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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슐러 르 귄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 중에서 어떤 것들을 선택하여 보여주었고, 그것이 에세이로 출간되었다.
그의 시민으로서의 자아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자아, 나이든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자아와, 독자로서의, 작가로서의 자아들이 여기 나뉘어 실려있다. 특히 그가 판타지 소설의 작가이기 때문에 느끼는 판타지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서술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어슐러 르 귄을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했다. 그는 힘을 잘못 사용하여 쫓기는 주인공을 그렸고, 그 설정이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하여 이삼일 내에 여섯권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하여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나는 그가 쓴 모든 이야기를 다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소설을 읽고 판타지 소설이 어떤 힘을 갖는지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판타지 소설은 허무주의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체제 전복적이라는 것’을 지적한 점도 흥미로웠다.
“물리법칙은 무시해도 인과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 그 세계의 지도에서 특정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지도와 관련성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모순의 바다를 표류하거나 설상가상으로 작가의 희망적 관측이라는 얕은 물웅덩이에 익사하게 된다. p129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이 판타지 문학을 여타 문학에 비해 훨씬 많이 폄하하거나 악마화하고 묵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은 이미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판타지 문학이 수 세기에 걸쳐 증명해 온 바 있다. p133
르 귄의 작품은 서사가 인물들을 이끈다. 그러면서 명시적인 잠언들이 서사와 인물에 힘을 더하며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규칙들은 우리 세계의 규칙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뭔가가 뒤틀려있다. 내가 읽은 서사에서는 힘을 많이 가진 마법사가 등장하고, 그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가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신분이 있고, 편견이 있고, 힘이 있다. 그것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고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은 부분을 일부로 교조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고, 중간 중간에 삶에 관한 통찰들이 실려 있어서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멸시해온 무의식적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고, 그의 작품 <어둠의 왼손>은 성역할에 관한 고민을 뒤집어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들었다. 확실히 <어스시의 마법사>시리즈도 그가 말한 대로, 체제 전복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처럼 보였다. 힘이 마구 승리하는 서사를 끌어내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세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준다. 밥을 하고, 빨래하는 일을 일상을 유지하는 힘으로 생각하고, 몸의 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 관계를 재정의하는 그의 태도가 이 에세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는 게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계속 읽어나가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언어로 명확히 지적해준 부분도 있었고, 그의 취향도 엿볼 수 있었던 게 재미있었다.
*황금가지 서평단에서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