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이라면 블로그에 쓸 일기란 쓰는 이 편에서는 '내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를 추구허는 가장 적나라한(revealing) 형식이고 읽는 이 편에서 보자믄 '그래 너의 그 은밀허고 사적인 부분이 대체 무엇이다냐'를 '정동적 관음증'을 팍팍 발휘함시롱 엿볼 수 있는 재미난 장르이다. 하여 일기란, 글쓰기의 '공적인' 형태치고 그 형식이 얼마나 파편화되었던지 간에, 일기 쥔이 펼쳐 보이는 (무덤처럼 장엄하고 무거울 수도 있는) "중차대헌(grave) 정체성 문제"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플라스는 이 700페이지가 넘는 지면 내내 '내가 누구더라?'를 되묻곤 헌다. 플라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쓰며-사는 삶"(living-writing life, 231)인데, 이 점은 그녀가 캠브리지로 도바리 쳐 유학을 허던 시절부터는 더욱 뚜렷혀진다. "가장 나쁜 것,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글쓰지 않음시롱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437). 아주 무거워 심각한 우울에 빠지곤 헐 때마다 "글쓰기야말로 나의 건강"이다라고 플라스는 쓰고 있다 (523). 왜 그래쓰꺼나?
딸들에겐 자기 엄마와의 관계가 자신의 삶에 핵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라는 것이 미국 현대 여성 문학들이 줄곧 보이는, 중량감있는 주제들 중 하나다.
플라스는 자신의 정신분석상담의사인 루스 베우셔와 함께 "나의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글쓰기야말로 엄마의 대체물"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사이비) 프로이트적 틀을 가동시켜보믄, 플라스 자신이 일기에서 적고 있는 대로, 그녀는 아버지의 상실을 "애도"함시롱 그것을 엄마탓으로 돌리고 심지어 그 땜시롱 엄마를 열라리 미워헌다 (433; 447). 그 다음으로, (플라스가 죽고 난 직후 몇 년간 열라 유명한 시인이 된) 테드 휴즈를 자신의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아버지와 동일시함시롱 그를 "자기 아버지의 대체물"로 삼는다 (447. 여기서 우리는 그 뻔한 남녀상열지사가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데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딸들은 아버지의 딸들이어야 허지 어머니의 딸들이어선 안 된다).
플라스도 실제로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을 읽고서 자기 상담의에게 자기가 왜 이런 우울증(depression) --결국 이 우울증은 결국 자살로 끝나는디-- 에 고통당허는지를 스스로 설명헌다. "엄마에게 전이시킨 살인시렵게 겁나는 충동을 나 자신에게 옮긴 겁니다. 프로이트가 '뱀파이어'라는 은유를 동원하야 말헌 '자아를 고갈시키는 것'(draining the ego)지요. 이것이, 이제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약해진 엄마를 봄시롱, 글을 쓰는 중에 느껴 온 감정입니다" (447).
플라스에게 글쓰기란, "상실된" 사랑의 대상에 좀더 가차이 갈 수 있게 혀주는 "우울증적 합체"로 기능헌다 (프로이트적 틀에서, "우울증적 합체"란 대상의 상실을 긍정함시롱 동시에 부정허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자기 안에 내면화허는 심리 메커니즘인디, 이것을 "훔쳐다가" 쥬디스 버틀러는 우리의 젠더화된 --특히 이성애중심적인-- 문화가 어찌해서 멜랑콜리에 기초헌 문화가 되는지를 설명헌다.
이 "사적인" 일기를 보면 여성으로서 플라스의 내면이 잘 보인다
내가 보기엔 플라스가 "상실혔다"는 사랑의 대상, 그리하야 평생에 걸친 탐색(quest)의 바로 그 대상은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사랑허지 않는다. 이것은 스스로 시인헐라니 다소 쇼킹헌 점이다. 나에게는 우리 엄마가 지닌 이기심도 자아도 없는(selfless) 사랑의 그 어느 것도 없다. . . . 내가 겪는 최대의 트러블은 나의 기본적이고 에고이스틱헌 자기애에서 나오는 것인디, 고것은 바로 질투다. 나는 남자덜을 질투헌다. 고것은 능동적이고자 하되 수동적이거나 듣기만 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하고자픈 욕망을 타고난 것에 대한 선망이다" (98).
플라스 역시 엄마에 대해서 양가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엄마를 자기 존재의 기원이자, 현재의 자기 자신과 직면하기 위해서 풀어야할 매듭이면서도, 동시에 '엄마처럼은 살 수 없는' 의(지와)욕(망)을 버릴 수 없는 것.
