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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ㅣ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평점 :

나치 침공 작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바르샤바의 유대인은 죽어가는 모습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그들을 기억하게 할 한 폭의 역사입니다.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랍비 신학교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으나 랍비보다는 작가가 되길 원했던 폴란드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작품입니다. 20세기 초 바르샤바의 유대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 나치즘, 사회주의,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시온주의까지 온갖 위협과 이념이 떠도는 바르샤바에서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 작가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것은 문학의 목표라고 믿었지만 정작 자신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한 채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아론 그라이딩거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르샤바를 방문한 미국 백만장자 샘 드라이만으로부터 희곡 청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상상도 못한 액수의 선불금을 받게 되고, 그와 더불어 일련의 성적 모험을 겪습니다. 그 상대는 공산주의자 애인, 여배우, 하녀, 친구의 아내 등으로 다양합니다. 어느 날 아론은 우연히 자신이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유년시절의 친구 쇼샤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독자가 느끼는 순간 쇼샤는 몸도 정신도 미성숙한, 소녀 같은 여자였고 그간 죽은 줄만 알았던 쇼샤를 재회한 아론은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찾아왔는지 한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모든 것은 게임이야. 국가주의도, 국제주의도, 종교도, 무신론도, 정신주의도, 물질주의도. 심지어는 자살마저도.
--- p.196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야. 낡게 되면서지. 하늘에도 새로운 것을 향한 열정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별은 스스로가 별인 게 싫어 결국에는 신성이 되지. 은하수는 자신에게 싫증이 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중략) “건강한 것에 싫증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지. 사는 것에 싫증이 나면 죽게 되고 그러다 죽은 상태로 충분히 있게 되면 개구리나 풍차로 환생하게 된다네.” --- p.200
그것은 다름 아닌 순수, 바로 쇼샤입니다. 나치의 존재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게 했지만 사랑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희곡작가로서의 성공과 미국인 베티와의 결혼을 결정하여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도 그에게 떠나지 않은 물음은 쇼샤였습니다. 쇼샤와 베티 그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자신을 부유한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열정적이며 재능 있는 한 여자를 거부하고 가난과 나치의 총탄에 의한 죽음이라는 저주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만큼 쇼샤를 향한 사랑이 컷을까요. 모든 사물과 인간의 본성은 동기와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유대인 공동체 모두가 그랬듯 모두는 현재를 위해 살았고 유럽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두 번째 왕림과 세상의 파멸을 기다린 서기 1000년 무렵을 비유하며 히틀러가 쳐들어오지 않는 한, 혁명이나 대학살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하루하루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20세기 초 나치즘과 반유대주의와 이념의 갈등으로 혼란스럽던 바르샤바 유대인 공동체에서 인간 개개인의 고통과 욕망을 차분한 시선으로 들여다 보며 생과 사를 통한 아름다운 서사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에는 많은 것들이 상실된 시대였습니다. 한 연인들로만 바라보기에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깔끔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저자 아이작의 심정도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