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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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라면 블로그에 쓸 일기란 쓰는 이 편에서는 '내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를 추구허는 가장 적나라한(revealing) 형식이고 읽는 이 편에서 보자믄 '그래 너의 그 은밀허고 사적인 부분이 대체 무엇이다냐'를 '정동적 관음증'을 팍팍 발휘함시롱 엿볼 수 있는 재미난 장르이다. 하여 일기란, 글쓰기의 '공적인' 형태치고 그 형식이 얼마나 파편화되었던지 간에, 일기 쥔이 펼쳐 보이는 (무덤처럼 장엄하고 무거울 수도 있는) "중차대헌(grave) 정체성 문제"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플라스는 이 700페이지가 넘는 지면 내내 '내가 누구더라?'를 되묻곤 헌다. 플라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쓰며-사는 삶"(living-writing life, 231)인데, 이 점은 그녀가 캠브리지로 도바리 쳐 유학을 허던 시절부터는 더욱 뚜렷혀진다. "가장 나쁜 것,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글쓰지 않음시롱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437). 아주 무거워 심각한 우울에 빠지곤 헐 때마다 "글쓰기야말로 나의 건강"이다라고 플라스는 쓰고 있다 (523). 왜 그래쓰꺼나?

딸들에겐 자기 엄마와의 관계가 자신의 삶에 핵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라는 것이 미국 현대 여성 문학들이 줄곧 보이는, 중량감있는 주제들 중 하나다. 

플라스는 자신의 정신분석상담의사인 루스 베우셔와 함께 "나의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글쓰기야말로 엄마의 대체물"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사이비) 프로이트적 틀을 가동시켜보믄, 플라스 자신이 일기에서 적고 있는 대로, 그녀는 아버지의 상실을 "애도"함시롱 그것을 엄마탓으로 돌리고 심지어 그 땜시롱 엄마를 열라리 미워헌다 (433; 447). 그 다음으로, (플라스가 죽고 난 직후 몇 년간 열라 유명한 시인이 된) 테드 휴즈를 자신의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아버지와 동일시함시롱 그를 "자기 아버지의 대체물"로 삼는다 (447. 여기서 우리는 그 뻔한 남녀상열지사가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데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딸들은 아버지의 딸들이어야 허지 어머니의 딸들이어선 안 된다). 

플라스도 실제로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을 읽고서 자기 상담의에게 자기가 왜 이런 우울증(depression) --결국 이 우울증은 결국 자살로 끝나는디-- 에 고통당허는지를 스스로 설명헌다. "엄마에게 전이시킨 살인시렵게 겁나는 충동을 나 자신에게 옮긴 겁니다. 프로이트가 '뱀파이어'라는 은유를 동원하야 말헌 '자아를 고갈시키는 것'(draining the ego)지요. 이것이, 이제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약해진 엄마를 봄시롱, 글을 쓰는 중에 느껴 온 감정입니다" (447). 

 플라스에게 글쓰기란, "상실된" 사랑의 대상에 좀더 가차이 갈 수 있게 혀주는 "우울증적 합체"로 기능헌다 (프로이트적 틀에서, "우울증적 합체"란 대상의 상실을 긍정함시롱 동시에 부정허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자기 안에 내면화허는 심리 메커니즘인디, 이것을 "훔쳐다가" 쥬디스 버틀러는 우리의 젠더화된 --특히 이성애중심적인-- 문화가 어찌해서 멜랑콜리에 기초헌 문화가 되는지를 설명헌다.

이 "사적인" 일기를 보면 여성으로서 플라스의 내면이 잘 보인다 

내가 보기엔 플라스가 "상실혔다"는 사랑의 대상, 그리하야 평생에 걸친 탐색(quest)의 바로 그 대상은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사랑허지 않는다. 이것은 스스로 시인헐라니 다소 쇼킹헌 점이다. 나에게는 우리 엄마가 지닌 이기심도 자아도 없는(selfless) 사랑의 그 어느 것도 없다. . . . 내가 겪는 최대의 트러블은 나의 기본적이고 에고이스틱헌 자기애에서 나오는 것인디, 고것은 바로 질투다. 나는 남자덜을 질투헌다. 고것은 능동적이고자 하되 수동적이거나 듣기만 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하고자픈 욕망을 타고난 것에 대한 선망이다" (98).

플라스 역시 엄마에 대해서 양가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엄마를 자기 존재의 기원이자, 현재의 자기 자신과 직면하기 위해서 풀어야할 매듭이면서도, 동시에 '엄마처럼은 살 수 없는' 의(지와)욕(망)을 버릴 수 없는 것. 
 
그래서 플라스의 저널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은 이런 식이다. 스스로가 되고 스스로를 발견허고자 "건설적으로 생각허고 작업하라" 그리하야 스스로 나름의 내적인 삶과 사상을 건설하야 능동적인 여성 작가/행동인으로서 스스로를 이 세계 속에 집어 넣으라. 그녀는 자신이 천착하는 토픽,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어삼켜 모조리 태워버리는 주체인 글쓰기로 수천번이고 되돌아간다. 필요허다면 천만번이고 수정하라. 예술이란 "방법화된 자연"(methodized nature)이니 허는 신고전주의적 훈련을 곁들여. 
 
