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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페미니즘 사상 - 지식, 의식, 그리고 힘기르기의 정치 ㅣ 여이연이론 18
패트리샤 힐 콜린스 지음, 주해연, 박미선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흑인 여성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내면화된 백인우월주의와 대면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대결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오랫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고 또 오랫동안 외면해 온 것, 우리 안의 내면화된 백인우월주의를 성찰해보도록 도전한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온 지 백년만에 미국의 흑인과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간 흑인작가들의 문학 번역작품 번역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바라 크리스쳔, 데보라 맥도웰 등과 더불어 탁월한 흑인 페미니스트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80년대부터 백인 중심적인 페미니즘 논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흑인여성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데 '1등' 공신에 들어가는 '스타'급 흑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사회학자이다. 지금은 매릴랜드 대학 사회학과 및 여성학과 교수로 활동중.
80년대 콜린스는 흑인여성의 관점에서 흑인모성을 거론하면서, 모성을 둘러싼 백인중산층여성중심적 여성주의에 균열을 내면서, 이견들의 경합을 통한 논쟁 지형을 재구성하고 페미니스트 아젠다 재정향의 탁월한 방식을 보여준 바 있는 학자다. 그렇지만, 콜린스의 이런 논의는 한국에 소개된 바도 읽혀진 바도 거의 없었다.
올해 드디어 번역출간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노예제 시절부터 이어져 온 미국 흑인여성들의 일상적 경험과 이야기로부터 흑인 페미니즘을 사상으로 집대성한 역작이다. 그래서, 미국 학부 3,4학년 과목과 대학원 수업 교재로 널리 이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장점은 1) 명료한 내용과 평이한 문장,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과 이론과 사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일상경험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점.
2) 흑인여성들을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의 피해자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저항의 주체요 지식생산자 등 다면적으로 관찰한다는 점이다.
3)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억압을 흑인 여성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분석하고 여성주의적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이론적인 날카로움과 명료함+문학적 상상력.
많은 (페미니즘) 번역서들이 1장. 푸코, 2장. 들뢰즈, 3장 프로이트 식으로 (페미니즘 입장에서의) 주석, 해제인 것과 달리,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흑인여성억압을 분석하면서 이론화하는 이 책의 방법론은 페미니즘 사상 읽기가 재미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간 우리 사회는 '백인우월주의'를 내장하고 있는 연유로 해서, 흑인 페미니즘의 통찰과 성과로부터 배우는 일에 게을렀다. 지난 몇 년간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21세기의 희망은 흑인 및 소수 인종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은 그런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왜, 어떻게 그런지를 보여주는 책들 중 하나다.
또한, "난해한 전문적 어휘"로 가득찬 다른 페미니즘 번역서들과는 달리 (사실, 특히나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글을 두고 "난해"하다는 것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없을테지만), 실천적으로 흑인여성들에게 '힘과 권력'을 실어주는 정치(학)를 가동시키기 위해서 이론이 어떻게 봉사하(ㅣ야하)는지를 기똥차게 짚어내고 있다.
95년 이후 쏟아져 나온 백인 페미니즘 번역서에 비해, 흑인 페미니즘 관련 번역서는 2000년 이후에서야 벨 훅스의 <사랑의 모든 것>, <행복한 페미니즘>, 여성주의(womanism)을 주창한 앨리스 워커의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등이 있고, 나머지는 토니 모리슨을 위시한 몇몇 흑인 여성 작가들의 소설 번역들 정도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번역출판은 다소 늦은감이 없지 않으나, 이 책의 번역출판은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문화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무엇보다, 인종차별적인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투쟁해온 흑인여성들의 삶과 투쟁으로부터 다른 시각, 다른 방식을 상상해 낼 수 있으리라.