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을 변별적이며 때로 사안에 따라서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주체-입장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대신, “여성”과 같은 변별적인 집단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를 심문하면서, 예컨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혹은 “여성들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관념을 철저히 반대하는 버틀러는 초기 작업의 주요 천착지점이기도 한, “제2의 성”으로서 단일체인 여성 개념의 해체가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주체[즉 여성]을 해체한다고 해서 그 단어의 사용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과 같은 용어들/개념들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자는 것이다. . . . ‘행동교섭능력’(agency)과 같은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역설적으로, 여성들이라는 범주를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놓을 때이다.”

버틀러는 의미, 개념, 정체성, 주체성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면서 재의미화(resignification)하는 실천을 행동교섭능력으로 정의한다. 버틀러 식 재의미화 실천은 몸, 젠더, 섹스에 관한 재개념화이기도 한데, 버틀러는 이러저러한 정체성보다는, 사회적 규범들과 헤게모니가 몸에 아로새겨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버틀러에게 몸은 수동적인 구성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인, 개인적인 힘들이 투쟁하는 지점이자,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 반복을 통해서 그 규범들의 물질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성차는 “경계 개념”(border concept)이다. 경계 개념으로서 성차는 “육체적(somatic), 심리적 사회적 차원들을 지니며, 이 차원들은 결코 서로 겹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궁극적으로 변별적인 것도 아니다.” 1980년대를 사로잡았던 구성주의 대 본질주의 논쟁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교착 상황에서 제출된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및 수행적 주체 개념은 “본질”이든 “구성”이든 고착화된 (여성) 정체성 문제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매우 해방적인 개념으로 다가왔다.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에서 보자면 <중요한 물질인 몸>(1994)은 담론중심적 전환을 매우 확실하게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의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이 책에서 버틀러는 “섹스에 부과되는 담론적 한계들”을 강조한다. 형이상학의 토대인 실체(substance)를 거부하는 버틀러는 우리의 몸은 사회적 규범들이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물질화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몸의 물질성이란 오히려 구성되는(constituted) 것이고 성취되는(achieved) 것이다. 섹스란 사회적 규범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섹스는 규율적인 실천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섹스란 “하나의 규율적 이상”(ideal)이기도 한데, 섹스는 훈육적(disciplinary) 권력과 규율적(regulatory) 실천들을 통해서 그 규율적 이상이 특정 (종종 헤게모니적이고 이성애적인) 방향으로 물질화되도록 하는 규율적 이상(ideal)이다. 이상으로서 규범이란 규율적이다.

버틀러의 젠더, 섹스, 몸 재개념화 작업이 지닌 (담론적 영향과 파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와 윤리적 함의에서 보자면,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주체는 담론의 매개에 의해서만 구성되며, 젠더는 “수행적”인 것이지만 담론이 부과하는 한계들에 내에서 수행되는 그런 “하기”(a doing)이다.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성차화된 몸에 부과되는 한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론적이다. 즉, 몸이든 섹스든 젠더든 정체성이든 담론적으로 구성된 경계들에 의존하지 않는 지시대상은 없다. 모든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매개되는 것이며, 주체(성)는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 이로부터 버틀러는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을 “지속적인 개방성과 재의미화가능성”으로 정의한다. 즉, 담론 안에서 담론을 통해서 생산되는 주체는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속에서 발언함으로써 행동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은 재의미화 실천, 즉 언어적/담론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정치와 윤리에서 중요한 항목들인 자기결정, 선택, 책임성, 자율성은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때문에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수많은 이들의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윤리 철학자인 세일라 벤하비브는 버틀러가 주체를 언어의 단순한 효과로 환원하였으며, 적극적 의지, 윤리적 의도, 자기성찰성, 자율적 자아 등을 와해시켜버린다고 비판한다. 벤하비브가 보기에, 주체가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다는 버틀러의 주체관은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여성들에게 힘과 권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목적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주체의 행동교섭능력 자체도 담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버틀러는 <중요한 것은 물질인 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행동교섭능력이란 “기표 안에서 기표에 의해서 구성되는 이중의 움직임이며, 여기서 ‘구성된다’는 것은 그 기표 자체를 ‘인용하거나 반복하거나 모방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버틀러에게 행동교섭능력이 가능해지는 조건은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들을 다시 실행하고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다. 또한 행동교섭능력이란 “담론이 갱신되는 국면들에서 정확하게 발견된다.”

기존의 권력 관계 담론들의 제약과 법칙들 속에서 작업함으로써 이러한 담론들을 재의미화하고 새로운 전복지점들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전복이란 언제나 내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에게 내부는 현실의 권력관계들이라기 보다는 담론의 내부다. 또한, 담론 내부의 과정에서 발휘되는 행동교섭능력이란 그것을 발휘함으로써 차후에 따라 일어날 행위들의 원인도 아니고 주체의 역능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담론적 조건들의 효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 것인 주체로 하여금 권력 관계의 전복을 시도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주체는 재의미화를 시도하는가? 주체도 재의미화도 담론 안에서 생산되고 갱신되는 효과들이라는 버틀러의 개념틀은 이런 질문을 묻게 만들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1997년 저작 <권력의 심리적 형식>은 주체가 왜, 어떻게 헤게모니 담론들에 저항하고 전복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한 버틀러 나름의 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