글쓰기는 그녀를 "몰아부치는 야심"(driving Ambition, 495)의 근거이자 바탕이요 그렇기 땜시롱 이따금씩 자신의 시적 무능력에 대한 씰데 없지만 꼭 찾아오는 불안, 그리고 이것이 몰고 오는 실존적 무의미성에도 시달리기도 헌다. 이런 불안은 정확하게 젠더화된 현실과 관련된 바,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여러 번 거절당허곤 혔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사회적 인정에의 접근권과 기회가 적은 젠더화된 현실에 격렬한 분노지심을 폭발허는 대목 (예컨대 하나만 인용해 보겠다. 다음은 19세 시절에 일기에 끄적거린 대목: "왜 여성은 감정의 수호자, 아이들의 보호자, 영혼, 신체, 남성의 쫀심의 양육자라는 입장에 파견되어야 한단 말인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나의 끔찍헌 비극인 게다"[98])은, 식수와 클레망이 말허는 '새로 태어난 여성'이 왜 히스테리로 무장헐 수밖에 없는가를 절절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허다.  


 그러니 플라스가 자신이 혹여 글을 쓰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닌가허고 끊임없이 촐싹대는(restless)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그녀는 출판사와 잡지사들에서 "아무런 편지가 오지 않아" 실망의 구렁텅이에 종종 빠지기도 하고,  집안일을 하느라, 자기 남편 테드 휴즈의 시를 타이핑혀주느라, 생계를 유지허기 위해 시간강의 등의 일을 허느라  시쓰는 일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노심초사허기도 헌다. 그 뿐이랴. 혹여 자신에게 글쓰는 재능이 없다면 미래에는 멀 먹고 살것인가 허는 생계도 은근스레 걱정거리다. 하여 그녀는 일해서 돈을 벌라믄 박사학위를 가져야 허제라는 생각도 헌다.

 플라스 자신의 열에 들뜬 자기 초상을 보노라면, 그녀가 왜 그녀 이후세대들과 동료들에게 소위 '억압된 여성 창조성'의 화신으로 추앙되는지를 눈감고도 이해헐 수 있다. 이 저널을 보면 작가를 '천재'로 보는 낭만주의적인 신화를 산산이 때려부순다. 그녀의 글쓰는 셀프에는 혹여라도 창조적으로 글을 쓰지 못할까하는 불안들과 번민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만큼이나 창조적으로 글을 쓰고자 허는 강렬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불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워 해본 적이 있는 이라면 이 저널은 분명히 '위안'이 될 텐데, 글쓰기란 (저 화려하게 추락한,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후까시를 떰시롱 말헌) "강력한 감정의 자생적인 범람"도 아니요 "고요 속의 기억"을 통해서 나온 것도 아니다. 

플라스의 글쓰기는 젠더화된, 불안정한, 모순적 자아를 불안과 열망에 들떠 그러나 솔직허니 바라본 바의 표현이자 끊임없이 미친 듯이 읽어대는 한 율리시즈("a reading ulysses" 100)의 읽기에 바탕한 것이요 다른 동료들(예를 들면, 애드리안 리치)의 낙서와 글들을 열라리 뒷조사꺼정 함시롱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험한 작업에 기초한 것이기도 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블로그 눈팅이 지닌 상호교육적, 정서적 효과를 알 수 있다)

플라스의 저널을 통해서 보자면, 너무나 젊은 나이에 여러 복잡한 사정과 우울증으로 자살해 간 플라스에게, 글쓰기란 끝내 풀지 못한 엄마-딸 관계, 그로 인해 계속 엉키기만 하는 테드 휴즈와의 결혼 생활, 그 속에서 시들어가는 여성 자아를 일상적으로 애도함시롱, 가부장제의 여성 재능 억압에 맞장을 뜨는 개인적, 정치적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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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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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을 변별적이며 때로 사안에 따라서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주체-입장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대신, “여성”과 같은 변별적인 집단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를 심문하면서, 예컨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혹은 “여성들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관념을 철저히 반대하는 버틀러는 초기 작업의 주요 천착지점이기도 한, “제2의 성”으로서 단일체인 여성 개념의 해체가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주체[즉 여성]을 해체한다고 해서 그 단어의 사용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과 같은 용어들/개념들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자는 것이다. . . . ‘행동교섭능력’(agency)과 같은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역설적으로, 여성들이라는 범주를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놓을 때이다.”