그래서 플라스의 저널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은 이런 식이다. 스스로가 되고 스스로를 발견허고자 "건설적으로 생각허고 작업하라" 그리하야 스스로 나름의 내적인 삶과 사상을 건설하야 능동적인 여성 작가/행동인으로서 스스로를 이 세계 속에 집어 넣으라. 그녀는 자신이 천착하는 토픽,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어삼켜 모조리 태워버리는 주체인 글쓰기로 수천번이고 되돌아간다. 필요허다면 천만번이고 수정하라. 예술이란 "방법화된 자연"(methodized nature)이니 허는 신고전주의적 훈련을 곁들여.
글쓰기는 그녀를 "몰아부치는 야심"(driving Ambition, 495)의 근거이자 바탕이요 그렇기 땜시롱 이따금씩 자신의 시적 무능력에 대한 씰데 없지만 꼭 찾아오는 불안, 그리고 이것이 몰고 오는 실존적 무의미성에도 시달리기도 헌다. 이런 불안은 정확하게 젠더화된 현실과 관련된 바,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여러 번 거절당허곤 혔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사회적 인정에의 접근권과 기회가 적은 젠더화된 현실에 격렬한 분노지심을 폭발허는 대목 (예컨대 하나만 인용해 보겠다. 다음은 19세 시절에 일기에 끄적거린 대목: "왜 여성은 감정의 수호자, 아이들의 보호자, 영혼, 신체, 남성의 쫀심의 양육자라는 입장에 파견되어야 한단 말인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나의 끔찍헌 비극인 게다"[98])은, 식수와 클레망이 말허는 '새로 태어난 여성'이 왜 히스테리로 무장헐 수밖에 없는가를 절절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허다.
그러니 플라스가 자신이 혹여 글을 쓰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닌가허고 끊임없이 촐싹대는(restless)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그녀는 출판사와 잡지사들에서 "아무런 편지가 오지 않아" 실망의 구렁텅이에 종종 빠지기도 하고, 집안일을 하느라, 자기 남편 테드 휴즈의 시를 타이핑혀주느라, 생계를 유지허기 위해 시간강의 등의 일을 허느라 시쓰는 일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노심초사허기도 헌다. 그 뿐이랴. 혹여 자신에게 글쓰는 재능이 없다면 미래에는 멀 먹고 살것인가 허는 생계도 은근스레 걱정거리다. 하여 그녀는 일해서 돈을 벌라믄 박사학위를 가져야 허제라는 생각도 헌다.
플라스 자신의 열에 들뜬 자기 초상을 보노라면, 그녀가 왜 그녀 이후세대들과 동료들에게 소위 '억압된 여성 창조성'의 화신으로 추앙되는지를 눈감고도 이해헐 수 있다. 이 저널을 보면 작가를 '천재'로 보는 낭만주의적인 신화를 산산이 때려부순다. 그녀의 글쓰는 셀프에는 혹여라도 창조적으로 글을 쓰지 못할까하는 불안들과 번민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만큼이나 창조적으로 글을 쓰고자 허는 강렬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불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워 해본 적이 있는 이라면 이 저널은 분명히 '위안'이 될 텐데, 글쓰기란 (저 화려하게 추락한,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후까시를 떰시롱 말헌) "강력한 감정의 자생적인 범람"도 아니요 "고요 속의 기억"을 통해서 나온 것도 아니다.
플라스의 글쓰기는 젠더화된, 불안정한, 모순적 자아를 불안과 열망에 들떠 그러나 솔직허니 바라본 바의 표현이자 끊임없이 미친 듯이 읽어대는 한 율리시즈("a reading ulysses" 100)의 읽기에 바탕한 것이요 다른 동료들(예를 들면, 애드리안 리치)의 낙서와 글들을 열라리 뒷조사꺼정 함시롱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험한 작업에 기초한 것이기도 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블로그 눈팅이 지닌 상호교육적, 정서적 효과를 알 수 있다)
플라스의 저널을 통해서 보자면, 너무나 젊은 나이에 여러 복잡한 사정과 우울증으로 자살해 간 플라스에게, 글쓰기란 끝내 풀지 못한 엄마-딸 관계, 그로 인해 계속 엉키기만 하는 테드 휴즈와의 결혼 생활, 그 속에서 시들어가는 여성 자아를 일상적으로 애도함시롱, 가부장제의 여성 재능 억압에 맞장을 뜨는 개인적, 정치적 행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