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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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처음과 끝, 서사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에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한다고 그랬던가요? 그런데 이 각각의 소설에는, 이 책 전체에 서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었어요. 악몽의 구조대로 수미상관으로 끝나야 했던 몇편의 단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집을 단편집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모든 '꿈'들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단편집을 단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꿈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꿈을 파편으로 꿉니다. 누군가가 죽인 사람 없이 죽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끝없이 쫓기고, 말없이 걸어가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영영 헤어집니다. 꿈에는 서사가 없고 일어나면 대부분 잊어버립니다. 어떤 장면만을 남기고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남은 하나의 장면은 너무 강렬해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 소설도 그랬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의식으로 꾼 꿈이 어린시절을 연상시켰어요. 제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세계는 잔혹하고, 그러나 저 역시도 세계에게 잔혹하게 구는 존재인 그런 어린아이요. 제가 최근에 힘든 일을 겪고 어린시절로 자꾸 회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둔지는 꽤 되었지만 그 사건 이전에는 책을 펼쳐서 읽는 게 힘이 들어서 엄두가 안났거든요.
저는 서사가 있는 글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요, 서사가 있으면 이야기가 너무 뻔해지는 것 같아서요. 이야기가 종결되고도 삶은 남아있는데, 이야기는 종결되어버리니까요. 저는 서사가 명확하게 가리키는 바가 분명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실패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요.  제가 사는 삶도 서사적이지 않구요. 누구나 겪기에 말을 내뱉을 수는 없지만 제게는 잔혹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대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자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인데요. 한가지에 끊임없이 몰두하여 사람들과의 교류를 스스로 차단하고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는 경험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경험은 사실 외부와 자신과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을 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충격파로 내부에서 정리가 필요할 때 필요한 거잖아요. 내부로 침잠하고 계속 내게 말을 거는 건 외부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죠. 그러니까 자폐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자꾸 내게 말을 거는 건 사실은 바깥으로 말을 하고 싶은 데 그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방법은 정해져있지 않고 제가 이미지화해야 하는 일이구요. 배수아 작가가 낭송하면서 뭔가를 발견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을 때, 저는 두가지가 생각났어요. 소설을 이미지화하는 방식에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과, 목소리로만 구전되던 구전설화에 관한 것이요. 소설을 낭송한다는 방식은 이 소설에 갇혀 있는 목소리를 꺼내려는 시도라고 생각했어요. 악몽은 닫힌 구조인데, 닫힌 구조를 사랑하는 줄도 모르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목소리로 변환시켜서 같은 시공간에 있게 만들면 다른사람에게도 닫힌 구조가 현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닫힌 구조라서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에게 소리로 귀에 들어가면서 초대하는 거죠. 목소리로 구체화된 이미지인 거에요.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도 어딘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에 등장하는 낱말들이 굉장히 원초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원초적이라는 것은 인간문명 이전의 것, 아니면 인간문명이 최초로 탄생할 무렵의 것이라는 느낌도 들거든요. 다시 옛날로 회귀하려 하는, 구전문학의 시대로 돌아가는 그런 잔인함이요. 그림형제의 각색된 동화나, 이솝우화, 우리나라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들이라든가. 뭔가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인데, 어렸을 때는 도덕관념없이 그런 것들을 함부로 말하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삼가는 이야기들에 관해서 떠올렸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지는 이야기가 충격적인 건 그 이야기에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인거잖아요. 
저는 작가가 제게 제가 납득할만한 진실의 말을 몇마디 숨기고서 침투해들어오는 것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어요 그 진실은 꿈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꿈은 현실을 기반으로 쓰여지잖아요. 그러니 꿈은 현실을 반영하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은 일어났었던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스스로 겁을 먹잖아요. 소문이 우리를 헤칠 수 없다면 왜 우리는 소문에, 무의식에, 꿈에 지배당한다고 느낄까요? 
확실히 이 소설을 '소문'이라 한다면, 소설이 저를 해칠 수는 없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에게 제 무의식을 내어준 기분이었는걸요. 마구잡이로 헤집어진 기분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목소리는 있었는데, 제게 남은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는 못하겠어요. 제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이유를 일일히 나열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럴때 무의식의 힘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서 무의식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지구요. 무의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식을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구요. 다시 '현실'이라 불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요. 그 시도중 하나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되돌아가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여기 표현된 꿈들이 다시 그 잔혹함을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비한데, 세계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어서 모든 것에 휩쓸리고 마는 시절이요.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뭔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느끼기에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대부분의 일상에서 느끼고요. 그런 두려움을 느꼈어요. 소설속의 구절처럼,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도중에는 어린시절이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없는 그런 …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생각이 망상인 건 그때를 경험할 수 있는 건 지금일뿐이니까요. 
그런 꿈들을 저는 이 소설을 통해 꾸었어요. 아주 구체적인 이름들, 풍경들이 추상적인 단어들보다 더 정확하게 저를 꿈꾸게 했어요. 제 몸에 붙박혀있는 제 삶이 이야기와 뒤섞여 공중으로 흩어져버린 것 같았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고, 거대한 에너지에 둘러싸인 감각만 남아 있어요. 때문에 무의식을 이해하지도, 지배하지도 못한 채로 다시 헤집어졌을 뿐이었어요. 소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요. 그러니 이 소설에 관해 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저는 잊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떤 감정만 남고, 장면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처럼요. 무엇이 해소되었는지조차 아직은 말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을 잃었어요. 그러나 저는 아직 비서사적인 형태로 살아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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