버틀러는 의미, 개념, 정체성, 주체성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면서 재의미화(resignification)하는 실천을 행동교섭능력으로 정의한다. 버틀러 식 재의미화 실천은 몸, 젠더, 섹스에 관한 재개념화이기도 한데, 버틀러는 이러저러한 정체성보다는, 사회적 규범들과 헤게모니가 몸에 아로새겨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버틀러에게 몸은 수동적인 구성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인, 개인적인 힘들이 투쟁하는 지점이자,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 반복을 통해서 그 규범들의 물질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성차는 “경계 개념”(border concept)이다. 경계 개념으로서 성차는 “육체적(somatic), 심리적 사회적 차원들을 지니며, 이 차원들은 결코 서로 겹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궁극적으로 변별적인 것도 아니다.” 1980년대를 사로잡았던 구성주의 대 본질주의 논쟁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교착 상황에서 제출된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및 수행적 주체 개념은 “본질”이든 “구성”이든 고착화된 (여성) 정체성 문제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매우 해방적인 개념으로 다가왔다.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에서 보자면 <중요한 물질인 몸>(1994)은 담론중심적 전환을 매우 확실하게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의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이 책에서 버틀러는 “섹스에 부과되는 담론적 한계들”을 강조한다. 형이상학의 토대인 실체(substance)를 거부하는 버틀러는 우리의 몸은 사회적 규범들이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물질화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몸의 물질성이란 오히려 구성되는(constituted) 것이고 성취되는(achieved) 것이다. 섹스란 사회적 규범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섹스는 규율적인 실천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섹스란 “하나의 규율적 이상”(ideal)이기도 한데, 섹스는 훈육적(disciplinary) 권력과 규율적(regulatory) 실천들을 통해서 그 규율적 이상이 특정 (종종 헤게모니적이고 이성애적인) 방향으로 물질화되도록 하는 규율적 이상(ideal)이다. 이상으로서 규범이란 규율적이다.

버틀러의 젠더, 섹스, 몸 재개념화 작업이 지닌 (담론적 영향과 파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와 윤리적 함의에서 보자면,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주체는 담론의 매개에 의해서만 구성되며, 젠더는 “수행적”인 것이지만 담론이 부과하는 한계들에 내에서 수행되는 그런 “하기”(a doing)이다.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성차화된 몸에 부과되는 한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론적이다. 즉, 몸이든 섹스든 젠더든 정체성이든 담론적으로 구성된 경계들에 의존하지 않는 지시대상은 없다. 모든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매개되는 것이며, 주체(성)는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 이로부터 버틀러는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을 “지속적인 개방성과 재의미화가능성”으로 정의한다. 즉, 담론 안에서 담론을 통해서 생산되는 주체는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속에서 발언함으로써 행동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은 재의미화 실천, 즉 언어적/담론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정치와 윤리에서 중요한 항목들인 자기결정, 선택, 책임성, 자율성은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때문에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수많은 이들의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윤리 철학자인 세일라 벤하비브는 버틀러가 주체를 언어의 단순한 효과로 환원하였으며, 적극적 의지, 윤리적 의도, 자기성찰성, 자율적 자아 등을 와해시켜버린다고 비판한다. 벤하비브가 보기에, 주체가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다는 버틀러의 주체관은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여성들에게 힘과 권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목적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주체의 행동교섭능력 자체도 담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버틀러는 <중요한 것은 물질인 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행동교섭능력이란 “기표 안에서 기표에 의해서 구성되는 이중의 움직임이며, 여기서 ‘구성된다’는 것은 그 기표 자체를 ‘인용하거나 반복하거나 모방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버틀러에게 행동교섭능력이 가능해지는 조건은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들을 다시 실행하고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다. 또한 행동교섭능력이란 “담론이 갱신되는 국면들에서 정확하게 발견된다.”

기존의 권력 관계 담론들의 제약과 법칙들 속에서 작업함으로써 이러한 담론들을 재의미화하고 새로운 전복지점들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전복이란 언제나 내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에게 내부는 현실의 권력관계들이라기 보다는 담론의 내부다. 또한, 담론 내부의 과정에서 발휘되는 행동교섭능력이란 그것을 발휘함으로써 차후에 따라 일어날 행위들의 원인도 아니고 주체의 역능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담론적 조건들의 효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 것인 주체로 하여금 권력 관계의 전복을 시도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주체는 재의미화를 시도하는가? 주체도 재의미화도 담론 안에서 생산되고 갱신되는 효과들이라는 버틀러의 개념틀은 이런 질문을 묻게 만들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1997년 저작 <권력의 심리적 형식>은 주체가 왜, 어떻게 헤게모니 담론들에 저항하고 전복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한 버틀러 나름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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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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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미나게 읽은 책 중 하나. 저자의 다음 책이 무엇일지 또한 무척 궁금하다. 

2005년에 출판된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당하면서도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상처가 되는 경험들에, 우리 역시도 자행하는 미시적 폭력에 대해 성찰적이고 해방적인 언어, 해방의 언어, 다른 사유를 선사해주는 책이다. (상황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익숙한 지배적인 관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책. 

