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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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은 정체성이 없고, 때때로 여성혐오적이기도 하고, 독자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글이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즐겁다. 생업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글을 쓰기 위해 생업을 유지하려 하거나, 유지하고 있다. 생업과 글쓰기가 자꾸 주객전도가 되어서 고민이다. 백수가 될 자신은 없는데. 이대로 살다간 계약기간이 끝난 후 다른 곳에 취직 못하고 곧 백수가 될 것 같아서... 미래의 백수에게 미리 미안하다고 편지를 써 보자. 미안. 미래의 네가 알아서 잘 다시 일을 구해서 돈 벌면 되지 않을까? 미래의 내가 뭐라고 답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열받을 것인지, 아니면 니가 그렇지 뭐 하고 체념할 것인지. 과거의 반응을 봤을 때는 둘 다 일 것 같다.

글쓰기가 생업이 된 사람들이 부럽다가도, 그 대신 얻은 쓰는 자유를 생각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자기위안을 한다. 팔리는 이야기와 써낸 이야기는 조금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대신 글만 쓰고 살고 싶다는 마음 속 아우성을 닮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알바를 하면서 쓰는 시간을 늘리며 사는 게 내게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내 글이 팔릴 것이라 믿을 자신이 없다. 글만 쓰고 살 정도로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거나,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던가 하면 그건 아니고 그저 정의내리지 못한 어떤 상황에 예민하여 이야기에 잘 홀리는 사람일 뿐이라서. 많은 이야기를 읽을 독자는 될 지언정, 쓰는 사람이 되면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쓸 자신은 없다. 나는 이미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를, 이미 더 잘 쓰여진 이야기 옆에서 쓰는 것처럼 보인다. 잘 쓰여진 이야기의 흔적을 다른 사람의 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읽는 책이 종종 지루하다. 이런 태도로 안주하고 있어서 출판한 글보다 더 나쁜 글만 쓰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역시 다독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페란테가 언급한 이야기처럼, 나는 누군가가 이미 써낸 글을 뒤섞어서, 재배열하여 쓴다. 써낸 이야기는 내가 많이 읽었던 문학의 형식을 닮아 있다. 한때는 리얼리즘에 관한 강박 때문에 글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내가 진두지휘하는 글이 아니기를 바란다.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를 바란다. 내가 나서서 다 말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글은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글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해버리게 된다. 단지 그걸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아는 사람인 척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쓰는 욕구는 아는 척 하는 데서 오지 않나. 내가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 왜 타인이 되고자 했는지도 모르게 타인의 그 고통을 서술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것이 윤리에 어긋나는지 아닌지 계속 논쟁을 거치다 쓰거나 못쓰거나 하더라도 내 이야기만 하려고 쓰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글의 화자는 그가 처한 상황의 한계 때문에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내가 하지 않은 행동으로 고립되는데 내 삶은 갖은 윤리로 빽빽하게 행동을 제한한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수정하라고 요청할 때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그 글은 화자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다른 조건이 개입되지 않는 한 그 화자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묘사한 것은 특정 조건 하에 있는 화자였으므로. 그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대로가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엘레나 페란테의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p81)에 빠진 인물이 된다. 조언한 사람이 말한 대로 수정을 하려면 화자를 바꾸든지, 아니면 새로운 화자를 등장시켜야 했다. 그가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서, 다른 괜찮은 수단을 찾지 못했으므로 글은 다시 어둠 속에 묻힌다.

여러 이유로 삶과 글의 화자를 별개로 둘 방어벽이 필요하여, 익명으로 글을 쓰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독자가 한 두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글의 형태를 직접 듣고 싶어서이다. 어떻게 읽히는지, 선을 넘지는 않았는지, 괜찮은 부분이 있는지. 등등. 현실에서 독자를 찾는 것은 어렵고, 온라인 상에서도 거의 독자는 없다. 그러니 내 쓰기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걸러내는 것이 어렵다. 윤리에 집착하는 건, 내가 만난 사람이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현실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쓰지 않는 게 낫다. 왜 쓰는가 다시 생각하면, 아무래도 쓰지 않고 살기란 어려워서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다. 어떤 사건, 어떤 고통, 보았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있는 그대로 쓴다는 건,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리란 점도 내포하고 있다. 그 경계선을 계속 탐색하는 데 힘이 많이 든다. 인물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윤리를 지키려고 한다고 해도. 내가 화자의 한계에 갇혀 있다면 윤리적일 수 있는지. 혹여 잘못 표현하여 윤리에서 어긋났는지,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재현의 윤리를 어기지는 않았을지. 여러차례 검열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때 내린 결론은, 재현한다는 게 윤리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했다.

