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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 침략에 맞서 들불처럼 타오르다 ㅣ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평점 :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권의 시작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당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친일 개화 정권을 수립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의 간섭을 받았음에도 일본의 승리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개편됩니다. 1895년 3월 20일 시모노세키 조약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으로 하관조약, 마관조약으로 불립니다.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5개 항목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조선에서 청나라가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요청에 지원받는 러시아가 새로 들어와 일본의 조선 지배욕을 방해하게 됩니다.
“고종실록 31년 6월 21일 일본 병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다. 이날 새벽 일본 병사 2대대가 영추문으로 들어오자 시위 병사들이 발포하여 그들을 막으려 했다.”고 적여 있습니다. 조선의 국왕 고종과 ‘척왜척양’을 외치던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어떻게 이지경까지 만들게 되었을까요. 지금 아픈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p.22“지금 청조의 군대가 ‘속방 보호’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의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군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이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문서를 보내라‘며 조선 정부를 압박하였다.
p.77 “우리의 거사는 나아감만 있지 물러감은 없다. 만일 국태공의 명을 따른다면 만사가 틀어진다. 그들 일행을 죽여서 국태공의 바람을 끊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김개남과 전봉준의 정치적 지향이 달랐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고 동학농민군은 경기 외곽, 경상도 북부, 남해안 지역, 충청도 청주, 홍주 등지, 강원도와 황해도 등 각 지역에서 봉기를 도모합니다. 전봉준은 정세를 분석하고 대책을 준비하고 집강소 활동 기간에 민심의 동향을 예리하게 살피고 국내외 정세를 살피는등 일본 침략자에 맞서 다시 봉기할 시기를 재고 있었고 마침내 1894년 가을 2차 봉기를 단행합니다.
신동엽은 서사시<금강>에서 동학농민군을 두고 “어제 발버둥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라고 읊었고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되고 아래에 터널을 뚫었고 전봉준이 그렇게 넘고 싶었던 고개는 지금 차들이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p.157 가장 싫어하는 것은 조선의 병사입니다. 조선 병사는 가는 곳마다 인민의 물품을 약탈하고 그들 처사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구타하여 실로 그 난폭함이 언어도단입니다, 그래서 엄중히 명령을 내립니다. 마는 일본 사관이 참으로 무관심하기에 엄령과 견책을 더해서 요즘은 다소 고쳐진 상태입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광주에 주둔하던 손화중, 최경선은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해 다시 나주관아 공격에 나섰지만 연합작전에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공격을 서둘렀습니다. 11월23일 농민군 수만 명이 나주관아에서 10여 리 떨어진 남산촌과 태평정 등지를 압박하고 나주성 북문 함박산로 몰려가 진을 칩니다. 농민군은 추운 날씨 탓에 민가에 들어가 밤을 보내고 있을 때 정석진이 거느린 수성군이 삼면에서 기습공격을 해와 육박전까지 벌이며 분투했으나 최경선은 마침내 붙잡히고 맙니다. 이렇게 남조선대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실행된 것입니다. 12월 2일에 보고한 내용에는 순무영의 최고 지휘관 이규태를 일본군 지휘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농민군을 돌보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p271 전봉준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전국 곳곳에 방문을 내걸어 알렸다. 그냐말로 당시로서는 빅뉴스였다. 전봉준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나돌자 사람들은 땅을 구르며 통탄해 마지않았고 밀고자 김경천은 세상 눈총이 무서워 몸을 숨겼다. 한신현은 그 공로로 금천군수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1000냥을 상금으로 받아 나누어 가졌다.
전봉준의 죄목은 조선 말기에 편찬된 대전회통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으로 꽤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하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이다. 전봉준과 같이 사형 언도를 받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 2시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전봉준은 ‘부대시참’이라는 판결문을 듣고 “올바른 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누명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어찌 나를 컴컴한 도둑 소굴에서 남몰래 죽이는냐? 종로 거리에 내놓고 피를 뿌려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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