여성의 전화에서 10년 넘게 활동해 온, 성폭력 문제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여성학자인 정희진은 그녀의 이력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현장, 실천, 운동 대 이론, 공/사, 정치/사생활의 "경계를 깨는 것"을 운동으로 삼는 활동가이자 분석가이다. 그녀의 논의를 통해서 '진보,' '변혁' 개념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시 급진화된다. 물론 밀착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들러붙는다). 소위 (자칭) '진보'진영이 여성운동을 향해서 보이는 여러 가지 윽박지르기들(예컨대, 진보/혁명/민족이 먼저냐, 여성이 먼저냐는 자지중심적 헛삽질)의 비논리성, 뿌리깊은 남성중심성을 밀착해서 파고드는 저자는 여성을 영원히 피해자로 고정시켜 놓고서 '진보'정치에 동원해 먹는 '진보성'을 심문한다. 이러한 사이비 진보성은 여성들이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희생자, 피해자이기를 욕망한다 (39). 말할 수 있는 권력은 남성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런 날강도같은 주장의 역사가 수천년이라면 그 누구도 이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 . .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 . .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40-1).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협상의 도구로서 여성주의는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70)이며, 주변화된 타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윤리와 정치학이자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67)이다. 여성의 몸과 경험에 기반한 유물론적 정치학으로서 페미니즘.

 "한국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촘촘하게 실행되면서도 "그 까짓꺼"하고 무시하도록 훈련시키고 강요하는 성정치학의 작동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사회 변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거대 서사들은 좌초한지 오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자는 일상을, 평범한 삶의 문제들에 천착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여진 이 책의 다양한 논의들을 따라가다 보면, 왜 우리 사회의, 확장하자면 20세기의 (실패한 혁명들을 포함한) '진보'가 언제나 파편적인 것(즉 남자들끼리의 권력투쟁에만 머무르는 '변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머리는 변해도 몸이 구태의연한 탓이다. 20세기적 '의식화'의 한계랄까.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면서 자기 자신은 그 변혁에 저항한 것이다. 저자 말로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를 못한 것이다. 


페미니즘과 소수자들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된 소중한 통찰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변태"의 핵심은 자기변화(self-transformation)이며,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279). 남을 억압하면서 혁명을 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하여, 저자에게 페미니즘은 "우리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매력적인 참고문헌"(26)이며, 끈질긴 비판이 몰고오는 생산적인 불편함을 신진대사적으로 소화해 내는 행위이자, 그 결과 차이들, 복잡성, 내 안에도 중층결정적으로 착종된 타자들이 주는 상처에 끊임없이 취약해지는(vulnerable) 것이다.  안다는 것,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종종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전까지라면 못보던/안보던 것들을 보이게 한다. 부정의 경험,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하는 철학(인식)-윤리('변태'행위)로서 페미니즘. 

"변태"하며 유목하기: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내는 권력과 남성지배 기제들을 보다 정합적으로 분석하고 여러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성과들 중 하나다. 정희진 역시 구체적인 물적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 여성들 역시 차이를 띠기 마련이며, 다른 운동들이 그러하듯 여성운동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방식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여러 (집단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을, 사안이나 관계성에 따라 복수적인 입장을 띠는 한 개인들이기도 한 여성들을 싸잡아 "여성"으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억압이라고 일갈하는 저자에게, 예컨대, 정체성, 진보, '운동'이란 경합에 열린 대화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보편으로 화하지 않는 특수, 차이들을 구체적으로 맥락화하고,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즉, 보편화, 동질화, 자연화, 민족화가 주는 편안한 '순수'나 (알고보면 사이비인) '본질'보다는,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소통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는 횡단의 정치를 추구하자는 것(20).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이라는 정희진판 페미니즘의 핵심에는 인식론적 투쟁이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심장부를 차지한다는 온당한 인식이 있다.

구닥다리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정황적 지식들"과 복잡성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가는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즉, 물질적, 제도적 사건들, 투쟁들과, 상징적 혹은 비가시적인 효과들을 텍스트 삼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넣어 다른 의미들과 가치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관계성의 양상들을 유통시키는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은유로서 모성, 아줌마가 폄훼적 용어로 쓰이는 맥락과 성정치적, 사회적 함의, 말과 성차별, 여관의 성경제학,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다이어트와 섹스, 진보 및 인권이라는 의문스런 개념들,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여성으로서 늙는다는 것, 군사주의 등 각각의 분석'텍스트'들은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다르게 보았을 때, 다른 의미들을 드러낸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다름 아닌 폭력이었으며, 폭력이 권력으로 둔갑하는 것은 남성지배에 유리하게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인식-권력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는 것. 성, 젠더,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 나이 등이 사회적 의미와 가치들을 규정하는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남성)권력의 복잡하고 미세한 작동 네트워크를 포착하는 또 다른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은 지배적인 의미들을 생산하는 주조틀을 비틀고, 넘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우는 뻐꾸기 마냥 권력 네트워크 안팎에서 지배적 의미망들에 균열을 내고, 다른 의미들을 산출하고 대안적 세계관들을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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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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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럽의 식민주의를 경험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탈식민주의의 선구적인 책이지만, 우리는 이 책의 구체적 역사적 맥락을 확장하여, 피지배집단은 왜 자신들을 억누르는 지배에 동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 책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적) 억압repression은 외부로부터 오는 탄압oppression과는 달리 자기생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흑인들의 경우, 벗어나기 힘든 열악한 물적 조건과 인종차별적 세계와 그러한 세계관의 영향하에서 흑인들은 자기 부정, 검은 육체에 대한 수치심, 자기비하, 무력감, 백인에 대한 선망과 증오(라는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양가적 감정), 공격적 성향 등을 내면 심리에 키우게 된다. 파농이 더 무서운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식민적) 탄압 자체 보다는 탄압 속에서 파생하기 마련인 (자기)억압과 그로 인한 자기 부정인 것 같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장 정교한 가면도 그 타고난 피부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비록 그 가면이 타인들의 눈을 보기좋게, 완전하게 속였다 할지라도. 파농은 흑인과 백인의 조우(인종차별주의에 기반한 식민화라는)를 통해서 흑인들(특히 앙틸레스 흑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검은 피부를 부정하며 하얀 가면 (백인에 대한 선망, 동일시를 통한 정신적 표백. 앙틸레스 흑인들은 정신적으로 백인이다)을 자기의 피부인양 오인하게 되는가, 그리고 검은 피부(부정할 수 없는 육체), 하얀 가면(백인화된 정신, 세계관)의 불일치속에서 드러내는 그들의 심리를 파헤치고 있다. 파농은 흑인문제를 인종갈등으로만 보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심오한 탁월함이 있다. 흑백 평등을 주장하는 열변과 그 투쟁만으로는 개선되지 않는 그 무엇에 파농은 주의를 집중한다. 왜 그랬을까?

