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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서 - 문화정치학 에세이 ㅣ 여이연이론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스피박 읽기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스피박의 글들을 대체로 문학 비평, 맑스주의, 해체,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구체적인 이론적 관심사들에 대한 개입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각 글들이 놓인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가능하다. 『다른 세상에서』는 스피박이 1977년에서 1985년 사이에 여러 심포지엄, 컨퍼런스, 학회지에 발표한 글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인데, 스피박은 자신의 글이 제1세계 지식인들을 상대로 발표되는 각각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누락/생략/잔여/초과/잉여의 지점들을 거론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텍스트화함으로써 동질화되어 봉합되는 지점들을 다시 해체한다. 동시에 제1세계 지식인들을 상대로 대항담론을 펼치는 자신 역시 지식인으로서 늘 지식-권력의 공모관계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하며 자기 글에서조차 자기 비판을 수행하기 때문에 스피박의 글은 읽기가 더 한층 어려워진다. 스피박의 데뷔작인 이 책은 스피박이 미국의 학계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백인중산층 학자들을 상대로 하여 글을 썼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부산하게 전지구적인 재배치를 끊임없이 단행하고 있는 자본은 문화와 첨단/급진 이론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진보'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유통시키는데 너무나 성공적이며 그럼으로써 부익부빈익빈의 강철진용을 재구축한다. 이런 판단하에 탈식민주의 논의들은 제국의 텍스트들을 분석하고 그 서사구조와 내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제국의 담론을 되받아치는 행위로서 글쓰기 혹은 언술행위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메트로폴리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식민화에 맞서서 문화적 혼종성에 착목한다. 제3의 공간 혹은 안-사이 공간이 열어주는 가능성, 흉내내기와 틈새전략으로 균열적 해체적 읽기, 협상과 번역의 중요성 등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의 배경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혼합되어 있다. 맑시즘은 탈식민주의의 유용한 출발점이자 가장 든든한 이론적 원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 문화연구 등이 탈식민주의의 저항 전략에 동원된다. 예컨대, 바바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신분석학이, 스피박에게는 맑시즘과 해체, 페미니즘이, 부활한 프란츠 파농에게는 헤겔과 프로이트가, 사이드에게는 푸코와 그람시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한마디로, 문화의 혼종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의 혼종이 이루어지는 장이 탈식민주의의 장이다.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는 권력 관계란 늘 불균등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억압적 지배 사회 속에서 주변화되어 온 "타자들"을 복원하는 것을 공통 목표로 삼아 왔다. 이들은 포스트구조주의와 맑시즘의 통찰을 수용하면서, 젠더/인종, 가부장제/식민주의의 위계와 이항대립을 거부하고 전복시키려 한다. 그런데, 젠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면 탈식민주의 역시 심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피지배자와 지배자를 주체의 층위에 상정하는 "혼종성" 개념 역시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경험을 지닌 인종만이 강조될 뿐이지 않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레토릭을 들고 나타난다. 스피박을 위시하여 찬드라 모한티, 아니아 룸바, 사라 술레리 등의 소위 제 3세계 여성 문제에 천착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탈식민주의 논의는 젠더 문제를 무시하거나 늘 부차적인 것으로 상정하는데 그쳐서 제3세계 여성이 겪는 이중, 삼중의 식민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인도 태생의 탁월한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 석좌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스피박은 해체를 통해서 탈식민주의, 맑시즘, 페미니즘 이론에 생산적 위기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은 여성 이론가이다.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의 발흥을 전지구적인 자본 재배치라는 현재적 조건 속에서 고찰한다. 포스트식민 연구의 주요한 한 흐름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기반한 식민주의 담론들에 비판과 수정을 가하며 과거를 재검토하는데 전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자신 역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인 그녀의 이러한 이론적 출발점은 (굳이 그녀가 페미니스트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독보적이다. 