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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평점 :

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오랜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귀국한 돌싱 리에. 글을 쓰며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싱글 다미코, 아들과 함께 살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문병하는 주부 사키. 대학 시절 늘 셋이서 붙어 다녀서 지어진 이름, 쓰리 걸스입니다. 그녀들은 졸업 이후 삼십 년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자유롭고 비범한 리에의 귀국을 계기로 다시 뭉친 순간 그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지게 되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대표작가 에쿠니가오리의 신작입니다. 세명의 동창의 오랜만의 30년 만의 재회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세 주인공 중 다미코에게 독자는 호감이 갔습니다. 문학상도 수상한 적이 있어 때로는 소설가, 때로는 라이터나 서평가, 에세이스트로 다양하게 불리지만 그만큼 정체가 애매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채 오십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여든된 어머니 가오루와 살고 있습니다.
리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멀리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현지에서 취직 후 영국에 자리를 잡은 후로는 일본을 오가며 금융 쪽에서 일하는 글로벌한 여성으로 성장합니다. 결혼과 이혼을 한번도 아닌 두어번 경험하는 분방한 생활을 하다 이제는 영국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성격이네요.
마지막 사키는 아들 둘을 낳아 키운 조신한 주부로 무심한 남편과 한밤의 텔레비전 영화를 감상하거나 계절 따라 마당을 가꾸는 낙으로 사는 한편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 계시는 시어머니를 문병하고 어린나이에 철없이 결혼하겠다는 큰아들과 옥신각신하면서 여느 주부와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에 잔잔한 작품은 보기 드문데 이 또한 매일 사건사고로 어지럽고 아픈 마음에 평화를 주는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리에게 영국 생활을 접고 귀국하면서 시작되고 당분간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남편도 자식도 없는 다마코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면서 그녀들을 둘러싼 일상이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도쿄에 몇 채의 아파트를 소유하며 월세를 받으면서도 굳이 다미코 집에 비집고 들어와 자기 방까지 꿰찬 리에를 다미코는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친구 절친이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집 없는 아이가 돼버린 거라는 리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네요. 다미코의 엄마인 가오루는 딸보다 수다스럽고 쾌할한 리에와 잘 맞습니다. 둘은 리에가 집을 찾는 동안 마치 모녀같이 지내는데 독자는 그것 또한 좋아 보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인 리에는 새집을 구하는 과정과 다미코와 모모치의 새로운 우정 덕분에 수다거리가 늘어나고 가오루가 발목을 삐고 난데없이 백내장 수술을 하거나 다미코의 죽은 친구의 딸 마도카와 그녀의 여인 가오루의 젊은 친구인 리쿠토 군과의 관계 사키의 큰아들이 벌이는 결혼 소송 등 사건도 일어납니다.
“나 캔털루프 멜론은 똑똑히 기억하는데, 참외처럼 표면이 매끈할 거라고 우리 셋의 의견이 일치했어. 단순하게 생겼고, 기품있는 맛일 거라고 했고. 나는 노란색일 거라고 했어. 왜 살이 노란 수박도 있잖아?
”우리, 참 오해가 많았던 인생이네.“
---P.284
제목에 나오는 ‘셔닐’과 ‘노란 멜론’은 이들이 대학 시절 독서 동아리에서 토론까지 벌일 정도로 동경했던 어휘들이다. 인터넷 검색이 없던 시절, 영어책에 나오는 ‘셔닐’과 ‘캔털루프 멜론’이 정확히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어감만으로 보면 한없이 근사하고 멋진 어떤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들여다 보는 재미와 셔닐 손수건이나 속살 노란 멜론같은 상징적인 소품들이 이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돋보이게도 합니다. 50대 후반이 된 세 주인공을 보면서 우리는 젊은 시절 수많은 꿈을 꾸고 멋진 인생을 설계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우리를 호락호락 쉽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에쿠니 가오리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냥 순간 순간 즐기면서 충실히 삶을 살아가라고 조언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극적인 갈등과 위기 상황이 없는 소소한 일상들이 지금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독자에게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쉼 없이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독자들을 찾아와 주는 에쿠니가오리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