다시 쓰기 시작한 건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내가 나이려고 할 때 관계맺는 것이 어려웠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이다. 예민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이다. 삶의 어떤 것에도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시 쓰기로 하면서 윤리적인 글쓰기란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무엇이 써도 괜찮은지 고민했다. 현실과 있는 그대로 닮지 않게 하여 현실의 삶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이끌어낸 것은 현실에 있다. 아름다운 것을 꿈꾸고 닮으려는 모습을 지향하지만, 정작 써낸 글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보다는 욕망때문에 좌절하고 실수하고 허둥대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출판된 글이 이끌어내는 아름다운 감성은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훈련부족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쓸 수 없는 글을 나중에라도 쓸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해낸 일조차도 매번 겨우겨우 해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도 드물게 해내고, 해낸 일은 겨우 해낸 일이라 판명되는데, 지금 할 수 있다 마음먹기도 어려운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은 아마, 여러 실패 이후 최소한의 것이라도 보수적으로 해내서 삶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게 작가들이 단명한다는 사실을 자꾸 언급했다. 그러나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쓰는 나를 유지할 때만 자취를 감춘다고 여겼다. 우울하기 때문에, 기후위기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피해입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태어날 때부터 여러 신체, 환경적 조건이 열악한 생명을 위한 제도를 만드려고 노력하거나, 일선에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이들에게 약간의 돈과 여유시간을 보태는 것, 그리고 글쓰는 것 그 이외의 삶에서는 삶을 유지할 이유와 행복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에 속으로 어쩔 수 없겠다며 대답할 수밖에 없다. 길게 살아야 할 만큼 제 삶이 가치있냐고, 저울질하는 태도가 썩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작가라는 이름을 독자가 있을 때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작가가 아니고, 설령 단명한다고 해도 어쩔까 싶다. 작가가 되어 독자가 있어도 마냥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내 삶이면서 내 삶이 아닌 어떤 물성으로 낱낱이 해부당하는 경험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게는 구원이었던 것들이 어떤 파편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는 건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어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어떤 영향도 그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내가 말하려던 것과 다른 것들을 종종 사람들은 전달받고. 우리는 종종 소통불가능한 영역을 마주하므로. 마주보고서도 그렇고. 글로서 대면해도 그렇고. 내가 전달하려던 것을 그대로 전달받아서도 곤란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내가 말하려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기도 했기 때문에. 무엇이든 침범하지 않은 채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제도적인 것들을 바꾸려 행동하는 일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도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제도를 보완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인지, 엘레나 페렌테처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작가가 진실을 추구하려 애썼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그 진실이 소통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쓴 것은 읽은 것으로부터 오며, 그대로 쓰기 보다는 계속 더 진실을 표현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도. “허구로 장식된 거짓말들이 서로 충돌하여 틈을 드러내고, 예상치 못한 진실이 수면 위에 떠올라, 독자 이전에 쓰는 사람부터 놀라게 해주기를 바랐던 점도(128p)” 좋았다. 그리고 무언지는 모르나 여성의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는 점도 좋았다. 내 글이 여성혐오적이었던 것은 내가 읽은 것이 여성혐오적인 줄도 몰랐던 글로 배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살려고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지려고 쓰는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일단은 쓰기로 했다.

세상에 재능있는 사람은 많고, 너무 많아서, 누가 있든 없든 빈 태도 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쓰기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안 써도 되는 글일지도 모를 것을 매번 쓴다. 그건 내가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하든 내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누가 해도 되는 그 정도의 가치였던 것 만큼이나 비슷하다. 그러니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한다. 약간 배째라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겠나 싶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다는데 어쩔 것이냐고..

언젠가는 자급자족 공동체 내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착취구조 바깥에서 일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건 비겁함일까? 분명 일선에서 일하면서 구조내에서 구조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자발적으로 일할 곳은 정할 수 있으면 했다.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안 써도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안주할 진실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진실이 뭘까. 그가 진실이라 말하며 일컫는 건 무엇인지 이 책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사회에서 지워진 여성의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발굴할 수 있는 진실은 뭘까.


P.s. 다 좋은데요 여성 작가를 여류작가라고 하는건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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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3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