즉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에서 탈식민을 향한 분석 및 이론들을 제출해 왔고 그것이 서구 학계에 미친 정치적, 지적 파급 효과가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의 제도적 산종이 전지구적 자본 지배에 유리하게 공모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스피박의 인식은, 식민주의 사고의 잔여물들과 싸우는 포스트구조주의적 포스트식민주의 전략들이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전지구적 지배 전략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론가의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과 직결된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에 포스트-이즘들이 공모 관계를 가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지배에 대한 이론의 공모성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다른 세상에서}는 3세계 출신으로 제 1세계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스피박 자신 역시 지식-권력 혹은 지식-지배의 공모 관계에 빠질 수 있다는 저자의 주체 입장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타자 담론들과 탈식민담론들이 (제3세계보다는) 제1세계에서 인기리에 포섭, 유통되는 정치적 저의와 정치적 효과에 대한 개입적인 성격이 강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포스트식민" 상황은 탈식민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1970, 80년대에 여성학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적인 것이 분과학문에 흡수됨에 따라, "제3세계적" 혹은 포스트식민주의 관점의 분석 및 기술이 90년대 들어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스피박은 주변적인 것이 제1세계의 분과학문에 속속들이 흡수되는 것은 서구문화의 교묘한 위기 관리 방식이며, 이러한 문화적 위기 관리는 지식의 제도적 산종이라는 형태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즉 주변적인 것을 담론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 (즉 주변적인 것을 텍스트화 하는 것)은 지배 욕망 및 지배의 정치학과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 역시 "주변성"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구성하는데 있어 배타주의적이라고 진단한다. 제도적 학문으로서의 타당성과 확실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3세계," "주변"이라는 새로운 (이론적) 대상의 구성에 연루된 이론가들은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범죄와 공모관계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주변을 명명하는 용어인 "제3세계"나 "주변성"이라는 딱지를 스피박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이 책에서 이론의 중립성 주장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읽어내고, 내러티브가 쓰여지게 되는 근저의 욕망을 훑어가며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들을 제시한다.
"주변"이나 "제3"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바로 중심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스피박은 이 책에서 지식을 통해 합법화되는 비평가의 지배욕망이 어떻게 남성중심성을 은근슬쩍 가리면서 교묘하게 만족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녀는 문학 비평, 맑스주의 이론, 역사서술 등 그 어느 분야이든지 간에, "여성의 대상화라는 전체 문제틀"이 얼마나 뿌리깊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척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균일화하는 독법에 맞서 스피박은 코울리지, 단테와 예이츠, 울프, 워즈워드를 주체의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자서전으로 읽어낸다. 스피박에 의하면, 논리상 약점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아포리아의 출현을 그 근본에서부터 허용하지 못하는 남성중심적 주류 (문학) 비평을 추동하는 욕망과 그것의 내재적인 논리 속에서 여성의 욕망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항상 남성들을 가장 투명하게 매개해주는 형상으로 이용될 뿐이다. 스피박은 이런 식으로 변함없이 작동하는 암묵적 전체틀을 성, 계급, 인종 문제에 민감한 다양한 독법을 통해 해체하면서 위계화와 중립화가 교묘하게 동시에 일어나는 비평에 해석학적 가치의 문제를 재거론한다.
비평이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이론가, 비평가들이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되는 함정, 곧 스스로를 자신이 분석하는 텍스트의 심판관으로 앉히고 자신들의 가치를 가늠하는 그 고뇌에 찬 거만함에서 잘 드러난다. 남근을 제거하는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언제나 남성을 입법자로 다시 세우는 쪽으로 여성을 뿌리깊이 착취하는 행태에 맞서 스피박은 "독자로서 각자 회피하기 쉬운 역사적-정치적-경제적-성적 결정항"(54)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스피박은 음핵담론 분석을 제안하고 자궁선망을 거론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스피박이 거론하는 자궁선망이 단순히 음경선망에 대항하려는 유치하게 도발적인 말놀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피박은 프로이트와 맑스의 문제틀 내에서도 회피되고 있는 "생산 장소"로서 자궁을 개념화함으로써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사회의 생산에 상호작용하는 결정항으로서 자궁선망을 (음경선망과 함께) 말한다. 즉 자궁과 음핵을 생산과 실천의 모든 영역들, 역사와 정치에서 일어나는 여성 억압의 지표로 재개념화하면서 스피박은 맑스주의의 젠더 맹목성과 프로이트의 남성중심주의, 더 나아가 핵가족 중심의 정신분석학적 성적 주체성 형성 이론을 비판한다. 그녀는 또한 핵가족 모델 비판에 수반되기 쉬운 공동체나 대안 가족 형태에 대한 낭만화 역시 경계한다.
