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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 <바퀴벌레>의 이 첫 문장은 카프카의 단편 ‘변신’에 첫문장에 대한 오마주이며 이번엔 영국의 총리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지구가 멸망을 해도 바퀴벌레는 남는다고 했던가요. 인간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바퀴벌레는 “대체 내가 왜 인간이 되었는지”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해를 쓰는 중에 아홉시 각료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다급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지 않게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회의실 의자에 앉아 각료들을 보는 순간 더욱더 놀랐습니다. 외무장관 베네딕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과 같은 바퀴벌레였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푸르고, 변영하고, 단결하고, 당당하고 야심만만해질 작정이니까요.”
저자 매큐언은 인간의 몸을 훔쳐 영국 수뇌부를 장악한 최정예 바퀴벌레 군단은 이 소설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풍자하기 위해 썼다고 밝혔습니다. 총리 짐 샘스의 몸을 뒤집어쓴 바퀴벌레와, 그와 마찬가지로 각료들의 몸속으로 들어간 동료 바퀴벌레들이 갖은 술수와 책략을 동원해 영국을 망가뜨리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영국 보수당 정부가 주도한 브렉시트를 대하는 저자의 비판적이며 절망적인 시각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인간을 파멸시켜야 우리 종족이 번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P.122 우리 종의 역사는 최소 삼억년입니다. 불과 사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이 도시에서 소외집단으로 멸시당했으며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최선의 경우가 무시당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엔 혐오에 시달렸지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원칙에 충실했고 우리의 신념은 처음엔 아주 느리게, 하지만 점점 가속도가 붙으며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핵심 신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라틴명 블라토데아가 암시하듯, 우리는 빛을 피하는 생물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P.123 우리는 번성할 것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보통 사람들이 그동안 속았고 앞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착하고 성실한 보통의 존재인 우리가 더 번성하고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되리란 사실을 알게 되면 커다란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바퀴벌레는 더럽다는 편견과 한없이 깨끗한척 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통해 본 행동들을 꼬집기라도 하듯 목표를 이룬 짐 샘스와 동료들은 다시 바퀴벌레로 변신해 각료실 방 한구석 쓰레기통 뒤에서 마지막 각료회의를 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정치인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이야기입니다. 바퀴벌레는 브렉시트에 대한 우화, 풍자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작품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로 들끓는 현대 정치판을 비유한 어느 사회에나 해당되는 풍자소설입니다. 작품이지만 실랄한 비판에 독자의 마음은 조금은 후련해졌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지원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