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재미나게 읽은 책 중 하나. 저자의 다음 책이 무엇일지 또한 무척 궁금하다. 

2005년에 출판된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당하면서도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상처가 되는 경험들에, 우리 역시도 자행하는 미시적 폭력에 대해 성찰적이고 해방적인 언어, 해방의 언어, 다른 사유를 선사해주는 책이다. (상황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익숙한 지배적인 관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책. 

여성의 전화에서 10년 넘게 활동해 온, 성폭력 문제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여성학자인 정희진은 그녀의 이력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현장, 실천, 운동 대 이론, 공/사, 정치/사생활의 "경계를 깨는 것"을 운동으로 삼는 활동가이자 분석가이다. 그녀의 논의를 통해서 '진보,' '변혁' 개념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시 급진화된다. 물론 밀착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들러붙는다). 소위 (자칭) '진보'진영이 여성운동을 향해서 보이는 여러 가지 윽박지르기들(예컨대, 진보/혁명/민족이 먼저냐, 여성이 먼저냐는 자지중심적 헛삽질)의 비논리성, 뿌리깊은 남성중심성을 밀착해서 파고드는 저자는 여성을 영원히 피해자로 고정시켜 놓고서 '진보'정치에 동원해 먹는 '진보성'을 심문한다. 이러한 사이비 진보성은 여성들이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희생자, 피해자이기를 욕망한다 (39). 말할 수 있는 권력은 남성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런 날강도같은 주장의 역사가 수천년이라면 그 누구도 이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 . .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 . .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40-1).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협상의 도구로서 여성주의는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70)이며, 주변화된 타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윤리와 정치학이자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67)이다. 여성의 몸과 경험에 기반한 유물론적 정치학으로서 페미니즘.

 "한국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촘촘하게 실행되면서도 "그 까짓꺼"하고 무시하도록 훈련시키고 강요하는 성정치학의 작동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사회 변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거대 서사들은 좌초한지 오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자는 일상을, 평범한 삶의 문제들에 천착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여진 이 책의 다양한 논의들을 따라가다 보면, 왜 우리 사회의, 확장하자면 20세기의 (실패한 혁명들을 포함한) '진보'가 언제나 파편적인 것(즉 남자들끼리의 권력투쟁에만 머무르는 '변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머리는 변해도 몸이 구태의연한 탓이다. 20세기적 '의식화'의 한계랄까.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면서 자기 자신은 그 변혁에 저항한 것이다. 저자 말로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를 못한 것이다. 


페미니즘과 소수자들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된 소중한 통찰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변태"의 핵심은 자기변화(self-transformation)이며,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279). 남을 억압하면서 혁명을 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하여, 저자에게 페미니즘은 "우리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매력적인 참고문헌"(26)이며, 끈질긴 비판이 몰고오는 생산적인 불편함을 신진대사적으로 소화해 내는 행위이자, 그 결과 차이들, 복잡성, 내 안에도 중층결정적으로 착종된 타자들이 주는 상처에 끊임없이 취약해지는(vulnerable) 것이다.  안다는 것,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종종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전까지라면 못보던/안보던 것들을 보이게 한다. 부정의 경험,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하는 철학(인식)-윤리('변태'행위)로서 페미니즘. 

"변태"하며 유목하기: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내는 권력과 남성지배 기제들을 보다 정합적으로 분석하고 여러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성과들 중 하나다. 정희진 역시 구체적인 물적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 여성들 역시 차이를 띠기 마련이며, 다른 운동들이 그러하듯 여성운동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방식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여러 (집단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을, 사안이나 관계성에 따라 복수적인 입장을 띠는 한 개인들이기도 한 여성들을 싸잡아 "여성"으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억압이라고 일갈하는 저자에게, 예컨대, 정체성, 진보, '운동'이란 경합에 열린 대화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보편으로 화하지 않는 특수, 차이들을 구체적으로 맥락화하고,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즉, 보편화, 동질화, 자연화, 민족화가 주는 편안한 '순수'나 (알고보면 사이비인) '본질'보다는,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소통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는 횡단의 정치를 추구하자는 것(20).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이라는 정희진판 페미니즘의 핵심에는 인식론적 투쟁이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심장부를 차지한다는 온당한 인식이 있다.

구닥다리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정황적 지식들"과 복잡성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가는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즉, 물질적, 제도적 사건들, 투쟁들과, 상징적 혹은 비가시적인 효과들을 텍스트 삼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넣어 다른 의미들과 가치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관계성의 양상들을 유통시키는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은유로서 모성, 아줌마가 폄훼적 용어로 쓰이는 맥락과 성정치적, 사회적 함의, 말과 성차별, 여관의 성경제학,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다이어트와 섹스, 진보 및 인권이라는 의문스런 개념들,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여성으로서 늙는다는 것, 군사주의 등 각각의 분석'텍스트'들은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다르게 보았을 때, 다른 의미들을 드러낸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다름 아닌 폭력이었으며, 폭력이 권력으로 둔갑하는 것은 남성지배에 유리하게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인식-권력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는 것. 성, 젠더,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 나이 등이 사회적 의미와 가치들을 규정하는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남성)권력의 복잡하고 미세한 작동 네트워크를 포착하는 또 다른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은 지배적인 의미들을 생산하는 주조틀을 비틀고, 넘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우는 뻐꾸기 마냥 권력 네트워크 안팎에서 지배적 의미망들에 균열을 내고, 다른 의미들을 산출하고 대안적 세계관들을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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