,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총에 맞은 이후 추락했다 여기고 원래의 삶에 더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마음의 간극도 크지만, 그들이 실재로 하는 행동들이 맺는 간극이 크다. 간극이 클수록 소음도 크다. 이 소설은 그 마음들을 다룬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다루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그들이 어떻게 한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지, 지켜본다. 필연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필연들을 본다. 지금의 관념으로는 정당화되지 않을 행동들이 맺어가는 결과물들을 본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해진 시기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중요해졌다. 이 소설은 그 책임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조적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독자가 생각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기능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화자가 고통을 만지는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 인생은 예측불허한 것이라고만 말하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현실 세계를 그대로 끌어와서 여기 책으로 재현된 것 뿐일까.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지 못했다. 단지 시대적 고통에 나를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 뿐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모든 이야기는 결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화자가 한 행위와 생각의 결말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잘 쓰여진 인간의 삶만 두고서, 소설의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된 많은 것들이 마무리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의 입장에서 쓰여졌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말을 맺는다. 결말 가까이 와서,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자 급작스럽게 화자가 치유된 기분이 들었다. 경계선을 잘 그리고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 여겼는데,  그 이상의 것, 뭔가 예측하지 못하는 어떤 점들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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