중심/주변을 해체하려는 스피박의 기획은, 다문화주의라는 깃발 아래 제국의 거대도시들에서 일어나는 의도적인 포괄의 정치는 다름 아닌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이며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에 의해 신식민 혹은 재식민, 후기 식민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은폐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획에는 스피박 스스로 자기 이론의 준거틀로 삼고 있는 이론들(페미니즘, 맑스주의, 해체, 정신분석학) 역시 심문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문학자와 이론가들을 자본의 디스크 자키라 비꼬는 스피박은 오늘날의 맑스주의 역시 국제적 노동 분업을 고려하지 못한 채, 위기 관리로서 제국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이 여전히 작동중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이론화 작업은 실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를 끔찍할 정도로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실이란 없으며, 진리로 유통되는 해석들 역시 정치적이다. 이런 해석들에서 여성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배제된 타자라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라는 현재의 조건 속에서 제1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맑스주의 연구의 경우 이데올로기의 주체를 유물론적으로 기술하는데 있어서 가치문제를 물을 수 없다. 또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페미니즘 이론들이나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제도상의 변화들은 제 3세계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간접적이긴 하지만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맑시즘, 페미니즘 혹은 정치성을 표방하는 여하한 급진 이론 등 어떤 것이든 간에, 현재의 범지구적인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에 여러 미묘한 방식들로 포섭되면서도 동시에 배제되는,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사고하지 못하는 맹점들이 있다. 스피박은 바로 이 비가시화된 지점들을 주목하면서 최근의 국제적 노동 분업에서 가장 열악한 희생자들인 여성들, 특히 제3세계 여성들의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여실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이 불연속성과 이질성, 그리고 이것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제3세계 하부 프롤레타리아 서발탄/하위주체 여성들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인종, 계급, 젠더 문제를 지워버리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결정항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박은 역사지리적 경계와 정치적 힘들의 관계 및 작동을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불연속성들을 징후적으로 읽어내고 연구화하여 정치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점을 재삼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성 문제는 국제적 노동 분업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피박이 페미니즘, 맑스주의 및 포스트식민 연구에 상정한 의미심장한 의제이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속의 여성이라는 문제틀은 역사지리적 정치적 불연속성들을 주체성 구성에 강력한 결정항으로 끌어들이면서도 포스트모던, 후기 식민 시대의 남성-지식-권력의 문제를 천착하게 한다. 스피박이 맑스주의나 페미니즘, 인문학 담론에 이해관계와 가치평가의 문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을 텍스트로 삼아 명명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독해되지 않는 영역에 이름을 붙여 세계를 부여하고 구획하는 일이다 worlding by wording. 명명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각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기획과 같이 갔다. 권력이란 대상의 포획이기 때문에, 대상의 파악인 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루/공모/야합의 관계를 지닌다. 재미난 점은 언제나 그 파악과 포획의 망을 빠져나가거나 넘쳐나는 잉여/초과/잔여left-over의 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세상에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담론의 촘촘한 망을 새어나가는 지점들이다. 그리하여 연구 대상이란 연구의 결과물인 지식을 언제나 초과하기 마련이며 그리하여 이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스피박이 해체를 유용한 방법론으로 차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스피박에게 이러한 누락/잉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지점이 바로 젠더화된 서발탄/하위주체 여성이다. 달리 말해서, 어떤 이론이든 인지적 실패는 모든 이론의 심장부에 도사리고 있으며, 담론의 인지적 실패는 여성 문제 (여성의 대상화, 여성의 도구성)에서 가장 적나라 하게 드러난다. 구하를 주축으로 서발턴/하위주체를 연구해 온 <하위주체 연구회>에 대해 하위주체 연구의 작업 내부로 들어가 "그 내부로부터 결을 거스르려는"(432)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스피박이 이 연구회를 거론하는 것도 바로 이 연구회의 인지적 실패지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하위주체 연구회>는 착취와 지배의 틀로 하위주체를 논하면서 쁘띠 부르주아의 사심없는 객관적, 보편화하는 연구를 깨버리는 훌륭한 지점이 있긴 하지만, 하위주체의 의식을 실증주의적으로 확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하위주체 연구의 인지적 실패지점을 드러낸다. 즉 이 연구회 역시 이론, 역사 기술의 체질적 모순을 노정하는 바, 그 모순이란 "주체와 검토대상 사이의 공모성"(441)이라는 것이다. 이런 틀에서 볼 때 <하위주체 연구회>는 하위주체의 관점, 의지, 현존이 이 연구회의 역사 서술 기획에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이론적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라 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위주체의 의식을 결과적으로 투명한 것으로 보는 우를 범한다.