지배와 착취로 점철된 경제적 사회적 흑백관계는 피지배자요 피착취자인 흑인들에게 비참한 생활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열악한 물적 조건이란 인간 개인의 심리를 구조화하는 위력을 갖는 법. 이 위에 문화와 교육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열등한 것, 혹은 비존재non-being, 무인no-man으로 규정당한다면.....    


파농은 흑인들에게서 보이는 존재의 소외, 연속적인 정서적 탈선과 열등콤플렉스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흑인의 삶은 이중적으로 왜곡된다. 첫째는 경제적으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즉 열등감의 내면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중심테제다). 파농은 흑인문제에 관해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의 제일 근간은 경제적인 것, 물적인 조건임을 먼저 분명히 하고 있다: "흑인이 자신의 소외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적 경제적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파농이 시종일관 유물론적 시각과 토대에서 흑인들의 (정신병리적) 심리를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학자들 (예컨대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의 저자인 마노니)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유는 그들의 흑인들의 삶과 심리에 대한 훌륭한 분석을 제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토대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파농은 흑인들의 심리를 정치하게 분석해 낸다. 이 책의 1, 2, 3장은 동시대 흑인들이 백인 세계에서 취하는 태도에 관한 분석이고, 4, 5장은 식민성과 흑인성, 그리고 마지막 두 장에서는 흑인들의 존재 상태에 대한 병리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정신병리와 인정투쟁)이다.  

