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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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p5


'300개의 단상'에는 자신이 했던 말이든, 타인이 했던 말이든, 그와 그 주변의 타인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이든 간에, 우선 뒤집는 말들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은 솔직한 글이 가학 혹은 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는데, 수치스러운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선언한 건 그가 솔직한 글을 쓰고자 한다고, 솔직한 글이 지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로서 그가 느끼기에 부끄러울 일조차도, 적어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수치스러운 일을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 누구든지 그에게 지루해하지 않고 공감할 누군가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공감할, 누군지 알지 못하는 독자를 만나려고 손을 내미는 듯한 그의 발언이 도발적으로 들렸다.


한편으로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익숙히 괜찮다고 믿었던 사실이 뒤집힐 때라고 한다면, 위의 문장은 무언가를 뒤집으면서 시작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앞과 뒤를 뒤집어, 놀라게 하라는 것. 이 단상의 재미는, 이 뒤집힘에서 오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p7


그러니 어떤 인물을 멍청한 사람으로 평하고서,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 이점은 재미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 혹여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고,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있을 수 있겠다는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다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로서, 확신에 찬 발언을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둔다. 도로 발언하는 자신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말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발언을 모순으로 뒤섞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집힌 말은 어느새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는 이런 모순을 삶에서 발견하고 글로 옮긴다.


'300개의 단상'에는 모순을 폭로하는 듯한 짧은 글들이, 내용연결 없이 연이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쓴 일기를 읽을 때의 기분이었다. 일기를 쓸 때 연이어 이어진 사건을 쓰기 보다는 계속 끊임없이 주어지는 생각을 쏟아내기 바빴다. 이후 읽어보면 그 생각이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언가 깨달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는데 받아적기 바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솔직한 이야기들은 누가 읽지 않으리라는 생각없이는 쉽게 쓸 수 없는 글이었다. 이 단상은 그런 의미에서 일기처럼 느껴졌다. 일기보다는 압축적이고, 사건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만, 축약되어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이 될 듯한 인상들이, 계속 연이어 나열되고 있었다. 나열된 글들은 규정된 무언가를 억압으로 느끼고 계속 탈주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가 탈주를 하려는 이유는, 이 단상에 잠깐 언급되듯이 그가 가진 장애가 내내 그를 괴롭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장애로부터 사유를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탈출하는 것으로 숨을 돌렸을 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p97

삶을 그저 견디려 애쓰는, 책임을 하나도 져버리지 못한 듯한 모습,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병을 견디고 엄마가 된 자신을 견디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의 삶이 힘겨워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나드는 사유와, 그 사유대로 사는 삶이, 무기력하고 자유로워보였다. 다른 모든 일탈보다도 낭비하고 있다는 갈망을 충족시킨 것은 모성이었으며, 알아차리는 법도 멈추는 법도 없는 자기소멸의 방법이라고 묘사한 데 있어서, 그가 탈출하지 못한 그 자신의 몸이, 그가 짊어진 책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일탈을 하며 갈망했던 죽음에 가까워졌고, 역설적으로 삶에 닻을 내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그가 실은 단상 첫 페이지에 쓴, 그의 말은 실현된 것일까? 그는 그가 닻을 내린 그의 삶을 부끄러워하는건가? 아니면, 그 이전의 삶을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가 무게를 두는 게 어느 쪽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가 버티고 있는 삶을 그대로 말한 건 남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저 그는 고백하는 것 같았다. 


몇 문장 밖에 안되는 글에 함축된 생각의 일부를 듣고 있는데, 그 사이에 숨어있는 서사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어쩌면 그건 그의 서사가 아니라, 내 내면에 불러일으켜진 서사일 수도 있다. 문장들은 너무 짧아서, 모든 사안을 유추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읽었을 때 바로 어떤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건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일에서 오겠지만,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단상들은, 단상을 왜 적었을까, 이 단상의 배경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라면 이런 생각을 언제 할 지 상상해보면서 이 사람의 삶을 그려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연속적인 단상의 나열은, 그 생각을 통과하여 연속적인 삶으로 살아있다. 자기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안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저자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없는 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발견한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재미없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평범하지는 않은 생각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사슬을 읽을 때도 단편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 집합을 책으로 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단편, 혹은 장편에 등장할 수 있는 인물의 단면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이 독후감을 이렇게 쓴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읽기 위해 읽느라 흘려보낸 글들이 많아서, 오히려 아쉽다.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며, 오래 두고 읽는 시집처럼 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 P5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 P7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 P97

우울증은 그 병에 걸린 사람에게서 즐거워하는 능력만 훔쳐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한 적 없는 모든 일과 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장막으로 덮어버린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죽는다. 이런 경우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는 내리(de) 누름(press)을 당하는 것이다. 영원히.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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