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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ㅣ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
21세기 러시아의 군사적 확장을 예견한 역사적인 글
중앙 유럽의 작은 국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유럽 문화예술사에서 중앙 유럽이 가지는 중요성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옹호해 온 작가 밀란 쿤데라의 사상적 원점을 보여 주는 에세이 『납치된 서유럽_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중앙 유럽이란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을 일컫는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흔히 동유럽으로 일컬어지지만 이는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동유럽은 비잔틴, 정교회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서유럽 문화권에 속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서진 욕망 때문에 이들 세 국가가 슬라브 세계라는 실체 없는 개념에 묶여 동유럽으로 인식되었고, 바로크 문화를 꽃피우고 서유럽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유럽 문화 사조의 역동적 발전에 기여한 중앙 유럽의 중요성은 점점 간과되어 이제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다는 것이 쿤데라의 주장입니다.
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다. ---p.79
1956년 9월, 헝가리 통신사의 편집부장은 포격으로 자신의 사무실이 파괴되기 몇 분 전, 당일 아침 개시된 러시아의 부다페스트 침공에 관한 절망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로 타전합니다. “우리는 헝가리를 위해, 그리고 유럽을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유럽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모스크바에서도 레닌그라드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말로 그는 헝가리 안의 유럽이 표적이 되고 있는 점을 헝가리는 헝가리로 남고 유럽으로 남게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합니다.
내가 중앙 유럽이라 부르는 유럽의 이 모순적 입장을 보면 왜 삼십오 년 전부터 유럽의 비극이 그곳에 집중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1956년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이 뒤따랐던 장엄한 헝가리 혁명이 있었고,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이 있었으며, 1956년, 1968년, 1970년에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봉기들 및 근년의 봉기가 있었다. 비극적인 내용으로 보나 역사적 영향으로 보나, 서유럽에서든 동유럽에서든 지리적으로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느 것도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일련의 저항들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p.42
20세기 초 중앙 유럽은 정치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됩니다. 빈의 중요성이 오늘날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의성을 통해 중앙 유럽 문화 전반에 기여한 다른 나라와 도시들이라는 배경을 빼놓고는 이 오스트리아 수도의 독창성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역사를 지닌 유럽 강국에겐 그들이 그 안에서 발전을 거듭해 온 유럽적 배경이 당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각성기와 수면기를 번갈아 겪어 온 체코인들은 유럽적 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계를 놓쳤고, 그리하여 매번 유럽의 문화적 배경에 적응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재구성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책 격동하는 21세기 유럽정세를 거장이 바라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납치된 서유럽’이란, 중앙 유럽이 유럽 정치, 사회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간과하여 서유럽 자체가 사라질 위험을 가리켜 쿤데라가 한 말로, 이는 세계사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지 못하고 변방에 자리함으로써 늘 소멸 위기에 시달리는 중앙 유럽의 작은 국가들의 비극적 처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어라는 비주류 언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어 프랑스 망명의 기회를 잡고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지역의 한계를 넘지 못한 체코 문학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깊었다고 합니다. 납치된 서유럽에서는 유럽 통합과 세계화라는 거대한 통합을 향해 나아가던 서유럽과, 그들과 같은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공유함에도 외면당하는 중앙 유럽 약소국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들의 운명으로 확장됩니다. 그는 소련의 탄압하에 언어와 문화가 위협받는 중앙 유럽 약소국들이 국가 정체성을 잃고, 결국 서구 세계마저 파괴될 것이라 호소하며 서구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1967년 쿤데라가 제기한 문제들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거대한 통합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약소 민족들의 운명이라는 차원을 전망할 때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