이 모든 분석은 진정한 인간 해방(!)을 향하고 있다. 모름지기 인간 해방이란 인간들 자신의 존재 조건, 즉 외적이고 내적인 존재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만 한다.  유물론 만세!). 20세기는 외적, 즉 물적 조건에 대한 이해만을 기반으로 한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러저러한 물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내면 심리, 그 구조에 대한 자기 이해, 파농이 시도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해방을 향한 전제 조건은 자기 이해에 기반한 내적 해방이다. 그런데 이 내적 해방이 모든 해방의 형태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어떤 적을 겨냥하는) 자유를 향한 투쟁은 상당부분 헛수고가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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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서 - 문화정치학 에세이 여이연이론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스피박 읽기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스피박의 글들을 대체로 문학 비평, 맑스주의, 해체,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구체적인 이론적 관심사들에 대한 개입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각 글들이 놓인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가능하다. 『다른 세상에서』는 스피박이 1977년에서 1985년 사이에 여러 심포지엄, 컨퍼런스, 학회지에 발표한 글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인데, 스피박은 자신의 글이 제1세계 지식인들을 상대로 발표되는 각각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누락/생략/잔여/초과/잉여의 지점들을 거론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텍스트화함으로써 동질화되어 봉합되는 지점들을 다시 해체한다. 동시에 제1세계 지식인들을 상대로 대항담론을 펼치는 자신 역시 지식인으로서 늘 지식-권력의 공모관계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하며 자기 글에서조차 자기 비판을 수행하기 때문에 스피박의 글은 읽기가 더 한층 어려워진다. 스피박의 데뷔작인 이 책은 스피박이 미국의 학계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백인중산층 학자들을 상대로 하여 글을 썼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부산하게 전지구적인 재배치를 끊임없이 단행하고 있는 자본은 문화와 첨단/급진 이론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진보'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유통시키는데 너무나 성공적이며 그럼으로써 부익부빈익빈의 강철진용을 재구축한다. 이런 판단하에 탈식민주의 논의들은 제국의 텍스트들을 분석하고 그 서사구조와 내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제국의 담론을 되받아치는 행위로서 글쓰기 혹은 언술행위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메트로폴리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식민화에 맞서서 문화적 혼종성에 착목한다. 제3의 공간 혹은 안-사이 공간이 열어주는 가능성, 흉내내기와 틈새전략으로 균열적 해체적 읽기, 협상과 번역의 중요성 등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의 배경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혼합되어 있다. 맑시즘은 탈식민주의의 유용한 출발점이자 가장 든든한 이론적 원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 문화연구 등이 탈식민주의의 저항 전략에 동원된다. 예컨대, 바바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신분석학이, 스피박에게는 맑시즘과 해체, 페미니즘이, 부활한 프란츠 파농에게는 헤겔과 프로이트가, 사이드에게는 푸코와 그람시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한마디로, 문화의 혼종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의 혼종이 이루어지는 장이 탈식민주의의 장이다.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는 권력 관계란 늘 불균등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억압적 지배 사회 속에서 주변화되어 온 "타자들"을 복원하는 것을 공통 목표로 삼아 왔다. 이들은 포스트구조주의와 맑시즘의 통찰을 수용하면서, 젠더/인종, 가부장제/식민주의의 위계와 이항대립을 거부하고 전복시키려 한다. 그런데, 젠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면 탈식민주의 역시 심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피지배자와 지배자를 주체의 층위에 상정하는 "혼종성" 개념 역시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경험을 지닌 인종만이 강조될 뿐이지 않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레토릭을 들고 나타난다. 스피박을 위시하여 찬드라 모한티, 아니아 룸바, 사라 술레리 등의 소위 제 3세계 여성 문제에 천착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탈식민주의 논의는 젠더 문제를 무시하거나 늘 부차적인 것으로 상정하는데 그쳐서 제3세계 여성이 겪는 이중, 삼중의 식민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인도 태생의 탁월한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 석좌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스피박은 해체를 통해서 탈식민주의, 맑시즘, 페미니즘 이론에 생산적 위기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은 여성 이론가이다.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의 발흥을 전지구적인 자본 재배치라는 현재적 조건 속에서 고찰한다. 포스트식민 연구의 주요한 한 흐름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기반한 식민주의 담론들에 비판과 수정을 가하며 과거를 재검토하는데 전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자신 역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인 그녀의 이러한 이론적 출발점은 (굳이 그녀가 페미니스트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독보적이다. 즉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에서 탈식민을 향한 분석 및 이론들을 제출해 왔고 그것이 서구 학계에 미친 정치적, 지적 파급 효과가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의 제도적 산종이 전지구적 자본 지배에 유리하게 공모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스피박의 인식은, 식민주의 사고의 잔여물들과 싸우는 포스트구조주의적 포스트식민주의 전략들이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전지구적 지배 전략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론가의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과 직결된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에 포스트-이즘들이 공모 관계를 가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지배에 대한 이론의 공모성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다른 세상에서}는 3세계 출신으로 제 1세계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스피박 자신 역시 지식-권력 혹은 지식-지배의 공모 관계에 빠질 수 있다는 저자의 주체 입장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타자 담론들과 탈식민담론들이 (제3세계보다는) 제1세계에서 인기리에 포섭, 유통되는 정치적 저의와 정치적 효과에 대한 개입적인 성격이 강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포스트식민" 상황은 탈식민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1970, 80년대에 여성학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적인 것이 분과학문에 흡수됨에 따라, "제3세계적" 혹은 포스트식민주의 관점의 분석 및 기술이 90년대 들어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스피박은 주변적인 것이 제1세계의 분과학문에 속속들이 흡수되는 것은 서구문화의 교묘한 위기 관리 방식이며, 이러한 문화적 위기 관리는 지식의 제도적 산종이라는 형태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즉 주변적인 것을 담론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 (즉 주변적인 것을 텍스트화 하는 것)은 지배 욕망 및 지배의 정치학과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스피박은 포스트식민 연구 역시 "주변성"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구성하는데 있어 배타주의적이라고 진단한다. 제도적 학문으로서의 타당성과 확실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3세계," "주변"이라는 새로운 (이론적) 대상의 구성에 연루된 이론가들은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범죄와 공모관계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주변을 명명하는 용어인 "제3세계"나 "주변성"이라는 딱지를 스피박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이 책에서 이론의 중립성 주장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읽어내고, 내러티브가 쓰여지게 되는 근저의 욕망을 훑어가며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들을 제시한다.

"주변"이나 "제3"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바로 중심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스피박은 이 책에서 지식을 통해 합법화되는 비평가의 지배욕망이 어떻게 남성중심성을 은근슬쩍 가리면서 교묘하게 만족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녀는 문학 비평, 맑스주의 이론, 역사서술 등 그 어느 분야이든지 간에, "여성의 대상화라는 전체 문제틀"이 얼마나 뿌리깊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척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균일화하는 독법에 맞서 스피박은 코울리지, 단테와 예이츠, 울프, 워즈워드를 주체의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자서전으로 읽어낸다. 스피박에 의하면, 논리상 약점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아포리아의 출현을 그 근본에서부터 허용하지 못하는 남성중심적 주류 (문학) 비평을 추동하는 욕망과 그것의 내재적인 논리 속에서 여성의 욕망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항상 남성들을 가장 투명하게 매개해주는 형상으로 이용될 뿐이다. 스피박은 이런 식으로 변함없이 작동하는 암묵적 전체틀을 성, 계급, 인종 문제에 민감한 다양한 독법을 통해 해체하면서 위계화와 중립화가 교묘하게 동시에 일어나는 비평에 해석학적 가치의 문제를 재거론한다.  

