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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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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끄트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래 리뷰는 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몰락해가는 헌드레즈홀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엇이 감추어지고 드러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화자인 페러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헌드레즈에 집착한다. 페러데이의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상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성직자에 비유하여 어떤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이라든지, 그 자백을 이용해 로더릭이 겪는 일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든지.. 실재로 이 저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공포만으로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저택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조작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닥터 페러데이다. 그는 저택을 살 만큼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지만, 야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을 헌드레즈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손쉽게 메우려고 한다. 게다가 책 표지에 적힌 소개말로도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점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으니,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만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련한 반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저택의 ‘리틀 스트레인져’가 닥터 페러데이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닥터 페러데이가 어느정도 그 일에 기여했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묘미는, 그가 어디까지 개입한 범인일지, 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할지 추측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욕망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지 살펴야 할까.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 혹은 몰락을 원하지 않았으나 몰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닥터 페러데이와 에어즈가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교차점에서 만난 게 이 책이 묘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공포에 떨거나, 더더욱 욕망에 매몰되어 욕망만을 쫓거나, 어떤 아비규환이든 소환해내는걸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에어즈가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헌드레즈 홀의 땅들을 하나 둘 처분하고, 수많은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보수하던 저택에는 하녀가 한 명 있으며, 유일한 수입원인 농장에서 귀족이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고용된 사람과 일해야 했다. 깨진 컵들은 이어붙여서 사용하고, 몇개의 방들을 제외하곤 먼지가 쌓인 채 빗물이 샌다. 관리가 되지 않는 헌드레즈홀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묘사한 것을 읽으면서나는 몰락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에어즈가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런 외부적인 몰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뻣뻣하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구분하며, 비슷한 집안이라 판단한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페러데이는 아직도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헌드레즈홀에 사는 에어즈가의 유모 자식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헌드레즈홀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페러데이와 같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에서 오는 차이, 무관심 그는 욕망 그 자체에 이끌려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하다. 케럴라인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케럴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녀와 결혼해 그가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저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그 저택을 가진 이후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려 해도, 거기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일단 욕망이 실현되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가고, 갑자기 돈도 생기는 듯, 어릴 적부터 키워온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의사가 되는 건 덜 중요해진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면서 키우는 야망보다, 눈에 보이는, 어쩌면 허영을 더 손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헌드레즈 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케럴라인 역시 페러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듯 페러데이를 보지 않고  집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궁리만 한다. 한때 페러데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힘든 순간에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통해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가 계급적 지위를 버리려 한 것인지, 그것도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닥터 페러데이에게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방안을 사귀는 동안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닥터 페러데이가 표출한 저택에 대한 욕망, 계급적 욕망 때문이었을까. 사랑이 보은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러면 이들이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필요했을까. 

결국 에어즈가는 누군가가 불씨를 지핀 공포에 물들어 하나 둘 미치거나 죽는다. 이미 몰락의 예감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공포는 어쩌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단 한명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있더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딘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미신에 기댄다. 자신이 바랐기에 결혼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러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슬퍼하고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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