스피박의 논점인 주체와 연구 대상 사이의 공모성은 여성 하위주체에게서 잘 드러난다. 스피박에게 여성 하위주체는 "역사가 논리로 서사화되는 지점들에서 불가피하게 절대적 경계로서"(418) 드러나는 환원불가능한 이질성을 의미한다. 불연속성과 이질성에 대한 열린 사유를 촉구하는 스피박은 1) 하위주체 연구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여성이며, 2) 의식이나 주체를 가정하고 (여성) 하위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하위주체의 지속적 구축 작업을 지속시키면서 결국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학식과 문명의 이름으로 뒤섞어 버리는 제국주의적 주체 형성 작업과 밀착되고 말 것이라 경고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남성, 급진) 이론에서 여성문제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제도로 취급되며 따라서 변혁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는 <하위주체 연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연구회가 하위주체의 주체성이나 주체입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도구로서 여성이라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물론, 여성의 주체성에 이렇게까지 무관심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434). 또한, 더 절박한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가부장제 구조들과 초국적 자본주의 사이의 공모 때문에 국제노동분업의 현 형상화에서 패러다임적 주체가 되는 것은 도시 하위프롤레타리아 여성이다"(437)라는 점이다.
여성이 언제나 은유로서만 동원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여성의 도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바로 포스트식민 시대의 민족주의 담론과 운동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두 편을 영역하여 이 책에 수록한다. 데비의 소설을 통해 여성 하위주체의 문학적 재현을 거론하면서 스피박은 민족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본질주의와 계급지상주의적 발상을 비판한다. 또한, 젠더화된 하위 주체에 착목하는 데비의 두 편의 소설은 다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3세계는 정치적 독립 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매진했지만, 이러한 탈식민화 과정 역시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과 무관하지 않게 진행되어 왔다. 여성은 국제적 노동 분업 상황에서 가장 열악한 희생자들로서, 식민지배-정치독립-신믹민화라는 복잡한 재배치, 경제적 담론적 치환에서 여전히 도구로서만 활용되고 있다. 계급으로서 여성이나 하위주체들의 의식은 동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상 재현/대표불가능한 누락과 잉여의 지점들을 수반하는 이질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가상적인 동질성에 근거하여 자명한 민족주의적인 의식이나 맑스주의적인 계급의식 대신 스피박은 제3세계 여성 하위주체와 계급의식을 명목론적인 것으로서, 주체-효과로서 읽어낸다. 또한 언제나 부단하게 이접과 중첩이 일어나는 불연속성들의 망 속에서 데리다가 개념화한 차연의 구조로 작동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해체 페미니스트답게 본질주의적 가정과 근거들을 해체하면서도 하위주체, 제3세계 여성 주체를 대안적인 단일체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위주체에 대한 스피박의 연구는 뚜렷하게 재현되지 않고 무엇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중multitude이야말로 역사를 만들어내는 비가시적인 세력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모호함과 난점을 하나의 징후로 독해하면서, 대표representation라는 발상에 근거한 이러저러한 저항 형식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 미국에서 널리 번지고 있는 포스트식민 연구의 주요 흐름들을 경계한다.
마지막으로, 스피박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논지들이 어디를 지향하는지는 그녀의 글들이 "난해한" 만큼이나 모호한 구석도 없지 않다. 제국과 제3세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면서도, 점점 가중되고 있는 제3세계에 대한 물질적 착취 형식들을 교묘하게 위장, 은폐하고 있는 제1세계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해체적 치환으로만 맞설 수 있는 것일까? 또한 특정 담론으로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고 다 포착되지 않는 경계이자 한계로서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사유하는 가운데 여성의 육체적 경험을 연구하고 재전유하는 작업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