 비평이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이론가, 비평가들이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되는 함정, 곧 스스로를 자신이 분석하는 텍스트의 심판관으로 앉히고 자신들의 가치를 가늠하는 그 고뇌에 찬 거만함에서 잘 드러난다. 남근을 제거하는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언제나 남성을 입법자로 다시 세우는 쪽으로 여성을 뿌리깊이 착취하는 행태에 맞서 스피박은   "독자로서 각자 회피하기 쉬운 역사적-정치적-경제적-성적 결정항"(54)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스피박은 음핵담론 분석을 제안하고 자궁선망을 거론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스피박이 거론하는 자궁선망이 단순히 음경선망에 대항하려는 유치하게 도발적인 말놀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피박은 프로이트와 맑스의 문제틀 내에서도 회피되고 있는 "생산 장소"로서 자궁을 개념화함으로써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사회의 생산에 상호작용하는 결정항으로서 자궁선망을 (음경선망과 함께) 말한다. 즉 자궁과 음핵을 생산과 실천의 모든 영역들, 역사와 정치에서 일어나는 여성 억압의 지표로 재개념화하면서 스피박은 맑스주의의 젠더 맹목성과 프로이트의 남성중심주의, 더 나아가 핵가족 중심의 정신분석학적 성적 주체성 형성 이론을 비판한다. 그녀는 또한 핵가족 모델 비판에 수반되기 쉬운 공동체나 대안 가족 형태에 대한 낭만화 역시 경계한다. 

중심/주변을 해체하려는 스피박의 기획은, 다문화주의라는 깃발 아래 제국의 거대도시들에서 일어나는 의도적인 포괄의 정치는 다름 아닌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이며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에 의해 신식민 혹은 재식민, 후기 식민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은폐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획에는 스피박 스스로 자기 이론의 준거틀로 삼고 있는 이론들(페미니즘, 맑스주의, 해체, 정신분석학) 역시 심문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문학자와 이론가들을 자본의 디스크 자키라 비꼬는 스피박은 오늘날의 맑스주의 역시 국제적 노동 분업을 고려하지 못한 채, 위기 관리로서 제국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이 여전히 작동중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이론화 작업은 실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를 끔찍할 정도로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실이란 없으며, 진리로 유통되는 해석들 역시 정치적이다. 이런 해석들에서 여성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배제된 타자라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라는 현재의 조건 속에서 제1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맑스주의 연구의 경우 이데올로기의 주체를 유물론적으로 기술하는데 있어서 가치문제를 물을 수 없다. 또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페미니즘 이론들이나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제도상의 변화들은 제 3세계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간접적이긴 하지만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맑시즘, 페미니즘 혹은 정치성을 표방하는 여하한 급진 이론 등 어떤 것이든 간에, 현재의 범지구적인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에 여러 미묘한 방식들로 포섭되면서도 동시에 배제되는,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사고하지 못하는 맹점들이 있다. 스피박은 바로 이 비가시화된 지점들을 주목하면서 최근의 국제적 노동 분업에서 가장 열악한 희생자들인 여성들, 특히 제3세계 여성들의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여실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이 불연속성과 이질성, 그리고 이것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제3세계 하부 프롤레타리아 서발탄/하위주체 여성들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인종, 계급, 젠더 문제를 지워버리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결정항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박은 역사지리적 경계와 정치적 힘들의 관계 및 작동을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불연속성들을 징후적으로 읽어내고 연구화하여 정치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점을 재삼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성 문제는 국제적 노동 분업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피박이 페미니즘, 맑스주의 및 포스트식민 연구에 상정한 의미심장한 의제이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속의 여성이라는 문제틀은 역사지리적 정치적 불연속성들을 주체성 구성에 강력한 결정항으로 끌어들이면서도 포스트모던, 후기 식민 시대의 남성-지식-권력의 문제를 천착하게 한다. 스피박이 맑스주의나 페미니즘, 인문학 담론에 이해관계와 가치평가의 문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을 텍스트로 삼아 명명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독해되지 않는 영역에 이름을 붙여 세계를 부여하고 구획하는 일이다 worlding by wording. 명명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각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기획과 같이 갔다. 권력이란 대상의 포획이기 때문에, 대상의 파악인 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루/공모/야합의 관계를 지닌다. 재미난 점은 언제나 그 파악과 포획의 망을 빠져나가거나 넘쳐나는 잉여/초과/잔여left-over의 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세상에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담론의 촘촘한 망을 새어나가는 지점들이다. 그리하여 연구 대상이란 연구의 결과물인 지식을 언제나 초과하기 마련이며 그리하여 이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스피박이 해체를 유용한 방법론으로 차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스피박에게 이러한 누락/잉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지점이 바로 젠더화된 서발탄/하위주체 여성이다. 달리 말해서, 어떤 이론이든 인지적 실패는 모든 이론의 심장부에 도사리고 있으며, 담론의 인지적 실패는 여성 문제 (여성의 대상화, 여성의 도구성)에서 가장 적나라 하게 드러난다. 구하를 주축으로 서발턴/하위주체를 연구해 온 <하위주체 연구회>에 대해 하위주체 연구의 작업 내부로 들어가 "그 내부로부터 결을 거스르려는"(432)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스피박이 이 연구회를 거론하는 것도 바로 이 연구회의 인지적 실패지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하위주체 연구회>는 착취와 지배의 틀로 하위주체를 논하면서 쁘띠 부르주아의 사심없는 객관적, 보편화하는 연구를 깨버리는 훌륭한 지점이 있긴 하지만, 하위주체의 의식을 실증주의적으로 확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하위주체 연구의 인지적 실패지점을 드러낸다. 즉 이 연구회 역시 이론, 역사 기술의 체질적 모순을 노정하는 바, 그 모순이란 "주체와 검토대상 사이의 공모성"(441)이라는 것이다. 이런 틀에서 볼 때 <하위주체 연구회>는 하위주체의 관점, 의지, 현존이 이 연구회의 역사 서술 기획에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이론적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라 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위주체의 의식을 결과적으로 투명한 것으로 보는 우를 범한다. 

스피박의 논점인 주체와 연구 대상 사이의 공모성은 여성 하위주체에게서 잘 드러난다. 스피박에게 여성 하위주체는 "역사가 논리로 서사화되는 지점들에서 불가피하게 절대적 경계로서"(418) 드러나는 환원불가능한 이질성을 의미한다. 불연속성과 이질성에 대한 열린 사유를 촉구하는 스피박은 1) 하위주체 연구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여성이며, 2) 의식이나 주체를 가정하고 (여성) 하위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하위주체의 지속적 구축 작업을 지속시키면서 결국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학식과 문명의 이름으로 뒤섞어 버리는 제국주의적 주체 형성 작업과 밀착되고 말 것이라 경고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남성, 급진) 이론에서 여성문제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제도로 취급되며 따라서 변혁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는 <하위주체 연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연구회가 하위주체의 주체성이나 주체입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도구로서 여성이라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물론, 여성의 주체성에 이렇게까지 무관심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434). 또한, 더 절박한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가부장제 구조들과 초국적 자본주의 사이의 공모 때문에 국제노동분업의 현 형상화에서 패러다임적 주체가 되는 것은 도시 하위프롤레타리아 여성이다"(437)라는 점이다.  
 

 여성이 언제나 은유로서만 동원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스피박은 여성의 도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바로 포스트식민 시대의 민족주의 담론과 운동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두 편을 영역하여 이 책에 수록한다. 데비의 소설을 통해 여성 하위주체의 문학적 재현을 거론하면서 스피박은 민족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본질주의와 계급지상주의적 발상을 비판한다. 또한, 젠더화된 하위 주체에 착목하는 데비의 두 편의 소설은 다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3세계는 정치적 독립 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매진했지만, 이러한 탈식민화 과정 역시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과 무관하지 않게 진행되어 왔다. 여성은 국제적 노동 분업 상황에서 가장 열악한 희생자들로서, 식민지배-정치독립-신믹민화라는 복잡한 재배치, 경제적 담론적 치환에서 여전히 도구로서만 활용되고 있다. 계급으로서 여성이나 하위주체들의 의식은 동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상 재현/대표불가능한 누락과 잉여의 지점들을 수반하는 이질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가상적인 동질성에 근거하여 자명한 민족주의적인 의식이나 맑스주의적인 계급의식 대신 스피박은 제3세계 여성 하위주체와 계급의식을 명목론적인 것으로서, 주체-효과로서 읽어낸다. 또한 언제나 부단하게 이접과 중첩이 일어나는 불연속성들의 망 속에서 데리다가 개념화한 차연의 구조로 작동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해체 페미니스트답게 본질주의적 가정과 근거들을 해체하면서도 하위주체, 제3세계 여성 주체를 대안적인 단일체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위주체에 대한 스피박의 연구는 뚜렷하게 재현되지 않고 무엇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중multitude이야말로 역사를 만들어내는 비가시적인 세력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모호함과 난점을 하나의 징후로 독해하면서, 대표representation라는 발상에 근거한 이러저러한 저항 형식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 미국에서 널리 번지고 있는 포스트식민 연구의 주요 흐름들을 경계한다. 

마지막으로, 스피박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논지들이 어디를 지향하는지는 그녀의 글들이 "난해한" 만큼이나 모호한 구석도 없지 않다. 제국과 제3세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면서도, 점점 가중되고 있는 제3세계에 대한 물질적 착취 형식들을 교묘하게 위장, 은폐하고 있는 제1세계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해체적 치환으로만 맞설 수 있는 것일까? 또한 특정 담론으로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고 다 포착되지 않는 경계이자 한계로서 이질성과 불연속성을 사유하는 가운데 여성의 육체적 경험을 연구하고 재전유하는 작업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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